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 교회개혁사, 성광문화사, 1997

-- 16세기 종교개혁의 역사를 간명하게 기술한 교회개혁사는 루터, 쯔빙글리, 칼빈, 존 낙스 등의 종교개혁자들의 교회개혁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앞으로 매주 단위로 책의 내용을 차례로 연재할 것이다. --


제 1장 교회개혁이란 무엇인가?

1. 교회개혁의 이해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의 젊은 신학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그곳의 대학교회의 문 앞에 95개항의 논제(Die 95 Thesen)를 내건 사건은 16세기 교회개혁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루터는 면죄부 판매 등 당시 교회가 가르치는 잘못된 주장들에 대해 학문적인 토론을 열 계획이었지 교회개혁이라는 세계사적인 변혁을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점은 95개항을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는 독일어가 아니라 식자들만이 알 수 있는 라틴어로 작성되었던 점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은 10월 31일, 그 날을 하나의 분명한 시발점으로 하여 세계의 역사를 바꾸는 교회개혁운동으로 발전되어 갔다. 헤겔은 그의 책 「역사철학강의」에서 종교개혁을 "중세기 끝에 여명을 띄우고 솟아나 모든 것을 비추는 태양"이라고 했는데, 이 표현은 어두운 중세를 퇴각시키고 근세의 새벽을 밝히는 시대의 근본적인 개혁에 관한 표현으로 교회개혁운동을 정신사적으로 정리해준다. 사실 루터 이전에도 이미 많은 사람들의 개혁을 위한 시도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극심한 탄압을 받았는데, 15세기의 후스(John Hus, 1373-1415)가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교황의 지상권(至上權)을 부인하고 오직 성경만이 유일한 권위임을 주장했다가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1415년 화형을 당했던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후스가 마지막으로 한 말 "그대들이 지금은 작은 새를 불사르지만 이제 100년 후에는 큰 황새가 날 터인데 그때는 아무도 그를 죽일 수 없을 것이다."는 예언적인 선언이 있은 지 꼭 102년 만에 루터는 유럽의 역사 한 가운데로 인도되었다.
    루터 자신은 종교개혁이라고 부르는 거사를 의도하지 않았으나 10월 31일의 95개조 사건은 루터 자신도 예견하지 못했던 교회개혁이라는 세계사적 변혁을 가져오고 말았다. 개혁의 때는 성숙되었으므로 교회개혁은 역사의 필연적 요청이었기 때문이다. 이 역사의 물줄기는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영적, 도덕적 부패와 타락, 국가주의(Nationalism)의 대두, 인문주의의 발흥, 그리고 중세교회의 이론적 뒷받침이었던 스콜라 철학의 붕괴 등 복합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었다. 교회개혁은 이루어져야만 했고 루터는 이 개혁운동의 한 동기를 부여하였을 뿐이다. 말하자면 루터는 교회를 새롭게 세워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수종들었던 인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랑케(Ranke)는 그의 「교회개혁의 역사」에서 루터의 출연은 하나의 시대적 요청이었으므로 "그의 마땅히 이 세상에 오지 아니하면 안되었다."(Luther musste kommen)라고 했다. 결국 루터의 95개조를 통한 파문은 불과 한 달이 못되어 민중의 묵시적 동의를 얻으면서 전 유럽에 파급되었다. 티르나겔(T.S.Tiernagel)의「교회개혁시대」(The Reformation Era)에 의하면 16세기 당시 독일의 신분계층은 귀족이 10%, 성직자가 5% 그리고 민중이라 할 농민, 노동자 등 피지배층이 85%였다고 한다. 후에 좀 더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85%이상을 차지하는 민중들은 역사의 변혁을 기대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은 교회개혁의 일조를 담당하였다. 이렇게 해서 개혁운동은 기독교의 역사, 아니 세계의 역사를 바꾸는 일대 변혁적 사건이 된 것이다.

