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칼빈의 회심과 개혁사상

칼빈의 생애에 있어서 하나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 사건은 그가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을 출판한 후 약 18개월이 지난 1533년 10월에 일어났다. 즉 칼빈은 오르레앙 지방에 가서 일 년간 체류하였고 1533년 8월에는 그의 고향인 노용을 방문한 후 다시 파리로 돌아갔다. 이때가 1533년 10월이었다. 칼빈은 이곳에서 이전의 친구였던 니콜라스 콥과 교제하였고 1533년 10월 31일, 곧 ‘모든 성자의 날’(all Saints' day)에 니콜라스 콥은 파리대학 학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이때의 취임연설문은 칼빈의 영향 하에 작성된 것이었다. 혹자는 칼빈이 연설문을 대시 썼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점은 분명치 않다. 칼빈이 어떤 형태로든 연설문 내용에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었다. 이 사건 때문에 니콜라스 콥과 함께 칼빈은 파리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연설문에서는 소르본느 대학과 그 신학자들의 완고함을 비판하고, 에라스무스와 루터를 인용하여 교회개혁운동을 동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복음주의적 신앙을 강하게 표현하였다.

   ···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들의 마음속에 신앙과 사랑과 희망을 일깨워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은총으로 인도하시고 이끌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복음을 믿게 하시며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하여 섬겨야 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마음을 평화와 기쁨으로 충만케 하심으로 성령의 힘에 의하여 소망 중에 승리하도록 하십니다.

이 연설문 속에 복음주의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므로 니콜라스 콥은 곧 당국의 소환을 받았고 상황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그는 곧 바젤로 도피하였다. 칼빈 역시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파리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미 그는 가택수색을 받았고 그의 책들과 서신들은 압류된 상태였다. 그래서 칼빈은 일정기간 파리에 숨어 있었으나 1534년 초 가명을 쓰고 루이 뒤 텔레(Louis du Tillet) 집에 은신해 있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칼빈은 루이 뒤 틸레의 장서들을 이용하여 지적 성숙을 이루어 갔으며 이때의 공부는 후일 「기독교강요」를 집필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칼빈이 파리를 떠나 순례자의 길을 가게 되는 1534년 프랑스는 종교적 갈등으로 인한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강력한 로마 가톨릭 신앙을 지켜 가며 독일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프로테스탄트 신앙운동을 철저히 차단하려고 힘썼으나 교회개혁의 기운은 불란서 파리에서도 점차 수면 위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루터의 개혁운동에 관한 정보는 구라파 각국으로 국경의 경계망을 넘어 흘러 들어갔고 루터의 작품들도 암암리에 회람되고 있었다. 정신, 이념 혹은 사상적 통제는 인쇄술의 발명과 더불어 점차 그 위력을 상실해 가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1534년 10월 18일에는 소위 ‘플래카드 사건’(The affair of the placards)이라 불리는 프로테스탄트들의 공개적인 저항이 일어났다. 이날 일군의 프로테스탄트들은 “교황제 하에서 실시되는 미사의 오용에 관한 조항…”으로 시작되는 벽보들을 파리와 프랑스의 주요도시에 붙이고 신앙적 자유를 주장하고, 프랑스의 가톨릭 옹호정책을 비난하는 거사를 감행한 것이다. 이때 벽보는 암보아즈(Amboise)에 있는 왕궁 안, 왕의 침실문 앞에까지 붙이는 기습적인 일이었다. 프랑스 왕 프란소와 1세는 이를 중시하여 프로테스탄트들에 대한 탄압을 구체화하였다. 특히 그는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탄압을 정책적으로 이용하였다.
   그는 주교의 저택에서 벌어진 향연에서 가톨릭을 반대하는 해독을 철저히 제거하겠노라고 장담하기도 했다. 사실 그는 그의 약속을 지키기라도 하듯이 수백 명의 프로테스탄트들을 수색, 체포하였고 그중 35명을 화형에 처하기까지 하였다. 칼빈의 친구 안티엔느(Etienne de la Forge)와 칼빈의 친형제 중 하나는 이때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프란소와 1세는 교황 바울 3세(Paul III)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기 영토내의 모든 이단을 섬멸하겠노라는 칙령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프랑스의 정치적 변혁기에 칼빈은 파리를 떠나 순례자의 길을 갔고, 뒤 텔레와 함께 스트라스부르크를 거쳐 바젤로 도피하였다. 이때가 1535년 1월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프로테스탄트의 최고의 저작이자 16세기 이래로 기독교회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고전으로 불리는 「기독교강요」를 집필, 출판하였다.
  
