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스트라스부르크에서의 칼빈 (1538~1541)


칼빈이 스트라스부르크에 도착했을 때는 1538년 9월이었다. 이때로부터 1541년 8월까지 만 3년간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에서 활동하였다. 이 기간 동안의 칼빈의 삶과 목회, 연구와 저술은 그 자신의 생애에 실로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이 기간 동안의 목회와 연구는 성경에 대한 해박한 이해와 신학적 깊이를 더해주었고 신앙적 성숙과 더불어 보다 원숙한 지도자로 이끌어 갔다. 특히 스트라스부르크에서 부쩌 등 개혁자들과 접촉함으로써 그는 많은 것을 배웠는데, 특히 예배와 교회론의 영역에서 그러했다.


   물론 이 3년간의 생활이 칼빈 생애에 어떤 의미를 주었는가에 대해서는 부정적 주장(단절설)과 긍정적 주장(연속설)이 엇갈리고 있지만 대체로 랑(August Lang)교수의 주장에 동의하고 있다. 저명한 칼빈 학자인 랑 교수는 “칼빈은 이 도시에서 무한히 많은(unendlich viel)것을 배웠다. 그는 이곳에 머무는 3년간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한층 성숙했다”고 했다1).   스트라스부르크에서의 칼빈의 생활과 활동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이 도시의 종교적 상황에 대해 먼저 언급하는 것이 유익할 것 같다.


   스트라스부르크는 독일과 불란서 사이의 라인강 계곡에 위치한 도시로서 수로로는 스위스와 저지대 국가들과 인접해 있다. 이런 지리적 위치 때문에 1254년 이래로 제국직할의 자유도시로 있었고 문화와 종교, 그리고 상업의 중심지였다.


   이곳에 종교개혁사상이 소개된 때는 1523년부터인데,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시작된 지 6년 후였다. 이곳에서는 네 사람의 개혁자들, 곧 마띠아스 젤(Matthias Zell), 울프강 카피토(Wolfgang Capito), 카스파 헤디오(Caspar Hedio), 그리고 마르틴 부쩌(Martin Bucer)가 상호협조아래 개혁운동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특히 정치인 야콥 슈트롱(Jacob Strum, 1489-1553)이 이들의 개혁활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야콥 슈트룸은 그 나라(Alsace)의 ‘국부’(國父)라고 할 만큼 유능한 정치인으로 이들 개혁자들은 루터파 인사들과 더불어 종교문제에 있어서 매우 관용적이었으므로 유럽의 여러 나라로부터 종교적 망명객들이 이곳에 찾아왔다. 그래서 가톨릭적 활동과 미사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고, 미사가 폐지된 것은 1529년 초였다.  재세례파들도 이곳에 와서 활동하고 있었다. 또 가톨릭의 탄압을 견디지 못한 많은 개혁신앙집단도 이곳으로 이주해 왔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스트라스부르크는 ‘의의 피난처’로 불리기도 했고 다수의 프랑스 피난민들이 이주해 왔기 때문에 ‘프랑스 피난민들의 안식처’라고 불리기도 했다. 또 혹자는 이곳을 ‘새 예루살렘’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만큼 이곳은 종교적 이유로 박해받는 이들에게 희망의 도시였다. 이곳에서 개혁운동이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여러 제반조건, 곧 종교적 환경이 개혁운동에 적절한 곳이었기 때문에 ‘종교개혁의 안디옥’ 혹은 ‘서남 독일의 비텐베르크‘라고 불리기도 하였다.2)


   바로 이 도시에서 개혁운동에 진력하던 마틴 부쩌와 카피토는 제네바를 떠난 칼빈을 초청하였고 프랑스에서 온 피난민들을 위해 목회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칼빈이 두 차례의 초청을 거절했을 때 부쩌는 이전에 파렐이 칼빈에게 했던 방식대로 ‘하나님의 진노’란 이름으로 칼빈을 위협하였고 “하나님은 요나처럼 반항하는 종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아신다”고 했을 때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로 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1538년 9월초 칼빈이 바젤을 떠나 라인강을 떠나 스트라스부르크로 향하고 있을 때, 칼빈 그 자신도 예견하지 못했던 신령한 복과 더불어 거룩한 책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칼빈의 3년간의 활동을 몇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피난민들을 위한 목회사역


