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면죄부 논쟁

1517월 10월 31일은 루터 개인에게는 물론이지만 서구 역사에서의 커다란 변혁의 시작이었다. 루터는 이 날 소위 ‘95개조’라고 불리는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비판하고 신학적 토론을 제안하는 문서를 그가 봉직하는 비텐베르크 대학 게시판에 부착한 것이다.
   당시 교황 레오 10세(Leo.X)는 로마의 성 베드로성당 증축을 위해 전임 교황이었던 율리우스 2세(Julius II, 1503~1513)때 공포된 면죄부 판매령을 시행하여 1515년부터 면죄부를 판매하고 있었다. 사실 면죄부는 이때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면죄부의 역사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 특히 십자군 전쟁, 교황 클레멘트 6세의 칙서(Unigenitus, 1343)등을 통해 강조되어 왔고, 교황 칼릭투스(Calixtus)는 1457년 연옥에 있는 영혼들도 면죄부에 의해 구원이 가능하다고 선언하였고,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IV)는 1476년 공포한 칙서를 통해 연옥의 고통해제의 대상을 죽은 자만이 아니라 산 자에게도 확대시켰다. 이러한 배경에서 면죄부판매는 종교개혁 당시 거의 유럽전역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당시 교회는 1343년 교황 클레멘스 6세가 내린 칙서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피의 공로, 마리아의 공로, 그리고 성자들의 공로는 마치 은행에 예치된 무한한 자본과 같아서 다른 사람의 형법을 보상해 주고 남는다고 하는 소위 ‘잉여공로설’을 믿고 있었다. 이 잉여공로설의 요지는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그리고 성자들의 선행(善行)이 자기 자신을 구원하고도 남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형벌(Poena)을 속량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점차로 돈이 개재되었는데 처음에는 가난한 자, 병든 자들이 돈을 냄으로써 형벌을 면케 되었으나 급기야는 세속화되어 면조부의 공개적인 판매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교황 레오 10세는 독일지역에서의 면죄부 판매를 위해 마인쯔(Mainz)의 대주교였던 알브레히트(Albrecht, 1490~1545)에게 위임하였는데 그는 여러 성직을 겸임한 자로서 면죄부판매 수입으로 교황에게 진 빚을 갚도록 내락 받았다. 루터가 활동하고 있던 비텐베르크와 인접한 지방에서는 요한 테첼(Johann Tetzel, 1465-1519)이라는 도미니크 수도사가 면죄부 판매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러한 이단적인 가르침 앞에서 루터는 면죄부의 부당성을 설교하였고, 마인쯔의 대주교 알브레히트와 브란센부르크의 대주교 슐츠(Schultz)등에게 편지하여 면죄부의 부당성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나 변화가 없자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면죄부의 성격, 효과, 부당성, 문제의 심각성 등에 대한 토론을 제시하는 95개조를 게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면죄부를 사는 것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선한 열매’(Opus bonum)로 구원받는다고 설교한지 꼭 1년이 되는 날이었다. 루터가 10월 31일에 면죄부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95개조를 게시한 것은 그 다음날인 11월 1일에 작센(Sachsen)지방의 전 제후들과 귀족들, 신부들이 비텐베르크대학 교회에 모여 면죄부 발행의 타당성을 결의하는 대규모의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라틴어로 작성된 95개조의 내용은 면죄부가 신자의 영혼구원과 성화(聖化)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사실과 진실로 회개한 자에게는 면죄부 없이도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하신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 글은 면죄부제도의 해악을 지적한 기념비적인 문서가 되었다.
   루터의 95개조는 불과 2주안에 독일 전역에 퍼졌고 한 달만에 전 구라파에 보급되었다. 루터가 의도하였던 토론은 열리지 못한 채 심각한 논쟁이 일어났다. 11월 1일의 대규모의 행사를 주관했던 테철은 이 행사가 루터의 95개조 사건으로 무산되자 자기의 스승이었던 코흐(Konrad Koch)박사를 찾아가 루터와 대결할 학문적인 준비를 서둘렀고, 이듬해인 1518년 1월 도미니칸수도회 총회에서 106개조에 달하는 항목으로 루터를 정죄하고 이단으로 몰아 교황에게 파문을 요청키로 결의하였다. 이때 루터는 브란덴부르크의 슐츠 주교를 찾아가 95개조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다시 피력하고 교회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요한 마일 엑크(Johann Mayr Eck, 1486~1543)는 루터의 절실한 친구이자 신학이념을 같이 했었으나 도리어 테첼 편에서 루터를 공격하였는데 이것은 루터에게 깊은 충격을 안겨 주었다. 잉골스탓트(Ingolstadt)대학 교수였던 엑크는 이때로부터 루터의 가장 집요한 적수가 되었는데, 그는 오벨리스크(Obelisks)라는 책을 써서 루터의 95개조를 비판하고 루터는 후스(John Hus)의 사상을 따르며 교황의 수위권을 반대하는 이단이라고 공격하였다. 여기에 대해서 루터는 인쇄용어로 별표(*)란 의미를 지닌 「아스터리스크」(Asterisks)라는 이름의 책을 써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였는데 이것은 두 사람간의 신학논쟁의 시작이었다. 교황은 어거스틴파 수도회 책임자인 가브리엘 볼타(Gabriel Volta)를 통하여 스타우피츠에게 루터문제 해결을 지시하였다.