칼빈의 회심
칼빈 연구가들에 의해 여전히 논란이 일고 있는 문제는 칼빈의 회심에 관한 문제이다. 언제 칼빈이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였으며, 또 정확하게 언제 이러한 결단을 내렸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결론 내릴 수 없는 이견이 상존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1529년에서 1533년 사이에 회심하지 않았나 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칼빈은 루터에 비해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이야기들을 기록으로 남기는데 관심이 적었다. 혹자는 칼빈이 자신의 회심과 그 상황에 대해 자세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던 일은 자신의 삶에 대해 과묵하였던 그의 전형적인 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칼빈이 1557년에 출판했던 「시편주석」(Commentary on the Psalms)의 서문은 그의 회심에 관해 추적해 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 내가 아직 어렸을 때 나의 부친은 내가 신학을 연구하도록 예정하셨다. 그러나 후에 나의 부친은 법조계로 진출하는 것이 잘 살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하고 나를 법과대학에 보내기로 마음을 변경하였다. 그래서 나는 문과 공부에서 법과 공부로 바꾸었다. 이는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하나님의 감추어진 섭리에 의하여 나는 다시 나의 방향을 변경시켰다. 나는 교황주의의 미신에 너무나 중독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깊은 늪에서 헤어나기 힘들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갑작스러운 회심(subita conversio)을 통하여 나의 마음을 녹여 말씀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였다···.

칼빈은 1534년 초 그의 아버지가 마련해 두었던 성직록을 거부함으로써 그는 마침내 로마 가톨릭의 지원을 사양하고 로마교의 사슬에서 홀연히 떠났다. 이렇게 볼 때 칼빈의 개종과 회심은 갑작스러운 사건이었고 이 일은 그가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을 출판한 이후인 1532년 이후 1533년 말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여러 가지 정황을 종합해 볼 때 칼빈은 일부 인문주의자들의 영향, 자신의 깊은 성경연구, 그리고 초기 기독교 역사에 대한 탐구를 통해 복음주의 신앙으로 회심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칼빈의 회심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적 경륜이었다는 점이다. 칼빈의 후계자이자 처음으로 칼빈의 전기를 썼던 데오도 베자(Theodore Beza)에 의하면 칼빈은 그의 회심에 있어서 특히, 불란서 인문주의자이자 그의 친척이었던 올리베탄(Pierre Robert Olivetan)의 영향이 컸다고 지적하였다.

