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칼빈과 제네바에서의 개혁운동

칼빈은 루터와 쯔빙글리와 더불어 종교개혁의 3대 인물로 불리지고 있다. 그러나 칼빈은 루터나 쯔빙글리에 비해 한 세대 후배로서 이전 시대의 개혁정신을 근간으로 하면서도 나름대로의 독특한 사상을 발전시킨 저명한 목회자이자 신학자였고 교회개혁가였다. 그는 비록 스위스의 프랑스어 사용지역이었던 제네바(Genera)를 중심으로 개혁운동을 전개하였으나 그의 영향력은 전 구라파에 미치는 광범위한 것이었고 제네바를 세계적인 개혁운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칼빈은 16세기 프로테스탄트신학을 집대성한 인물이었다. 루터를 교회개혁이라고 불리는 세계사적 사건을 이끌어간 개척자였다고 한다면 칼빈은 루터의 복음주의적 신학을 근간으로 하면서도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집대성하여 체계화하였고 사도적 교회상을 회복한 심오한 사상가였다.
   루터는 오랜 번민과 정신적 고통을 거쳐 복음주의적 구원교리, 곧 칭의의 교리를 발견하였기 때문에 이신득의(以信得義)의 교리는 항상 그의 신학을 압도하였다. 그러나 제 2세대 개혁자인 칼빈은 칭의론(稱義論) 중심의 신학에서 진일보하여 루터가 무시하였거나 정당하게 강조하지 못했던 다른 측면들에도 깊은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다. 만일 루터의 신학의 축을 칭의론이라고 한다면 칼빈의 신학은 특히 성화론(聖化論, the doctrine of sanctification)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든 칼빈은 그의 생애와 저작, 개혁활동을 통해 16세기는 물론 그 이후의 역사에 큰 자취를 남겼고 칼빈주의 신학과 교회에 이념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이런 점에서 영국의 정치가이자 저술가였던 죤 몰리(John Morley)경은 “서양사상사에서 칼빈을 제외하는 것은 마치 한 눈을 감고 역사책을 읽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칼빈이 프랑스인이며,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고 복음적 신앙을 가졌으며, 후일 위대한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가 되었다는 점에서 프랑스가 종교개혁에 기여한 가장 중요한 일은 칼빈과 같은 특출한 인물을 배출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1. 칼빈의 초기 생애와 교육
칼빈(John Calvin)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파리에서 동북쪽으로 60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한 피갈대(Picardy) 현의 노용(Noyon)에서 다섯 아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생가는 성당의 그림자를 받는 곳에 위치할 만큼 교회와 인접한 곳이었고 그의 가정환경은 교회적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제랄드 칼빈(Gerald Calvin, Gerhard Cauvin)은 노용에 위치한 노틀담(Notre-Dame) 성당의 참사회의 공증인이자 주교의 비서였고 후일에는 그 교구의 재무관이 되었다. 그의 어머니 쟌느 르 프랑(Jeanne le Franc)은 폴란드 출신 여성으로서 여관업자의 딸이었는데 이들은 1500년이 되기 이전에 결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칼빈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자료가 빈약하지만 아름답고 경건했던 분으로 알려져 있다. 칼빈의 어머니는 칼빈이 6세 때인 1515년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버지는 곧 재혼하였으므로 칼빈은 어린 시절 다른 형제들과 더불어 꼴레주 데 까페뜨(Collége des Capettes)라는 지방학교를 다녔고 1523년 8월에는 대학교육을 받는데 필요한 라틴어를 배우기 위해 파리로 갔고 그곳에 있는 마르슈학교(College de la Marche)에 입학하였다. 그의 나이 14세 때였다. 당시 이 학교에는 마튀렝 꼬르디에(Mathurin Cordier, 1479-1564)라는 저명한 인문주의자가 교수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그는 개신교로 개종하여 칼빈의 훌륭한 스승이 되었다. 칼빈의 저술에 나타나는 논리의 명료성, 분석의 정확성 등은 이때 받은 교육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로부터 27년 후 칼빈은 「데살로니전서 주석」(Commentary on the first epistle to the Thessalonians)을 집필했는데, 칼빈은 이 책을 꼬르디에에게 헌정하였고 그를 “경건과 학문에 뛰어난 인물”이라고 칭송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꼬르디에의 가르침으로부터 힘입은바 크다고 회고하였다.
