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제네바에서의 개혁운동(1536~1538)




제네바에서의 칼빈의 활동은 교회에서의 바울서신, 특히 로마서 강해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성직자로 안수 받지 않은 상태였으며1), 그때로부터 1여년 가까이 정규적인 설교자는 아니었다. 단지 그는 파렐을 보좌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제네바 도착 이듬해인 1537년 2월까지는 시의회로부터 어떤 보수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점차 칼빈의 활동과 역할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곧 그의 뛰어난 신학적 통찰력, 법률가로서의 훈련, 그리고 교회개혁을 위한 불타는 정열은 칼빈을 제네바시 개혁운동의 중심부로 인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준비된 자를 쓰시되 준비된 만큼 쓰시는 분이다.


칼빈은 제네바 개혁의 이념과 정신, 그 조직과 활동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 주었고 점차 중요한 위치를 정하여 갔다.


   칼빈의 탁월성은 1536년 10월 로잔(Lausanne)에서 있었던 로마 가톨릭과의 신학토론에서 입증되었다. 즉 이 해 10월 1일부터 8일까지 계속된 신학토론은 베른(Bern)시의 종교적 향배를 결정짓기 위한 목적이었다. 가톨릭 측에서는 약 200명의 사제들과 수사들이 참석하였으나 그렇게 유능한 토론자는 없었다. 개신교 측에서는 파렐과 삐에르 비레, 그리고 칼빈이 대표적 인물이었다. 비록 칼빈은 이 토론회에 참석하기 위해 로잔으로 갔으나 수일동안 토론에 가담하지는 않았다.


   이때 토론의 주된 내용은 성찬론에 관한 것이었는데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에 대해 칼빈은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를 확연하게 주장하였다. 특히  칼빈은 초대교부들의 주장과 저술들을 해박하게 인용하면서 가톨릭의 주장을 가볍게 물리쳤다. 결국 프로테스탄트측이 토론회에서 승리하였고 베른의 모범을 따라 로잔에 개신교회가 설립되게 하였던 것이다.


   칼빈과 파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도 시급한 과제는 종교개혁이 단행된 이 도시에 명실상부한 개혁교회를 설립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교회규정을 제정하여 개혁이념에 따라 엄격한 치리를 시행하고 신앙과 생활의 질서를 확립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1537년 1월 16일 ‘제네바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관한 조례’(Articuli de regimine ecclesiae, Articles on the Organization of the Church and its Worship at Geneva)라는 문서를 작성하여 제네바 시의회에 제출하였다. 이 문서는 당시 개혁자들의 개혁의 이념과 개혁교회 조직에 관한 기본이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서였다.


   주로 칼빈에 의해 작성되었고, 그의 「기독교 강요」에 바탕을 둔 이 문서의 중요한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는데, 첫째는 매주일 예배 때마다 성찬식을 시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가톨릭교회 관례로는 연 2-3회 성찬식이 거행되었으나 칼빈은 매주일 성찬식을 시행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 성찬식은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들을 연합해 줄 뿐만 아니라 바른 성찬의 시행을 통해 권징을 행하며 신자의 삶을 변화되게 함으로써 신앙과 순종을 함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시 하였다. 그러나 매주일 성찬을 시행해야 한다는 주장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었다.


   다른 한 가지는 엄격한 치리(discipline)의 시행이었다. 이것은 칼빈신학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한 성화의 삶을 위한 것이었다. 칼빈은 엄격한 치리를 강조하였는데, 이것은 성찬의 합당한 시행과 더불어 신앙적 삶을 지키기 위한 동기를 지니고 있었다. 이 문서의 일부를 인용해 본다.


    우리 주님의 성만찬을 종종 거행하고 거기 참예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경건과 특별한 경외심 없이는 아무도 감히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훈련시키지 않는다면, 교회의 질서와 규율이 바로 잡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출교의 권징(discipline of excommunication)이 - 이것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들을 살피기 싫어하는 자들이 교정을 받는 다 - 교회를 온전하게 유지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이 문서에서 개혁자들은 성찬이 자격 없는 자들에게 “짓밟히고 더럽혀지지"않게 하기 위해서 개선의 여지가 없는 이들에게 수찬정지 혹은 출교(excommunication)할 권한이 교회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 외에도 이 문서에서는 청소년들을 위한 신앙의 기본적 가르침에 대한 교육을 강조하였고, 예배 시에 시편송을 부를 것과 결혼법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이 문서에서 강조한 성찬식의 매주일 시행과 권징권의 문제는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래서 칼빈이나 파렐이 의도했던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관한 규례의 시행은 순조롭게 추진되지는 않았다. 결국 성찬식은 월 1회 시행하는 것으로 타협이 이루어졌으나 출교(파문)권의 문제는 시의회와 충돌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칼빈과 파렐은 앞에서 언급한 「제네바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관한 조례」외에도 1536년 11월 10일 「신앙고백서」(Confession de la foi, confession of the faith which all the citizens and inhabitants of Geneva and the subjects of the country must promise to keep and hold)를 작성, 제네바 시의회에 제출하였다. 이 문서는 21개 항의 짧은 항목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여 혹자는 ‘21개신조’라고 호칭하기도 하는데 특히 로마 가톨릭회와 재세례파의 위험을 예견하면서 개혁신앙이 그들과 다르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된 것이다.