   20세기 전반기 독일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라고 불리는 마이네케(F. Meinecke)는 서구 역사에 영향을 끼친 가장 큰 정신적 혁명으로 두 가지를 말했는데, 그것은 역사주의(Historismus)와 교회개혁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지나친 말이 아니다. 서양에서는 교회개혁을 '더 레포매이션'(The Reformation)이라고 말한다. 개혁(Reformation)이란 말은 보통명사이며 추상명사이지만 그 앞에 정관사(the)를 붙여 쓰면 16세기 교회개혁운동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된 것은 개혁운동의 세계사적 의의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교회개혁은 단순히 종교적 영역이나 종교생활에 한정되어 있지 않고 서구의 역사와 문명 전체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종교개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오해가 있어 왔다.
첫 번째 오해는 '종교개혁'이라는 용어이다. 우리는 16세기 개혁운동을 흔히 '종교개혁'(宗敎改革)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교회의 제도와 신학에 대한 개혁운동이었으므로 사실은 교회개혁(敎會改革)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종교개혁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일본의 영향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영어의 'The Reformation'을 '종교개혁'이라고 번역하였으며, 우리는 일본을 통해 서양사학을 배웠으므로 16세기 교회개혁운동을 종교개혁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교회사를 가르친 첫 인물은 호주선교사였던 왕길지(Gelson Engel, 王吉志)였는데 그는 종교개혁사를 '교회갱생사'(敎會更生史)라고 불렀다. 이런 점들은 고려해 볼 때 '교회개혁'이라는 표현이 '종교개혁'보다 적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오해는 개혁을 단순히 교리적인 개혁운동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다. 사실 16세기 교회개혁운동은 교리적인 개혁(Reform)만이 아니라 영적 부흥운동(Revival) 혹은 영적 쇄신 운동의 성격이 있다. 교회개혁운동이 상당한 박해 속에서도 계속 될 수 있었던 것은 신앙적 삶에 동력을 주는 영적 부흥의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리적 개혁으로만 이해되었던 것은 당시 교회의 교리적 탈선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교리적인 개혁이 영적 쇄신운동에 의해서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것은 이념화 혹은 이데올로기화되기 쉽고, 반대로 영적부흥운동이 건전한 교리적 기초를 지니지 못하면 신비주의적 혹은 주관주의적 운동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가장 이상적인 교회개혁은 교리적 개혁과 영적부흥의 성격을 동시에 지녀야 하는데 이런 점에서 16세기 개혁은 교회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세 번째 오해는 개신교회는 16세기에 천주교회 곧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갈라져 나왔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교회를 모교회(Mother Church)라고 생각하고, 신교는 분열된 교회라고 보고 있다. 이런 인식은 정확하지 않다. 왜냐하면 프로테스탄트 신학, 혹은 프로테스탄트 신앙은 16세기에 와서 비로소 생겨난 새로운 어떤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 때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16세기 개혁운동은 원시교회의 신앙전통을 회복하자는 것이었지, 교회전통과 단절된 어떤 새로운 운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회 복음주의 신학을 새로운 신학(New Theology)이라 하고 개신교회를 새로운 교회(New Church)라고 말하는 것은 사도적 기독교와의 관련성, 곧 역사적 정통성을 부인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가 개신교를 '새로운' 어떤 것이라고 지목했던 것은 프로테스탄트운동의 역사성을 부인하고 현실성만 부각시키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단의 특징은 역사성은 없고 현실성만 있다. 말하자면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는, 개신교 운동은 사도적 기독교와 관련성 없는 이단운동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개신교의 복음주의 신학 혹은 개혁주의 신학은 루터, 쯔빙글리, 칼빈 등의 개혁자들이 창시한 것이 아니라 이미 어거스틴이 가르친 것이며,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었다. 단지 그것이 오랜 세월 동안 가톨릭의 교권 체제하에서 가려져 있었을 따름이다. 중세 교권체제 하에서도 면면히 이어온 복음주의 신앙은 16세기에 와서 다시 부흥한 것이지 16세기에 와서 비로소 생성된 새로운 어떤 것이 아니다. 마치 비가 많이 오면 물은 지표면으로 흐르지만 가뭄이 심하면 물이 땅속으로 흐르는 것처럼, 가톨릭교회의 조직적인 탄압 하에서도 개혁신앙은 미미하나마 유지, 계승, 발전되어 오다가 16세기에 다시 부흥한 것이다.
   교회개혁에 대한 네 번째 오해는 개혁을 오직 16세기의 '역사적 사건'으로만 이해하는 경향이다. 즉 교회개혁은 오늘의 현실과 무관하다는 생각이다. 개혁은 과거적 사건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똑같은 의미를 주는 계승된 역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개혁자들 특히 베자(Theodore Beza)는 "교회는 개혁되었으므로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이지만 사람들로 구성되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이 지상의 교회는 완전하지 못하고, 항상 부패, 타락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아래서 부단한 자기개혁을 시도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바로 교회개혁의 정신이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개혁이 시작된 지 48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교회개혁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