칼빈의 저술과 개혁사상
칼빈이 1535년 1월 바젤에 도착한 이래로 그는 학문 연구에 진력하였다. 그는 학문 연구와 저술의 소명을 받았다고 믿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했다. 그는 바젤에 도착하기 전인 1534년에 이미 그의 첫 신학적 저술이라고 할 수 있는 「싸이코파니치아」(Psychopannychia)를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이 출판된 것은 그 이후의 일이지만 이 책에서 칼빈은 사람이 죽은 후 부활 때까지 영혼의 상태에 대해 설명하였다. 즉 칼빈은 이 작품을 통해 사람이 죽은 후에 그 영혼은 잠을 잔다는 소위 ‘영혼수면설’(Doctrine of the sleep of the Soul)에 대해 비판하였다. 영혼은 의식 없는 수면의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일 수 있으며, 느끼며, 활동하고 인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책은 프랑스 등지에서 재세례파들에 의해 유포되고 있던 영혼 수면설을 비판한 것이므로 칼빈의 첫 신학 작품이자 재세례파에 대한 첫 비판서가 되었다.
   바젤에 도착하여 어느 정도 안전을 누리게 된 칼빈은 이제 혼란의 시대 속에서 교회의 바른 신앙을 명백하게 제시하기 위하여 또 다른 논문들을 저술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일 년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의 엄청난 노력의 대가로 또 한 권의 책을 저술했는데 그것이 「기독교 강요」(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이다. 이 책은 프로테스탄트의 관점에서 기독교 신앙체계에 대략을 저술한 것인데,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 저술들이 당면한 논쟁점에 대해서만 논급하고 있었으므로 기독교의 기본교리와 신학에 대해서는 적절한 필요를 채워주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이런 공백을 채워주기 위해 프로테스탄트의 신학적 개요라고 볼 수 있는 「기독교강요」를 집필하게 된 것이다. 칼빈은 이 책을 1535년 8월에 완성했으나 출판된 것은 이듬해 곧 1536년 3월이었다. 516쪽으로 구성된 이 책은 전 6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첫 4장에서는 율법, 신경(信經), 주기도문, 성례를 취급하였고 마지막 두 장에서는 다소 논쟁적인 주제였던 로마 가톨릭의 오도된 성례관을 비판하고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문제를 프로테스탄트 입장에서 요약하였다. 첫4장의 내용이나 형식을 볼 때, 이것은 루터가 1529년에 썼던 「소신앙 학습서」(Kleine Katechismen)를 모방한 것으로 추측된다.
   칼빈이 이 책을 쓴 것은 보다 현실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이 책이 프랑스 왕 프란소와 1세에게 헌정된 사실에서 암시되고 있지만, 이 책은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간명하게 가르치려는 교육적 의도와 더불어 프랑스의 박해받는 복음주의자들의 입장을 옹호, 변증하려는 목적으로 썼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책을 통해 프로테스탄트의 교리적 입장을 변호(apologia pro fide sua)하고 복음주의자들은 급진적인 그룹들과는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므로 1534년 10월의 플래카드사건 이후 박해받던 프랑스 복음주의자들을 변호하려는 변증적 동기에서 이 책을 저술한 것이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라틴어로 저술되었던 이 책 초판은 9개월 만에 매진되었고 그 수요는 확대되어 갔다. 칼빈은 이 책을 1539년 증보하여 제2판을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출판하였고, 이때부터 계속하여 개정과 증보를 거쳐 1559년에는 결정판을 냈는데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알려진 「기독교강요」이다. 1559년의 결정판 (프랑스어 역본은 1560년에 나옴)은 1536년의 초판과는 내용이나 구성에 있어서 엄청나게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초판은 오직 6장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결정판은 4권 80장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저술로 변해 있었다.
   칼빈은 평생 동안 저술 활동을 계속하였고 또 많은 양의 작품을 썼다. 그는 거의 30년간 저술을 계속하였는데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루터 등을 제외하고는 칼빈만큼 방대한 저술을 남긴 이들이 많지 않다. 그러면서도 칼빈은 사상적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집필활동을 했다는 점은 특이한 일이다. 루이스 스피츠는 “칼빈은 30년 이상의 기간 동안 글을 쓰고, 책을 저술했지만 그가 남긴 작품들은 놀랄만한 동질성(homogeneity)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를 출간한 후 1536년 4월 이탈리아로 갔다. 그곳 펠라라(Ferrara)에서는 공작 부인인 르네 드 프랑스(Renée de France)를 중심으로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이들의 작은 모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칼빈은 이곳에서 잠시 머문 뒤 다시 바젤로 돌아왔다. 이제 그는 자신의 종교적 확신 때문에 조국 프랑스에서 살 수 없게 되었으므로 망명의 길을 택하기로 하고 자신의 주변을 정리할 목적으로 프랑스를 방문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래서 칼빈은 1536년 6월, 안전을 위해 가명을 사용하여 파리로 갔다. 파리에 도착한 칼빈은 그의 형제 앙뜨완느와 이복 여동생 마리(Marie)를 안전한 스트라스부르크로 보내고 자신 또한 재산을 처분하여 조국을 떠나 스트라스부르크로 향하는 여행을 시작하였다. 스트라스부르크는 후일 재세례파들에 의해 ‘의의 피난처’로 불리던 곳으로서 타 도시에 비해 종교적 관용정책을 쓰던 도시일 뿐만 아니라, 프로테스탄트들이 득세하고 있었으므로 칼빈이 활동하기에 편리하고도 안전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정치적 상황 곧 합스부르그가(家)와 발로이스간의 전쟁(Hapsburg-valois wars, 1536-38)때문에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로 직행할 수 없었다. 이것은 칼빈의 생애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적 환경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당시 프랑스와 스트라스부르크와는 대결하고 있었고 군사적 위험이 계속되고 있었다. 또 스트라스부르크로 향하는 길은 군사작전에 의해 봉쇄되어 있었다. 그래서 칼빈은 우선 제네바로 가서 그곳을 경유하여 최종 목적지인 스트라스부르크로 가는 길을 택했다.

칼빈은 1536년 7월 제네바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며칠을 머물다가 다시 스트라스부르크로 떠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칼빈 개인의 희망이었을 따름이다. 하나님은 이곳 제네바에서 보다 거룩하고 소중한 사명을 위해 그를 제네바에 묶어 두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칼빈의 생애에 있어서 커다란 변화의 시작이었다. 이미 어거스틴이 말한 바이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존재를 측량할 수 없는 것이다(finitum non est capax infinit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