   루터는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도록 요청받았으나 이를 거부하고 1518년 4월 하이델베르크에서 모인 어거스틴파 수도회 총회에 40개 항목의 논제를 제출하고 토론에 임했는데, 이것이 흔히 ‘하이델베르크 논쟁(Heidelberg Disputation)이라고 한다. 여기서 루터는 바울과 어거스틴 신학에 의존하여 스콜라주의적 주지주의(主知主義)신학을 비판하였다. 이때 제출된 루터의 논제는 그가 1513년 시편강의를 해온 이후 형성된 그의 성경 주석에 근거한 교리적 작품으로 루터의 복음주의 신학의 총화라고 말할 수 있다. 비록 이 토론에서 많은 사람들을 설복시키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후일 그와 함께 교회개혁운동의 동료가 된 세 사람의 젊은 신학자를 얻게 된 일은 루터에게 커다란 기쁨이었다.
  마르틴 부쩌(Martin Bucer 혹은 Butzer)는 그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하이델베르크의 도미니크수도회 소속이었으나 아퀴나스의 신학을 버리고 인문주의를 따르던 인물이었다. 그는 루터의 논쟁을 보고 복음주의 신학자가 되었다. 그는 후일 스트라스버그의 개혁자가 되었고 칼빈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 된 것이다. 또 한 사람은 요한 브렌츠(Johann Brentius)였는데 그는 독일 남부지방에서 루터의 신학을 보급하였고 슈바벤(Schwaben)지방의 개혁자가 되었다. 다른 한사람은 빌리카누스(Theodore Billicanus)로써 그는 뇌르틀링겐(Nördlingen)의 개혁자가 되었는데, 이들 젊은 루터파 신학자들을 통해 복음주의 신학은 널리 보급될 수 있었다.
   1518년 하이델베르크에서 돌아온 루터는 「95개조항에 대한 해설」(라틴어 원제는 Resolutiones disputationum de indulgentiarum virtute)이란 글을 써서 교황에게 보내며(1518년 6월) 교황의 권위에 순복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때는 교황청은 루터에 대한 조사를 마친 직후였는데 루터의 범죄가 뚜렷하다고 보여져 루터는 이단과 교황 모독죄로 고소되었다.
   그해 8월 7일에는 루터는 로마로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받았고, 교황은 독일주재 교황 대사인 카제탄(Thomas Cajetan, 1465~1534) 추기경에게 루터를 체포하도록 지시하였다. 카제탄은 1518년 7월 7일 아우그스부르크(Augusburg)에 도착하여 국회를 통해 정치적으로 루터를 체포하려고 하였으나 당시 정치적 상황은 루터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교황은 황제 막시밀리아누와 견제가 필요했기 때문에 선제후들의 지지가 필요하였다. 그래서 교황은 선제후 프레드리히(Frederich)의 요청을 받아들여 루터가 로마로 가지 않고 아우그스부르크에서 카제탄과 변론하도록 허락한 것이다. 카제탄은 교황의 지시사항 세 가지, 곧 모든 것을 취소할 것을 약속할 것, 이단적 교리를 가르치지 말 것, 거룩한 가톨릭교회의 평화를 도모하겠다고 약속할 것 등을 요구했으나 루터는 자신의 잘못이 없음을 주장하고 카제탄과 신학논쟁을 전개하였다.
   이 때 루터는 성경의 권위에 의존하여 교황의 권위, 공로사상, 성례관 등에 대해 그의 사상을 전개하였고 카제탄은 교회의 권위에 근거하여 그의 논리를 전개하였다. 이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논거에서 이론을 전개했으므로 논쟁을 결론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 토론에서 위험을 느낀 루터는 10월 20일 밤 몰래 아우그스부르크를 떠났다.

