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칼빈의 반대자들

   제네바교회를 성경적 원리에 따라 개혁하고 제네바시를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개혁하고자 하는 칼빈의 노력은 ‘교회규정’이라는 문서를 통해 표명되었다. 이 문서에서 칼빈은 교회가 바로 되기 위해서는 초대교회가 보여주는 확립된 직제와 치리제도를 갖추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목사와 교사, 장로와 집사 등 네 직분을 두었는데 이것은 목회적인 의도와 신자의 삶 전체를 합당한 질서와 규율로 지도하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칼빈이 장로와 집사 등 초대 교회적 직분을 두게 한 일은 당시로 볼 때 대단한 개혁이었다. 왜냐하면 중세교회 이래로 장로와 집사직은 사실상 사라졌기 때문에 칼빈은 이 직분을 다시 회복하였고 초대교회적 원리에 따라 교회를 조직하고 교회의 질서와 치리를 담당케 하였던 것이다.
   ‘교회규정’에 따라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감독회’(Consistory)는 교회적 질서와 훈련, 치리를 담당하였는데, 개혁의 중심 기구였다. 이들은 ‘복음에 따라 살도록’ 시민들을 선의로 지도(fraternal corrections)하고 권면(admonitions)하였고, 교회규정에 따라 살지 않는 사람은 성찬에 참여시키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신앙원리에 따라 사는 사람만을 성찬에 참여시킴으로써 점진적인 삶의 개혁을 의도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감독회는 교회의 치리를 담당한 중요한 기관이었는데 오늘의 장로교회와 관련하여 말하면 당회와 같은 성격을 지니는 것이었다.
  
 제네바를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개혁하려는 칼빈의 노력은 많은 반대에 부딪쳤다. 무엇보다도 신앙적 원리에 따라 살지 않는 이들에게 수찬을 정지시키려 했던 일은 거센 반발을 샀는데 그 주된 세력이 시 당국이었다. 제네바시 당국은 수찬정지를 명하거나 철회하는 것은 자기들의 권한에 속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 권한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이것은 그 후 10여 년간 감독회와 시정부 사이의 갈등과 대립의 요인이 되었다. 또 이때 칼빈의 엄격한 개혁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가세하였고 신학적으로 칼빈을 대적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칼빈의 단호하고도 엄격한 개혁으로 사실 제네바시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많은 술집이 폐쇄되었고 간음이나 노름, 부도덕한 행위가 현저히 줄어들었고 교회결석, 예배 도중에 나가는 행위나 신성모독적인 언행이 사라졌다. 그러나 이러한 엄격한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있었는데 크게 세 가지 부류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정치적 반대 세력이었고 둘째는 리베르틴파들(Libertines)이었고 셋째는 칼빈과 신학적 입장을 달리하는 인사들이었다. 이 당시 칼빈과 신학적 견해를 달리했던 이들, 곧 제롬 볼섹, 장 트롤리에, 세바스티안 카스텔로, 그리고 미카엘 세르베투스 등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리베르틴파 인사였다는 점에서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단지 이 글의 전개상 편리하게 구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정치적 반대자들
아미 페렝(Ami Perrin)과 그의 장인 프랑소와 파브르(Francois Favre)는 칼빈의 제네바 복귀를 위해 크게 공헌한 사람이었지만 1546년부터는 칼빈을 반대한 대표적인 정치적 인사였다. 아미 페렝은 자신들의 도덕적 상태는 고려하지도 않고 감독회로부터 여러 번 권고받은 일에 불만을 품고 칼빈을 반대하였다. 특히 그와 그의 아내는 1546년 4월 투옥된 일이 있는데 석방된 이후 그의 장인과 더불어 칼빈에 대한 비판자가 되었다. 그가 프랑스 주재 제네바 대사로 있을 때는 칼빈을 비롯하여 제네바에 있는 외국인을 암살할 음모를 꾸몄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리베르틴파
리베르틴파란 보통 ‘자유파’, 혹은 ‘방종파’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일반적으로 16세기 종교개혁기, 특히 1525년 전후에 출현하여 독일, 프랑스, 스위스, 화란 등지에 산재해 있었던 율법폐기론적 성격을 띤 과도한 자유편향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종교가 생활의 자유를 규제하는 것을 반대하는 이들이었다. 칼빈은 리베르틴파를 재세례파의 한 분파로 보았다. 이들 또한 칼빈의 엄격한 개혁에 반대하고 특히 신학적 이견을 가지고 칼빈에 대항하였다. 이제 이들 중 대표적인 몇 사람에 대해 언급해 보고자 한다.


볼섹          
볼섹(Jerome Bolsec, ?-1584)은 프랑스인으로 수도사였으나 개신교로 개종하였고 1550년 제네바로 이주하였다. 외과 의사이자 신학자였던 그는 그 이듬해 곧 1551년부터는 공개적으로 칼빈의 은총론과 예정론을 공격하였다. 그는 선택과 유기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신앙에 기초한다고 주장하고 “하나님이 그의 영원한 작정에 의해서 어떤 사람들은 구원에, 또 다른 사람들은 멸망에 이르도록 예정하셨다면 이는 하나님을 폭군으로 만드는 것이요, 쥬피터와 같은 이방인들의 우상과 다를 것이 없다.”고 하였다.
 
