국가주의(민족주의)의 대두와 교회체제의 붕괴

교회개혁의 역사적, 혹은 정치적 배경으로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를 들 수 있다. 이미 14세기 무렵부터 민족국가 (nation state)들이 교황청과 제국 하에서 이룩된 서부 유럽의 통합을 위협하기 시작하였다. 중세는 하나의 국제적인 국가였다고 할 수 있다. 교회를 떠나서는 국가라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교회가 하나의 국가로서의 기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족주의의 대두는 중세의 보편적 교회중심체계에 균열을 가져왔다. 중세 말에 이르러 국가에 대한 근대적 개념이 점차로 발달하게 되자 영국, 프랑스, 에스파니아 등 서유럽 국가들은 인종, 언어, 역사적 배경을 공유하는 민족적 연대감을 기초로 왕권의 확립을 가져왔고 이러한 양상은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의 대두를 촉진시켜 주었다. 이러한 민족주의는 필연적으로 왕권과 교황권의 대립과 갈등을 초래하였는데 그 한 가지 예를 든다면 프랑스 왕 필립 4세(Philip IV)와 교황 보니페이스 8세(Boniface VIII)의 대립을 들 수 있다.
   필립 4세가 전쟁비용 확보를 위해 교회 재산에 세금을 부과하게 되자 교황은 1296년(Clericis Laics)과 1302년(Unam Sanctam)교서를 발표하고 교황의 허가 없는 징세를 금하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교황의 위협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필립왕과의 대결에서 패배하였다. 이것은 국가주의의 대두로 말미암아 의회가 필립왕을 강력하게 뒷받침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교황권은 권위를 상실하게 되었고 드디어는 프랑스왕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1305년 교황에 취임한 끌레멘스 5세(Clemens V, 1305~1314)는 프랑스 출신으로서 로마에 있던 교황청을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 되었고 이때로부터 1377년까지 70년간 아비뇽에 머물렀다. 이것은 교황이 프랑스왕의 통제 하에 있었음을 의미하는데 이  기간동안의 일곱 명의 교황, 곧 끌레멘스 5세, 요한 22세(John XXII, 1316~1334), 베네딕또 12세(Benendictus XII, 1334~1342), 우르바누스 5세(Urbanus V, 1362~1370), 그레고리오 11세(Gregorius XI, 1370~1378)는 다 프랑스인이었다는 점만 보아도 분명하다. 당대의 지식인이었던 단테(Dante, 1266~1321)와 인문주의자 페트라카(Francesco Petraca, 1304~1374)는 아비뇽 교황들을 프랑스왕의 포로라고 하면서 “교황의 바벨론포로”라고 비꼬아 표현하였다. 이와 같은 점들은 민족주의의 발흥이라는 정치적 배경이 교황권의 퇴보와 중세 질서의 붕괴의 한 원인을 제공했음을 보여준다.

1377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로 돌아감으로써 아비뇽시대는 끝났으나 그의 사후 추기경단이 분열되어 후임 교황선출이 지연되다가 1378년 우르바누스 6세(Urbanus VI, 1378~1389)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교황 우르바누스가 추기경들과 불화를 빚게 되자 프랑스와 에스파니아 추기경들은 교황선거의 무효를 선언하고 프랑스왕의 사촌인 제네바 대주교 로베르(Robert) 추기경을 다시 교황으로 선출(끌레멘스 7세, 1378~1394)하였고, 그가 아비뇽에서 취임하게 되자 교황청은 분열되었다. 이때로부터 1417년까지 40년을 ‘교황청의 대분열기’라고 부르는데 이 기간에 교황의 권위가 극도로 실추되었다. 문제가 심각해지자 1409년 이탈리아 피사(Pisa)에서 열린 공의회는 당시 로마교황인 그레고리오 12세(Gregorius XII, 1406~1415)와 아비뇽 교황 베네딕또 13세(Benedictus XIII, 1394~1422)의 퇴임을 전제로 하고 알렉산더 5세(Alexander V, 1409~1419)를 선출하였으나 곧 사망하므로 다시 요한 23세(John XXIII, 1410~1419)를 선출하였는데 앞의 두 교황이 퇴임을 거부하므로 결국 교황은 세 사람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와중에서 교회는 극도로 분열되었고 세 교황은 각기 정통성을 주장하여 반대자들을 서로 파문함으로써 당시 교회는 대부분 파문 상태에 있었다.
   이상과 같은 민족주의의 대두 등 정치적 상황은 극도의 혼란과 분열 가운데 실추된 교황권과 더불어 개혁의 필요성을 확신시켜 주고 있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