프랑스 피난민들을 위한 목회사역은 칼빈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칼빈이 스트라스부르크에 왔을 때가 1538년 9월초였는데 첫 설교를 한 날은 9월 8일이었다. 이때부터 칼빈은 목회자로서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종교적 자유를 찾아온 프랑스인들의 공동체를 칼빈은 ‘작은 프랑스 교회’라고 불렀는데 교인수는 400명에서 500여명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이 성 니콜라스(St. Nicholas) 교회당에서 회집하였기 때문에 ‘성 니콜라스 교회’라고 불리기도 했다. 칼빈은 정기적인 설교, 성경 강해 외에도 예배의식의 확립, 교회음악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칼빈은 부쩌의 예배의식을 모방하여 프랑스 피난민교회 예배의식을 확립하였는데, 이것은 후일 개혁교회 예배의 모형이 되었다. 교회음악에 있어서 칼빈의 강조점은 시편송이었다. 그는 영창이나 오르간 음악보다는 시편송을 선호하였고 시편송이 예배음악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1539년에는 ‘시편찬송’(Psalmody)을 불어로 편찬, 출판하였다. 생각해보면 다윗의 시편보다 더 적절한 찬송은 없다. 칼빈은 시편송은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 영광을 높이시기 위해서 우리 안에서 노래하는 것처럼 말씀을 우리 입술에 주신다고 본 것이다. 칼빈은 음악이나 음악적 기교보다는 가사와 가사의 내용을 특히 강조하였다. 그가 시편송을 강조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복음적 내용 없는 음악적 기교는 무의미한 것으로 보았다. 곡조는 가사를 위한 것이지, 그 반대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칼빈은 월 1회 성찬식을 거행하였다. 칼빈은 성찬식을 미리 예고할 뿐만 아니라 성찬식에 참예할 이들도 미리 신청하도록 하였다. 그 이유는 성찬 참예자들에게 신앙을 독려하고 범죄한 이들에게 회개케 함으로써 합당한 성례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칼빈은 성찬식을 통한 삶의 변화, 곧 성화적 삶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저술활동


칼빈의 중요한 사역은 저술활동이었다. 그의 저술활동은 그의 계속된 연구의 결과였는데 저술활동은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정립하고 이를 공표, 확산해 가는 중요한 작업이었다. 이곳에서의 저술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1536년에 출판했던 「기독교 강요」를 증보하여 제 2핀을 출판한 일이다. 「기독교 강요」 제 2판은 1539년(라틴어판) 출판되었고 불어역본은 1541년 출판되었다. 이 책은 1536년도의 초판에 비해 3배정도의 지면으로 증보되었는데 전 17장중에서 6장은 전혀 새로운 장이고 다른 6개장은 수정, 증보된 장이다. 나머지 5개의 장은 1536년도 판의 2개장을 확장시킨 것이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볼 때 「기독교 강요」 제 2판은 초판(1536)의 내용을 토대로 하여 증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성경연구와 성경강해, 신학과 교회사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큰 도움을 주었지만 특히 부쩌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미국 칼빈신학교 교수였던 루이스 벌꼬프(L. Berhof)교수는 칼빈의 「로마서주석」 영역본 서문에서 “만일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쓰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연구하지 않았다면 「기독교 강요」 개정판은 쓸 수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루터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 제 2판을 읽고 크게 기뻐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 칼빈은 성경주석 집필을 시작하였는데, 그가 최초로 쓴 성경주석은 「로마서주석」이었다. 이 책은 1539년 출판되었는데, 이 저술은 칼빈이 제네바에서 시작하였고 스트라스부르크에서 계속했던 바울서신 강의의 산물이었다. 칼빈은 단순히 후대 사람을 위해 주석집필을 시작했다기보다는 자신의 성경연구와 스트라스부르크에서의 성경강해의 결과로 주석이 이루어져 갔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주석집필은 일차적으로 목회적 필요에서 저술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석은 학문적 깊이가 있는 주석으로 많은 칭송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그의 주석은 루터의 그것에 비해 역사적이고 철학적 깊이가 있으며, 멜랑히톤의 그것과는 달리 난해 구절 해설에 치중하지 않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칼빈의 「로마서주석」은 루터에게 있어서처럼 복음적 신앙의 기초이자 칼빈 신학의 구원론적 요체를 해명해 주는 책이 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로마서의 주제(argumentum)들을 교리적으로 분석하고, 그 신학적 의미를 해명하였다. 칼빈은 제롬의 라틴어 성경(the Vulgate)에 의존하지 않고 에라스무스가 편집한 「희랍어 신약성경」(1527) 등 원어성경을 근거로 주석한 것은 당시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칼빈의 주석집필은 그의 생애동안 계속되었는데, 요한 계시록을 제외한 거의 모든 성경의 주석서를 집필하였다. 신약성경주석은 대부분이 1550년대까지 출판되었고 구약주석은 1551년에 출판된 이사야서가 첫 주석이었다. 칼빈은 약 20년에 걸친 긴 기간 동안 방대한 주석서를 집필하였는데, 그가 쓴 마지막 주석은 여호수아 주석이었다.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저술한 칼빈의 또 한 가지 중요한 저서는 「사돌레토에 대한 답변」(Reply to Satoleto)인데, 이 책은 칼빈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특히 칼빈이 남긴 논쟁적 저술 중에서 이 책은 교회개혁의 의의와 목적, 필요성을 설득력 있는 필치로 서술하였다.