  칼빈은 1536년판「기독교 강요」에서부터 예정론을 언급하였는데 그의 스트라스부르크에서의 목회경험의 결과로 1539년도「기독교 강요」에서는 예정교리가 더욱 자세히 언급되었다. 칼빈은 복음을 증거할 때 동일한 말씀이지만 상이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비밀스런 뜻이 있다고 보고 예정론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볼섹은 칼빈의 예정교리를 거짓되고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특히 그는 칼빈과 칼빈의 견해를 따르는 이들을 우상숭배자라고 비난한 죄명으로 제네바 시의회에 의해 추방되었다. 그 후 볼섹은 다시 구교로 개종하였고 칼빈을 험담하고 극단적으로 비방하는 책을 저술하기도 했는데, 이 책은 1557년 출판되었다.


카스텔리오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Scbastian Castellio, 1515-1563) 또한 칼빈에게 대항하였던 인물이다. 사보이 출신인 그는 가난한 가운데 고학으로 당시로서는 이름 있는 언어학자가 되었던 인문주의자였다. 그가 스트라스부르크에 체류할 당시는 칼빈과 같이 하숙한 일도 있고 칼빈과 함께 제네바로 돌아와서 학교의 교장으로 봉직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는 칼빈과 견해가 다르다는 점이 점차 밝혀지게 되었다. 특히 아가서의 정경성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아가서는 옛날의 연가(戀歌)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기독교회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하였다. 더욱이 그는 아가서는 외설적인 문서로서 저자 자신의 ‘분방한 연애사건을 묘사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아가서를 비유로 해석하였으므로 그 정경성을 의심치 않았다. 
   카스텔리오는 자신의 대가족에 비해 봉급이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하고 목사가 되겠다고 지원하였으나 칼빈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봉급을 올려주도록 요청하였다. 카스텔리오가 목사가 되겠다고 청원했을 때 칼빈이 반대한 이유는 그의 신학적 견해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제네바를 떠나 타지에서 일자리를 찾으려 했으나 순조롭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1544년 4월 다시 제네바로 돌아왔고 재차 목사가 되겠다고 청원하였으나 다시 거절되었다. 이렇게 되자 그는 칼빈과 그 동료들은 사도바울과 근본적으로 다를 뿐 아니라 탐식가이며 방탕한 자들이라고 비난하였다. 또 세르베투스에 대한 처벌은 부당하다고 항의하였다. 결국 그는 제네바를 떠나야 했고 1553년에는 바젤대학의 헬라어 교수가 되었다. 1554년에는 「이단은 박해 받아야만 하는가?」(De non Puniendis Gladio Haereticis)라는 책을 가명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엄격한 치리를 시행하므로 그리스도인의 삶 전반에 있어서 성화적 삶을 추구하였던 칼빈 등을 비난하였는데 특히 그는 국가가 이단처벌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칼빈의 견해를 반박하였다. 그는 이 책으로 16세기의 가장 유명한 종교적 관용주의자가 되었다.