   약 일 년간 꼬르디에로부터 라틴어와 인문주의 정신을 배운 칼빈은 보다 유명한 학교인 몽떼규 대학(Collége de Montaigu)으로 전학하였다. 칼빈이 이 대학으로 옮겨간 이유는 분명히 알 수 없으나 죤 멕닐(John McNeil)은 아마도 사제가 되기 위한 의도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칼빈은 이 대학에서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옥캄(William of Ockham), 비엘(Gabriel Biel) 등 후기 스콜라주의 신학과 철학을 배웠고 롬발드(Peter the Lombard)의 조직신학(Sententia)도 배운 것으로 보인다.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Erasmus)도 이 대학에서 수학하였는데, 칼빈은 1527년까지 이 대학에서 공부하여 문학 석사 과정을 끝냈다. 엄격하고 금욕주의적 경향이 짙었던 이 대학은 칼빈의 지성을 위한 적절한 훈련소였다.

1528년 칼빈은 법률학을 공부하기 위해 오르레앙 대학(University of Orléans)으로 옮겨갔다. 칼빈의 아버지는 모종의 불화로 성당 참사회 및 주교와 심히 다투었고 소송을 하게 되어  1528년 11월 2일에는 불공정하게 파문을 받았다. 이렇게 되자 칼빈의 아버지는 자기의 아들이 성직자가 되기보다는 명예와 재산을 얻기에 유리한 법률가가 되기를 원했다. 칼빈은 부친의 권유에 따라 1528년 3월 오르레앙 대학으로 옮겨가, 이 대학의 유명한 법률가였던 피에르 태상 드 레또알(Pierre Taisan de lÉtoile)밑에서 법률(civil law)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이 법과 대학에는 5명의 민법(民法) 교수와 3명의 교회법(敎會法) 교수가 있었는데, 민법연구도 중세적 기독교의 테두리를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칼빈은 이 대학에 일 년간 체류하면서 인문주의를 배웠다. 그는 성경을 프랑스어로 번역했던 인문주의자 올리베탄(Pierre Robert Olivétan, 1506-1538)의 도움으로 불란서의 르네상스 인문주의 서클에 소개되었다. 이곳에서 칼빈은 르네상스 정신과 접촉할 수 있었고, 특히 올리베탄으로부터 기독교의 참모습은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을 배웠다. 이곳에서 칼빈은 파리에서 온 니콜라스 콥(Nicholas Cop), 헬라어 선생인자 친구였던 멜키오르 볼마르(Melchior Wolmar)와도 깊이 교제하였다.
   1529년 가을에는 부르쥬대학(Collége de Bourges)으로 옮겨갔다. 이태리 출신의 교회법학자인 안드레아 알치아티(Andrea Alciati)에게서 교회법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는 당대의 최고의 법률학자로 명성을 얻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이 대학에서 칼빈은 그의 부친이 세상을 떠난 해인 1531년까지 있었다.
   1532년에는 다시 오르레앙 대학으로 돌아갔고 이듬해인 1533년에는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당시 칼빈에게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을 볼마르였다. 칼빈보다 3년 연상이자 호머(Homer)에 관한 책을 저술했던 볼마르는 칼빈에게 헬라어 원어로 신약을 읽도록 가르쳤고 성경 원전에 대한 지적 열정을 이끌어 주었다. 아마도 볼마르를 통해 칼빈은 루터의 신학을 접한 것으로 보인다. 후일 칼빈이 「고린도후서 주석」을 볼마르에게 헌정한 것을 보면 그에게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 칼빈은 이제 자신의 희망을 따라 인문학을 공부하기로 작정하고 부르쥬를 떠나 콜리지 포르테(Collége Fortet)로 옮겨갔는데, 이곳에서 칼빈은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하였다. 이상과 같은 칼빈의 지적 여정은 후일 그의 생애와 저술활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의 명석한 두뇌와 학문적 능력은 학자로서의 길을 인도하고 있었다.
   칼빈의 최초의 저술은 그의 나이 23세 때인 1532년 4월에 출판된 「세네카(Seneca)의 관용론 주석」(Commentaire de De Clementia)이었다. 당시는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영향 하에 있었기 때문에 헬라 혹은 라틴저술가들의 저작을 주해하는 일은 매우 빈번한 일이었고 학계에 공헌하는 일로 여겨졌다. 세네카는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에게 사랑받는 ‘선한 이교도’였으며 당시 추세로 보아 관용의 문제는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주제였다. 그러나 칼빈의 첫 저서는 자신의 기대와는 달리 식자층의 관심을 얻지 못했다. 혹자는 첫 저서에 대한 실망스런 경험이 그를 기독교 인문주의자들로부터 떠나 복음주의자의 반열로 돌아서게 하는 요인이 됐다고 생각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