   자코프 사돌레토(Jacopo Sadoleto of Modena, 1477-1547)는 도피네에 있는 카펜트라스(Carpentras in the Dauphine) 주교이며 1536년 이래로 추기경이 된 인물인데 칼빈과 파렐이 제네바를 떠난 틈을 타서 제네바 시민들에게 로마가톨릭으로 복귀하라는 강력한 권고의 서신을 보냈던 것이다. 라틴어로 쓴 이 편지에서 사돌레토는 개혁자들의 활동을 비판하고 로마 가톨릭에로의 복귀를 요구하였다. 이 편지는 스트라스부르크에 있는 칼빈에게 전달되었고 격분한 칼빈은 사돌레토 추기경의 편지에 답변하는 형식의 글을 썼는데 이것이 「사돌레토에 대한 답변」이다. 1539년 9월 1일자로 된 이 편지 형식의 글은 6일만에 쓰여진 글로서 사돌레토의 주장과 요구를 명쾌하게 반박하였다.


   이상의 책들 외에도 칼빈은 1540년 기도서(Form of prayers), 「우리 주님의 성만찬에 관한 소논문」(Little treatise on the Holy Supper of Our Lord)을 각각 집필하였다. 후자의 책 성만찬에 대한 견해차가 개혁을 지지하는 이들을 분리하고 있는 현실을 염려하면서 쓴 작품인데 이 책은 60개항으로 이루어진 간단하고도 명료한 저술이다. 성찬교리에 대한 평신도들의 지침서로 적절한 것이었다. 칼빈은 이 책에서 로마 가톨릭의 상찬관을 비판하였고 루터와 쯔빙글리간의 견해차에 대해 상호이해와 동의를 모색하였다. 특히 이 글에서 성찬의 빈번한 시행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경외심 없는 성찬참여가 죄악임을 강조하였다. 이 책은 1545년 라틴어로 출판되었는데 루터는 이 책을 읽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멜랑히톤의 사위였던 크리스토프 페첼(Christoph Pezel)의 기록에 의하면 루터는 이 책을 읽고 크게 칭찬하면서 ‘나의 논적이 이전에 이와 같은 훌륭한 저서를 발간했더라면 우리는 그들과 일찍부터 화해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특히 주목할 한 가지는 이 성만찬에 관한 칼빈의 글 속에는 성례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를 주장한 마르틴 부쩌의 영향이 역력히 나타나 있다는 점이다.


다른 개혁자들과의 교제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의 개혁자들, 특히 마르틴 부쩌와의 교제를 통해 예배와 교회론에 대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에 체류하는 동안 부쩌, 카피토 등과 긴밀히 교제함으로써 많은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스트라스부르크를 대표하여 프랑크푸르트(Frankfurt, 1539), 하게나우(Hagenau, 1540), 보름스(Worms, 1540-1541), 레겐스부르크(Regensburg , 1541) 등지의 종교토론회에 참여함으로써 여러 개혁자들과 교제하며 종교개혁가로 성장하였다. 교회연합을 모색하던 이와 같은 회의에 참석한 것은 칼빈이 부쩌와 마찬가지로 교회연합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던 점을 알 수 있다.3)