   이 신앙고백서 제 1항은 “우리 신앙과 종교의 규칙을 위해 우리는 오직 성경만을 따르기로 작정한다”고 되어 있고, 하나님, 율법, 구원, 은혜, 기도, 성례, 교회, 출교, 목회, 정부 등에 대해 순차적으로 언급하였다.


앞에서 칼빈은 「제네바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관한 조례」에서 청소년교육을 강조하였다고 말했는데, 칼빈은 이 목적을 위해서 「제네바신앙문답서」(Genevan Catechism)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라틴어로 썼으나 프랑스어로 번역되었고 1537년 2월에는 앞서 언급한 ‘신앙고백서’와 함께 「제네바교회를 위한 신앙지침과 신앙고백서」(Instruction and confession of Faith, as used in the Genevan church)란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칼빈이 신앙고백서를 제출한 이듬해, 곧 1537년 4월 200인회가 제네바 온 시민에게 이 고백서를 따르도록 서명, 날인케 하였을 때 큰 불만이 야기되었다. 개혁자들은 제네바 시에 남아있는 로마가톨릭교인과, 가톨릭적 잔재를 제거하기 위해 신앙고백을 요구하였고 이를 거부하는 자는 제네바를 떠나도록 요구하였는데 이것은 제네바 시민의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그 이유는 일부의 가톨릭 교도들이 여전히 가톨릭 신앙을 고수하려고 하였고 또 많은 시민들은 복음 안에서의 자유라는 이름하에 교회적 치리(훈련)를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개혁자와 시의회는 권징권의 문제로 대립하였다. 칼빈은 권징의 문제는 교회의 고유권한이라고 주장했으나 시의회는 취리히의 모범을 따라 권징권은 시의회가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개혁자들과 시의회는 심각한 대립을 하게 되었다. 다수의 시의회원들은 교회의 치리권을 인정해 주는 것은 시의회의 권력의 일부를 빼앗기는 것으로 염려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1538년 1월 시의회는 목사들의 파문(출교)권을 박탈하였다.


   1538년 시 당국과 개혁자들 사이에 잠재해 있던 갈등은 첨예한 대립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칼빈과 그 동료 개혁자들은 신앙고백에 반대하고 서명하지 않는 자는 성찬에 참여할 수 없다고 주장했으나 시의회는 1538년 1월 4일 그들에게도 수찬을 허락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시의회의 이런 결정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였다. 즉 정치당국(시의회)이 종교문제에 주권적으로 간섭할 수 있다는 점을 전제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빈과 파렐은 항거하였다. 특히 1538년 2월의 선거에서는 칼빈의 정책을 반대하는 이들의 다수가 시의원에 선출되자 더욱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시의회는 1538년 4월 23일 칼빈과 파렐의 제네바 추방을 결의하고 사흘 안에 그 도시를 떠날 것을 요구하였다. 그래서 칼빈과 파렐은 바로 그날 제네바를 떠났다. 칼빈이 1536년 7월 제네바에 온 지 꼭 22개월만이었다.


제네바를 떠난 칼빈과 파렐은 베른(Bern)으로 갔고 6월초에는 다시 바젤(Basel)로 갔다. 바젤에서 얼마동안 체류한 후 파렐은 뉘사텔(Neuchatel)교회의 초청을 받고 그곳으로 갔고 1565년 죽을 때까지 값진 봉사를 하였다. 칼빈은 바젤에 체류하며 학문연구에 진력하기를 원했으나 스트라스부르크(Strassburg)의 부쩌(Bucer)로부터 두 차례의 초청을 받고 그곳으로 가기로 하였다. 결국 파렐과 칼빈은 잠시 동안 떨어져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칼빈은 바젤에 남아서 학문의 길에 정진하려고 하였으나 부쩌의 절박한 요청은 이번에도 칼빈의 생애에 또 하나의 변화를 재촉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