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쯔빙글리와 스위스에서의 개혁운동

교회개혁을 말할 때 우리는 흔히 루터를 생각하지만, 교회개혁을 위한 일련의 활동은 루터 외에도 여러 개혁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실 교회개혁이라 불리는 세계사적 사건은 어느 한 사람에 의해서 주도될 수 있는 정도의 과업이 아니었다. 1517년 이래로 독일에서 시작된 개혁의 불길은 곧 유럽의 여러 지역으로 번져 갔고 스위스,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등지에서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라는 개혁운동의 공통된 기반 위에서 약간의 상이점을 지닌 다양한 개혁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어떤 학자는 ‘교회개혁’(The Reformation)이라고 단수로 표현할 것이 아니라 ‘교회개혁들’ 혹은 ‘제(諸)종교개혁’(The Resormations)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쯔빙글리는 바로 이러한 여러 개혁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루터와 칼빈과 더불어 교회개혁의 제3인의 인물로 불리는 울리히 쯔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는 스콜라철학의 비아 안티꾸아(Via Antiqua)철학과 인문주의적 교육을 받은 박식한 인문주의자였다. 쯔빙글리를 단순히 루터의 아류(亞流)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이미 루터의 개혁운동을 언급하는 중에 지적하였지만 쯔빙글리는 교회개혁의 기본이념을 함께 하면서도 자신의 고유한 사상을 발전시켰다. 엄밀한 의미에서 쯔빙글리는 개혁파교회의 첫 인물이라 할 수 있고 개혁주의 신학의 기초를 놓았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그가 1531년 세상을 떠난 이후 개혁파 교회와 개혁주의 신학은 칼빈의 지도력과 칼빈의 개혁 활동을 통해 보다 분명하고도 체계적으로 해설되었다고 하더라도 쯔빙글리는 개혁파 교회의 첫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스위스 취리히를 중심으로 한 쯔빙글리의 개혁운동은 1531년 그의 사후 불링거(Johann Heinrich Bullinger, 1504-1575)에 의해 계승되었고, 불링거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칼빈은 스위스에서의 개혁운동을 통합하여 개혁파 교회를 건설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루터파와 더불어 교회개혁의 결과로 생성된 가장 대표적인 양대 복음주의 교회가 된 것이다.
   교회개혁 당시 스위스는 명목상으로는 신성 로마제국의 일부로 속해 있었으나 유럽에서 가장 자유스러운 나라였다. 이미 1291년에 슈위츠(Schwyz), 우리(Uri) 그리고 운터발덴(Unterwalden) 등 세 개의 산림주(山林州)는 하나의 연합체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각각의 현은 이때부터 벌써 자치주로 발전하였다. 1513년 이래로는 13개 주의 자치현(autonomous cantons)으로 구성되었는데 각각의 현은 종교문제에 있어서도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즉 스위스에서의 개혁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방정부의 합법적 활동에 의해 추진된 것이다. 또 스위스의 도시들은 문화의 도시였고 인문주의 영향이 매우 컸다. 특히 바젤은 인문주의 운동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이곳에는 유명한 대학이 있었다. 에라스무스가 그의 헬라어 신약성경을 편집, 출판한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인문주의 스위스 종교개혁의 주된 요인이 되었다.
   스위스에는 크게 세 가지 형태의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첫째로 스위스의 북부 지역인 독일어를 사용하는 현 특히 취리히를 중심으로 한 곳에서는 쯔빙글리를 중심으로 한 개혁운동이 전개되었고, 둘째로는. 남부의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지역, 곧 제네바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는 칼빈의 지도하에 개혁운동이 전개되었다. 셋째는 소위 재세례파라고 하는 급진적인 개혁운동이 일어났는데 이 운동은 취리히를 중심으로 한 쯔빙글리의 동료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재세례파(Anabaptist)의 개혁운동은 스위스와 독일 그리고 화란 등지로 퍼져 나갔다.