   프랑크푸르트회의는 독일황제 찰스 5세(Charles V)가 기독교 연합을 위한 목적으로 소집한 회의였는데 칼빈이 이 회의에 참가했을 때는 1539년 2월 21일이었다. 이 회의에서 칼빈은 비로소 멜랑히톤(Philip Melanchton)을 만났다. 사실 칼빈은 르페브르(Lufevre), 파렐(Farel), 올리베탄(Olivetan)등을 통해 프랑스 종교개혁에 대해서는 친숙히 알고 있었지만 독일 종교개혁에 대해서는 깊이 알지 못했다. 그러나 스트라스부르크로 이주해 온 이후 부체를 통해서 독일에서의 개혁운동을 접하게 되었고 멜랑히톤을 통해 특히 많은 유익을 얻게 되었다. 칼빈은 멜랑히톤의 교제를 통해 루터의 개혁운동의 진수를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회의에서 처음 만난 칼빈과 멜랑히톤의 교제는 서로에게 유익을 끼쳤고 개혁의 정신을 고양해 가는데 상호 격려를 받았던 것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교제를 통해 칼빈의 박학함과 신학적 깊이를 확인한 멜랑히톤은 칼빈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신학자라는 점에서 ‘그 신학자’(the theologian)라고 불렀던 일은 잘 알려진 일이다. 후일 칼빈은 멜랑히톤의 「신학요의」(Loci Communes)를 불어로 번역하였고, 멜랑히톤은 칼빈이 세르베투스(Servetus)사건으로 비난받았을 때 칼빈의 입장을 지지했던 점은 두 사람의 친밀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칼빈은 프랑크푸르트회의 이후 1540년에 하게나우, 보름스, 그리고 1541년에는 레겐스부르크회의에 참가하였는데, 이런 회의를 통해 다른 개혁자들과 교제를 하면서 자신과 다른 프로테스탄트 동료들과의 신학적 일치와 차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칼빈은 루터와 만난 일이 있는가? 루터와 칼빈 양자는 서로를 만나기를 희망하였다. 양자는 서로의 작품을 읽으며 문서와 서신을 통한 교제는 있었으나 직접 만난 일은 없었던 것으로 밝혀져 있다. 칼빈은 그가 참석하는 종교회의에서 루터를 만나기로 약속했었으나 루터가 신병으로 불참하였으므로 두 사람간의 역사적인 대면은 무산되었다. 현재 칼빈이 루터에게 보낸 한 통의 서신이 남아있는데, 1541년 1월 21일자로 된 이 편지에서 칼빈은 “그리스도교회의 위대한 목사 마르틴 루터 박사에게, 나의 가장 존경하는 사부(師父)에게”(To the very excellent pastor of the Christian church, Dr. M. Luther, my much respected father)라는 글로 시작하였다. 칼빈은 자신의 저작들 몇 편을 루터에게 보내면서 동봉한 이 편지에서 칼빈은 루터의 지문과 충고를 요청하고 있는데 이 편지 마지막 부분에서는 루터를 “가장 저명한 분이자 그리스도의 가장 탁월한 사역자이며 나의 가장 존경하는 사부”(most renowned sir, most distinguished minster of christ, and my ever honoured father)라고 호칭하고 있다.


   루터와 칼빈, 양자는 비록 직접 대면하지는 못했으나 서로를 존중하며 함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였다.


칼빈의 결혼생활


칼빈은 이곳 스트라스부르크에서 그의 나이 31세 때인 1540년 8월에 파렐의 주례로 결혼하였다. 그의 아내는 라에쥬(Liege)의 쟝 스또르데(Jean Stordeur)의 미망인이었던 이들레뜨 드 뷔레(Idelette de Bure)였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재세례파였으나 칼빈의 인도로 개혁교회로 돌아왔고 남편이 전염병(흑사병)으로 죽고 혼자 두 남매를 키우고 있던 과부였다. 칼빈이 결혼을 생각한 때가 언제부터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문헌상으로는 1539년 5월에 칼빈이 결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증거가 남아 있다. 그는 파렐에게 쓴 글에서 자기가 원하는 부인상은 정숙하고 자상하며 까다롭지 않고 검소하고 인내성 있는 성격의 소유자로서 자기 건강을 보살펴 줄 수 있는 여인이라고 하였다. 칼빈의 신체적 연약성, 특히 그의 병약한 체질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혹자는 그를 “이동하는 종합병원”이라고 했을 만큼 병이 많았고 몸도 약했다.


   칼빈의 결혼생활은 건강 외에는 행복하였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부인마저도 건강이 좋지 못했고 결혼한 지 겨우 9년 뒤인 1549년 4월초 칼빈의 아내는 세상을 떠났다. 1549년 4월 7일과 10일, 칼빈은 비레와 파렐에게 각각 편지를 보내고 자기 아내가 최근 세상을 떠났다고 했는데 이 편지에서 아내와의 사별에 대한 인간적인 아픔과 슬픔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칼빈에게는 1542년 아들이 태어났으나 그도 불과 얼마 후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 쓴 편지가 남아있는데 아들의 죽음은 ‘심한 상처’였으나 “우리 아버지는 자기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신다.”고 함으로써 믿음 안에서 위로를 구하였다. 칼빈의 결혼생활은 오직 9년뿐이었다. 아내 뷔레와 사별한 후 다시 결혼하지 않고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칼빈을 비난하기 위해서 쓰여진 기록에 보면 칼빈의 아내는 답답함과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죽었다고 했지만 이것은 지나친 모함임에 틀림없다.


   스트라스부르크에서 보낸 3년간은 칼빈에게 있어서 실로 유익한 날들이었다. 이 기간 동안의 그의 목회와 연구, 저술과 다른 개혁자들과의 교제는 칼빈을 더욱 원숙한 신학자로 이끌어 갔다. 특히 이 기간 동안 칼빈은 부쩌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개혁교회적 성례, 예배의식, 교회정치, 치리와 훈련, 그리고 장로제도 등은 그에게 받은 신학적 영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