교회개혁의 배경이 되었던 또 한 가지 요인으로 인문주의 운동이었다. 흔히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새로운 문화운동은 1350년 북부 이태리에서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15~16세기 영국, 에스파니아, 헝가리, 폴란드, 네덜란드 등 구라파 전역으로 확산된 운동인데 중세적 인간관과는 달리 인간성을 고양하는 새로운 인간관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인본주의라고도 불린다.     그래서 불크하르트는 르네상스를 한마디로 ‘인간의 발견’(discovery of man)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이때의 르네상스운동을 다른 인문주의와 구별하기 위해 ‘르네상스 인문주의’(Renaissance Humanism)라고 일컫는다. 이 운동은 인간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더불어 고전문학, 곧 희랍, 로마문학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특히 이들은 1세기의 라틴어체,  곧 키케로(Cicero)의 라틴어를 복구하려고 했다. 인문주의는 고전어 연구를 촉진시켰고 고전어 연구는 성경원전에 대한 연구와 함께 문헌학(Philology)을 발전시켰다. 이 점은 교회개혁을 예비하는 값진 봉사를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로렌조 발라(Lorenzo Valla, 1407-1457)였다. 그는 문헌비평학을 도입하여 오랜 세기동안 교황권을 지원해 주는 자료로 사용되었던 소위 ‘콘스탄틴 기증서(Donation of Constantine)'가 콘스탄틴 황제 당시에 작성된 문서가 아니라 8세기에 조작된 위조문서임을 고증함으로써 당시 교회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가했고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한 적씩 고백한 문서라는 루피누스(Rufinus)의 설명이 허구임을 규명하였다.
   특히 발라는 어거스틴 연구에 몰두하였는데, 당시 읽혀지는 어거스틴의 작품 중 40%정도는 후대의 첨삭으로 변조되어 있음을 밝혀냄으로써 충격을 주었다. 말하자면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모든 것을 역사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 주었다. 중세는 ‘역사적 관점’(Historical Perspective)을 갖지 못했다. 문헌학 자체가 ‘역사적' 학문임을 생각해 볼 때 르네상스 운동은 새로운 과학적 방법인 ‘역사적․비평적 방법’을 존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방법은 원천에 대한 관심을 의미하는 바 ad fontes, 곧 ‘원천에로의 복귀’(Back to the source)는 인문주의 운동의 중요한 이념이었다.
   결국 인문주의자들은 고전연구 뿐만 아니라 교회개혁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인문주의가 중세교회와 스콜라신학을 정면으로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역사 비평적인 문헌학 연구는 교황권과 스콜라신학의 붕괴를 촉진시켰으며 종교개혁을 위한 예비적 역할을 감당하였다. 또 이들이 교황과 교직자들의 부도덕과 사치를 비판하고 풍자한 일은 개혁의 대중적 동의를 가능케 했다. 이 당시 인구의 90%가 인문주의의 영향 하에 있었다는 보고를 참고해 볼 때 인문주의자들은 루터에 앞서 개혁의 길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루터와 쯔빙글리를 비롯한 당시 개혁자들도 인문주의의 영향 하에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회 경제적 배경

   당시의 사회 경제적 상황 또한 교회개혁의 원인이었다. 경제적 상황은 직접적으로 국민들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었고 사회 구조와 경제체제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으므로 교회개혁을 이끌어간 중요한 원인이었다. 사회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12-13세기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상업과 도시의 발전은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져왔고 15세기말엽에는 부르조아 집단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부상하였다. 또 종래의 중세 봉건 제도에 완전히 적응하고 있던 교회는 기득권 곧 기존의 계급체제 및 행정체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자본주의적 수단을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1500년대의 유럽 인구는 6천 5백만 내지 8천만명으로 추산되는데 약 60명이상의 왕들과 귀족들, 그리고 대주교 등 교회지도자들이 지배계급으로 권력과 부를 독점하고 있었고, 농민과 노동자들은 매우 빈곤한 상태에 있었다. 앞서 티르나겔에 의하면 15세기 말엽에는 적어도 85%이상의 백성들이 피지배계급으로 심각한 경제적 빈곤 가운데 있었다.
   스피츠에 의하면 단시 유럽 토지의 3분의 1은 교회의 소유이거나 교회의 통제아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농민들은 자신들의 생산물 중에서 70-80%를 지대(地代)와 세금, 헌금 등으로 영주나 교회에 바쳐야 했으므로 농민들의 생활상은 비참할 지경이었다. 농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은 1524년 폭발된 농민전쟁 때 루터의 동정을 구하기 위해 루터에게 제출한 12개 신조(1525년)에 잘 반영되어 있다.
   루터는 부(소유)는 분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핍절된 이웃을 위해 분배되지 않은 제물은 ‘소유의 본질’(nature of possesion)을 상실한 것으로 규정하고 설교했으나, 이기적인 악적 자본가들의 고리대금업은 그치지 않았고 소유하지 못한 계층을 더욱 깊은 가난의 수렁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교회 또한 물질적 탐욕에 깊이 젖어 있었다. 아마도 이와 같은 배금사상, 곧 황금은 영혼을 천국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는 사상에서 면죄부까지 생겨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형편에서 설교가 존 게일러 (Johannes Geiler von Kaysersburg, 1445-1510)는 “성직자들의 영혼을 낚는 어부 대신 영지를 낚는 어부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했다. 어떤 사회든지 소수의 지배계층이나 특권층은 보수적 경향을 지니지만 피지배계층은 사회변혁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이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농민들과 노동자 등 대부분의 백성들은 정치적, 사회적 혹은 종교적 변혁을 요구하고 있었고 이 요구는 개혁 운동의 확산에 소위 민중적 기반을 형성하였다. 교회개혁은 독일의 남부 지역보다 더 후진적이고 가난했던 독일 북부 지역에서 더욱 큰 호응을 받았던 점은 이상과 같은 사회, 경제적 요인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영적 갈망