1. 쯔빙글리의 생애
스위스에서의 칼빈의 개혁운동과 재세례파 개혁운동에 대해서는 후론하기로 하고 이제 쯔빙글리의 개혁운동에 대해 살펴보자.
   쯔빙글리는 루터가 태어난 지 두 달 후인 1484년 1월 1일 세인트 갈(St. Gall)현에 있는 토겐부르크(Toggenburg)라는 도시의 빌트하우스(Wildhaus)에서 한 농부의 3남의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농부이자 빌트하우스지역 행정서기(chief magistrate)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 여유가 있었고 힘이 미치는 한 최고의 학교에 보내고자 노력하였다. 쯔빙글리 또한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아버지는 그에게 큰 소망을 두고 있었다.
   쯔빙글리는 8세에 그의 삼촌 바돌로뮤(Bartholomeu)가 교장으로 있던 베젠(Wesen) 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0세 때인 1494년에는 바젤(Basel)로 갔다. 그는 바젤의 성 데오도르(St. Theodore)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이곳에서 그의 먼 친척으로 알려진 그레고리 뷘즐리(Gregory Bünzli)의 지도하에서 3년간 라틴어, 변증법 그리고 음악 등을 공부하였다. 당시 교육은 중세 시대와 마찬가지로 3학(Trivium)이라 불리는 문법학(Ars Grammatica), 수사학(Ars Rhetorica), 변증학(Ars Dialectica)과 4학(Quadrivium)이라 불리는 산술문(Arithemetica), 기하(Geometrica), 천문(Astromonia) 그리고 음악(Harmonica)이 주된 교육의 내용이었다. 상실적인 이야기이지만 서양전통에서 볼 때 3학 4과는 지식에 이르는 세 가지 방법 혹은 네 가지 방법을 의미하며 이들을 합친 7교양과목은 로마시대 카펠라(Martianus Capella)에 의해 처음으로선정된 것이다. 물론 이들 과목의 구체적인 내용은 약간 변천을 거쳐 왔지만 중세 말기 이후, 곧 쯔빙글리가 교육 받던 시기에는 7교양과목도 그 자체로서는 큰 의미가 없었고 주로 성경연구의 보조과목으로 강조되엇다.
   쯔빙글리는 바젤에서 다시 베른(Berne)으로 옮겨가 2년간(1496-1498) 수학하였는데 이곳에서 하인리히 뵐프린(Heinrich Wölflin)의 영향을 깊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뵐프린은 르네상스식의 인문주의 교육을 이상으로 여겼던 인물인데 그는 쯔빙글리에게 고전어와 음악을 가르쳤다. 이때 벌써 쯔빙글리는 고전어와 학문 분야에 상당한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1498년 가을에는 비에나(Vienna)로 가서 비엔나 대학에서 수학하였는데(1498-1502) 이곳에서도 특히 고전어와 음악에 대한 깊은 지식을 쌓았다. 1502년 다시 스위스로 돌아와 바젤대학으로 갔고 이곳에서 1504년에는 문학사(B.A)학위를, 1506년에는 문학석사(M.A)학위를 받았다. 바젤대학에는 유명한 인문주의자 토마스 비텐바하(Thomas Wyttenbach)가 있었는데 그에게서 쯔빙글리는 인문주의의 깊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특히 에라스무스(Erasmus, 1469~1536)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쯔빙글리의 생애에 있어서 커다란 변화였다. 에라스무스는 쯔빙글리의 지적 우상이었다. 석사학위를 받았던 해인 1506년 초부터 신학 수업을 하였고, 그 해말 곧 그의 나이 22세 때에 쯔빙글리는 콘스탄쯔(Konstanz)에서 신부로 임직되었고 글라루스(Glarus)교구의 사제로 취임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10년간(1506-1516) 봉사하였는데 이 기간은 후일 개혁자로서 삶에 든든한 기초를 제공하였다.
   이곳에서 당시 교회의 문제들을 체험하였고, 그의 해박한 고전어 능력으로 성경과 교부들의 작품을 읽고 연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고전어 연구에 전념하는 한편 에라스무스와의 교제를 통해 인문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띄게 되었다. 에라스무스의 가르침에 대한 연구는 그로 하여금 스콜라철학으로부터 떠나 성경 연구에로의 길로 인도해 갔으며 그의 인문주의적 경향성은 바울서신을 윤리적 측면에서 보도록 이끌어 갔다. 1516년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신약성경이 출판되자 이 책을 빌려서 바울서신을 직접 옮겨 적어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는 일화가 있을 만큼 바울서신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특히 쯔빙글리가 글라루스에서 사역하는 동안 용병제도(傭兵制度, Mercenary Service)의 문제점과 폐해를 깊이 체득하게 되었다. 당시 스위스인들은 용병으로 참가하여 많은 수입을 얻고 있었으나, 생명의 파괴, 적대적 싸움, 약탈, 성병의 만연, 제도의 오용 등 문제가 적지 않았다. 그는 스위스인들이 왜 로마나 프랑스를 위해 생명을 바쳐야 하는 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1513년에서 1515년 사이 두 차례 용병의 종군신부로 참가한 일이 있었으므로 이 제도의 문제점을 깊이 체득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1515년부터는 이 제도를 반대, 비판하는 설교를 시작하였다.

쯔빙글리는 1516년부터 1518년까지는 소위 순례자의 중심지, 곧 마리아 숭배의 중심지로 알려진 아인지델른(Einsiedeln)의 수도원에서 사제로 일하였다. 그래서 이곳에는 소위 ‘동정녀 마리아’의 조상(Black Image of the Virgin Mary)이 있었는데 이를 보려고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아 들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공로사상과 선행에 의한 구원교리 등 당시 교회의 문제점들을 보기 시작하였고 이들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쯔빙글리가 아이지델른에 머무는 기간 마침 독일에서는 루터에 의해 95개조의 항의문이 게시되었고 교회개혁의 기운이 일고 있었다. 쯔빙글리는 1518년 아인지델른에서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고 중단시키는데 성공하였고 루터와 거의 동시적으로 교회 개혁의 행보를 시작하고 있었다.

1518년 10월말경 쯔빙글리에게는 더욱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취리히시 강단을 맡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러나 쯔빙글리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므로 경박한 사람일 수 있다는 점과 여성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점 때문에 문제가 야기되었다. 쯔빙글리는 사실 하프, 바이올린, 플루트, 코넷, 류트 등을 연주할 수 있었고 또 작곡도 할 수 있는 음악 애호가였다. 그는 다윗 같은 인물도 음악을 사랑했던 자로서 음악에 대한 관심과 능력이 목회자 자질의 평가 기준이 될 수 없음을 변명하고 자신의 여자관계에 있어서 한 번의 실수에 대해서는 솔직히 인정하였다.
   쯔빙글리의 편지를 접한 취리히교회 참사원들은 1518년 12월 11일 이 문제를 놓고 회의를 열었고 진지한 토의 끝에 첩과 6명의 자녀를 두었던 한 후보대신 쯔빙글리를 청빙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래서 쯔빙글리는 그해 12월 27일 아인지델른을 떠나 취리히(Zürich)로 이사하였다. 이때부터 취리히는 쯔빙글리의 삶과 목회, 그리고 개혁운동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