세르베투스
칼빈을 반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불행한 처형으로 칼빈에게 가장 큰 비난거리를 제공하였던 인물은 미카엘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1511-1553)였다. 스페인의 나바르 출신으로 스페인, 빌르뇌브(Villenueve), 레리다(Lerida) 등지에서 자란 그는 신학과 법률과 의학에 있어서 비범한 재능의 소유자였다. 특히 그는 내과의사로서 그의 병리학적 연구는 의학발전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그러나 그의 신학적 견해는 개혁자들과 달랐으며 가톨릭의 입장에서도 심각한 이단이요 요주의 인물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는 교회의 이상을 초대교회적 순수성에로의 회복으로 보았고 니케야 이전 시대를 이상적 시기로 보았기 때문에 삼위일체 교리를 반대하였다. 1530년 10월까지 그는 바젤에 체류하였는데 이때 그는 여러 교회적 지도자들과 접촉하였는데, 특히 외콜람파디우스와 접촉하였다. 그는 ‘삼위일체’에 관한 고전적 정의가 비성경적임을 주장하고 외콜람파디우스를 설득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그는 스트라스부르크로 이주하였고, 1531년 6월에는 「삼위일체의 오류」(De Trinitatis crroribus libri septem, The Error of the Trinity)라는 책을 출판하여 삼위일체론을 공격하였다. 그는 스트라스부르크의 개혁자인 마르틴 부쩌의 입장을 비판하였으므로 이곳에 계속 체류할 수 없게 되자 다시 바젤로 돌아왔다. 여기서 다시 쓴 책이「삼위일체에 대한 두 권의 대화」(Dialogorum de Trinitate libri duo)이다. 이와 같은 삼위일체에 대한 비판은 신·구교 양측에 의해 문제시 되었으나 로마 가톨릭측은 1532년 6월 17일 그의 체포를 명했다. 이때 세르베투스는 잠적하였는데, 곧 그는 프랑스 리용으로 도피하여 21년 동안 미쉘 빌르뇌브(Michel Villeneuve)라는 가명으로 살면서 의사로서 활동하였다. 이 기간 동안 가명으로 칼빈과 서신을 교환하며 신학적 토론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는 1553년에는「기독교의 회복」(Christianismi Restitutio, Restitution of Christianity)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는데 이 책에서는 콘스탄틴의 회심으로 시작된 교회와 국가 간의 유착이야말로 교회의 가장 큰 비극이며 배교행위였음을 지적하고 삼위일체 교리를 확정하였던 325년의 니케야 종교회의는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많은 부분이 이전에 출판된 그의 책 ‘삼위일체의 오류’를 반복한 것이지만 삼위일체 교리라는 궤변을 받아들임으로써 교회는 본래의 순수성에서 떠나 타락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이 책에서 칼빈의「기독교 강요」를 공박하면서 삼위일체론은 ‘대가리가 셋인 지옥의 개’와 같은 것이라고 악담하기도 했다.
   21년간이나 가명으로 지내왔으나 결국 그의 정체가 드러났고 1553년 4월 4일에는 리용의 종교 재판소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이단혐의로 재판을 받았으나 3일후 탈출하였고, 결국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그를 대신하여 만든 인형을 불태웠다. 도피한 세베르투스는 수주일간 잠적해 있다가 비밀리에 제네바로 가서 주일 오후 예배에 참석하였으나 그곳에서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그에 대한 재판은 수주일간 계속되었는데 칼빈은 그에 대한 38개 항목에 이르는 죄목을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칼빈을 반대하였던 일부의 제네바인들은 세르베투스가 이미 가톨릭에 의해 이단이라는 판결을 받았으므로 개신교에서는 도리어 그를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시정부는 스위스의 다른 주들의 견해를 수렴하여 그의 유죄를 인정하고 1553년 10월 26일 화형(火刑)에 처할 것을 선고하였다. 이때 칼빈은 고통이 덜한 참수형(斬首刑)을 주장한 바 있으나 그 다음날 화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은 많은 논란을 야기시켰다. 세르베투스의 처형에 대해 개혁자들, 곧 불링거, 멜랑히톤, 파렐, 베자(Thodore Beza)등은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받아들였으나 칼빈을 비난하는 사람 또한 적지 아니하였다. 소위 방종파라고 불리우는 리베르틴파 세바스티안 카스텔로 같은 사람이 대표적 인물이다. 이 사건으로 칼빈은 제네바에서 교리 우선주의의 상징적 인물로 이해되었다. 칼빈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의식하면서 자신의 처신이 정당한 것임을 말하기 위해 처형이 집행된 이듬해인 1554년 2월 「성삼위일체의 정통 교리에 대한 변호」(The Defense of the Orthodox faith in the Sacred Trinity)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 칼빈은 이단인 경우는 사사로운 인정에 구애받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실 유스티니안 법전(code of Justinian)에서는 재침례와 삼위일체부인은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이단적 범죄로 규정하고 있었으므로 법적인 하자는 없었다.
   또 당시 이단에 대해 가해지는 형벌이나, 바른 교리를 지켜야 하는 보다 시급한 과제를 고려해 본다면 세르베투스 처형과 관련하여 칼빈에게 보냈던 비난과 찬사들을 이해할 수도 있다. 벤자민 워필드(B. B. Warfield)는 칼빈의 종교적 불관용성에 대한 비난을 의식하면서 “칼빈은 우의(友誼)보다는 진리를 선택했다”고 하여 칼빈을 변호하기도 했다. 그러나 칼빈은 의무와 책임, 찬사와 비난, 그 어느 것으로부터 자유할 수는 없다. 그도 세르베투스의 처형에 가편 투표를 했기 때문이다.
   오랜 역사가 지난 일이긴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부기해 둘 것이 있다. 세르베투스가 처형된 지 꼭 350년이 지난 1903년 칼빈연구가 에밀 두메르그(Emile Doumergue)의 제안에 따라 칼빈의 후예들은 세베르투스가 타오르는 불길 속에 죽어갔을 그 현장에 ‘속죄의 기념탑’을 세웠다.
   이상에서 우리는 칼빈을 반대했던 사람 중 몇 사람을 선별하여 언급하였다. 정치적 입장이나 사사로운 개인감정에 따른 반대세력도 있었지만 신학적 견해차, 곧 교리적 차이로 인한 반 칼빈적 인사들은 하나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신학적으로 방종파, 곧 리베르틴이란 점 외에도 칼빈이 주창했던 주요한 교의를 반대하였다는 점이다. 곧 볼섹, 카스텔리오는 예정과 선택의 교리를 부정하였고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였다. 또 이들은 모두가 의사였으며 모두가 에라스무스와 같이 르네상스 인문주의적 배경을 가진 크리스천 휴머니스트들이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