여러 가지 외적인 요인이 개혁의 원인이 되었고 개혁을 이끌어간 힘으로 작용했지만 구라파 전역에 범람하는 물처럼 흘러 들어간 영적인 갈망만큼 강렬한 동력이 되지는 못했다. 특히 14세기 이후 중세는 여러 가지 사회적 불안이 가중되고 있었다. 빈번한 기근, 유럽 인구의 5분의 2가량의 생명을 앗아간 14세기 중엽(1347-48)의 흑사병, 1453년에 이르러 끝이 난 영국과 프랑스간의 100년 전쟁, 후스 전쟁(1419-1435)과 장미 전쟁(1455-1485),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회교도들의 계속적인 위협 등과 같은 정치적 불안은 경제적 빈곤과 함께 사회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기존의 교회는 도덕적, 영적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새로운 영적 운동을 갈망하고 있었다. 세속화된 교권 체계나 냉냉한 스콜라주의, 의식적 종교는 영적 기갈을 해결해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교적 상황에서 나타난 현상이 소위 ‘마술적인 경건’(margical piety)이라고 불리는 성자숭배, 성물 혹은 성자들의 유품 숭배, 성지 순례 등 미신적이고 마술적인 신앙 부흥 운동이었다. 이런 오도된 경건은 정당한 의미에서 영적 기갈에 대한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종교적 열정은 뜨거웠으나 이것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갈 영적 계도력은 상실되어 있었고, 프랑스 교회사가인 델루메오(Delumeiax)의 말처럼 성직자의 수는 많았으나 성직자의 질적 수준은 한없이 낮았다.
   14세기에 나타난 신비주의 운동 혹은 신비 신학은 일면 종교적 갈망의 표현이었다. 교권적 체제를 벗어나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통을 추구했던 이 일련의 신앙 운동은 교회개혁의 의미가 있었다.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7), 타울러(Johann Tauler, 1300-1361)등에 의해 기원된 신비주의는 독일, 특히 라인강 지역에서 크게 전파되었고 후에 프랑스, 네덜란드 지방으로 확대되었다. 신령한 영적 생활을 갈망하던 노력은 네덜란드에서 헤에르트  흐루테(Geert Groote, 1340-1384)에 의해 ‘오늘의 헌신’(Devotio Moderna)운동으로 나타났고 후일 ‘공동생활 형제단’(Fratres communis vitae)으로 발전되기도 했는데, 이런 일련의 활동은 바로 영적 갈망의 표현들이었다.
   이와 같이 15세기 유럽에서는 새롭고도 참된 종교적 부흥을 고대하였으나 당시 교회는 이 범람하는 여구를 해결해 주지 못했다. 따라서 영적 갈망은 개혁의 원인이 되었고 개혁운동의 확산에 기여하였다. 유럽의 들판에 영적 가뭄으로 인한 기갈이 심화되고 있을 때 교회개혁이라는 복음주의 신앙운동은 유럽의 대지를 촉촉히 적셔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16세기 개혁자들은 그 이전시대부터 미미하게나마 계속되어 오던 교회개혁의 의지들을 유산으로 하여 하나님의 때가 찬 경륜을 위해서 부름에 응답할 수 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