이와 같은 신학적 토론과 개혁운동 과정에서 정치적인 변화는 루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즉, 1519년 1월 12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아누스는 사망하였고, 그의 손자인 찰스 5세(Charles V)가 1519년 6월 18일 황제로 취임하였다. 찰스 5세는 1500년생인 그는 약관 19세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독일어를 모르는 스페인 사람으로서 독일내정에 깊이 개입할 수 없었다.
   1519년 7월에는 라이프찌히에서 엑크와 루터, 그리고 칼슈탓트 사이에 신학토론이 전개되었는데 이 토론을 흔히 ‘라이프찌히 논쟁’(The Leibzig Debate)이라고 부른다. 엑크는 이미 1500년에 잉골스탓트 대학에서 교의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한 대표적인 학자였고 루터와 비견되는 학자였다. 칼슈탓트(Carlstadt)는 안드레아스 보덴슈타인(Andreas Bodenstein)이란 이름으로도 불리었는데 루터의 박사학위논문 심사위원이 기도했고 루터를 훌륭한 학자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는 이태리에서 어거스틴 연구를 마치고 돌아온(1516) 이후 1518년에 151개 항목의 논제를 써서 엑크에게 도전한 바 있는 학자였다.
   후일 루터의 후계자가 된 멜랑히톤도 참가하였는데 이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세 가지, 곧 교황의 신적 권위, 연옥교리, 면죄부와 고해성사였다. 이 논쟁에서 루터의 최고의 권위는 성경이므로 성경보다 교황의 우위성을 말하는 것은 잘못임을 지적하고, 교황의 신적권위를 주장하는 엑크를 공격하였다. 엑크는 콘스탄스 회의(Constance, 1415)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위클리프와 후스의 이단이 루터를 통해 다시 나타났다고 주장하고 후스를 버리든지  콘스탄스 교회회의의 권위를 부인하든지 양자택일을 요구하였다. 루터는 교회회의도 과오를 범할 수 있음을 주장하고 후스를 처형한 것은 오류였다고 지적하였다. 이 토론에서는 루터는 ‘오직 성경’이라는 성경권위와 성경중심사상에서 논쟁을 이끌어 갔고 교부들의 권위보다도 성경의 권위가 우위에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이제 개혁운동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밝아오는 역사의 대낮과 함께 오랜 세월동안 어두움 속에 묵인되어 왔던 교회의 절대권, 공로사상, 성례전적 미신들은 심한 공격을 받게 된 것이다.

교황청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1520년 6월 15일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에게 교서, 곧 Exsurge Domin를 공포하였다. 이 문서는 “주여 일어나셔서 당신의 소송사건을 재판하소서”라는 말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말인데 준 파문적 경고의 교서였다. 루터는 1520년 6월에 쓴 「로마교황청에 관하여」(On the Papacy at Rome)에서 41개의 오류를 지적하였는데 교황청은 60일안에 이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면서 불응 시에는 파문장이 효력을 발생한다고 하였다. 루터는 이에 불응하였다. 어떤 도시에서 자기 저서를 불태운다는 소식을 접한 루터는 1520년 12월 10일 교황의 교서를 다른 가톨릭 법전들과 함께 불태웠다. 이것은 만용에 가까운 용기였다. 그리고 루터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대들은 진정으로 교황의 지배에서 떠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나는 이 악한 세대를 향해 내가 하나님께 대한 책임을 완수하지 않고 침묵을 지킴으로써 양심에 짐을 지우는 것 보다 차라리 모든 위험을 참고 견디려 합니다.

그의 말처럼 루터는 그의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더 많은 날들을 견디지 않으면 안 되었다. 1529년은 독일 종교개혁 운동사에서 중요한 한 해였다. 각종의 신학토론과 출판이 계속되었고 교회개혁의 불길은 인쇄술에 힘입어 전 구라파로 신속히 전파되고 있었다. 이 격렬한 논쟁의 와중에서 루터가 1520년에 썼던 세 가지 문서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내는 글」(An den christlichen Adel deutscher Nation von des christlichen Standes Besserung)이라는 소논문인데, 이 책에서 루터는 교회개혁의 책임은 성직자들에게 있으나 그들이 이 의무를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독일의 귀족들은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으로서 교회를 개혁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음을 말하고 만인 제사장직을 주장하였다. 특히 이 글에서는 세 가지 벽을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곧, 영적 문제에 있어서 교황의 절대권, 교황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 교황만이 교회회의를 소집할 수 있다는 주장을 비판하였다. 이 소책자는 1520년 8월에 출판되었다.
   두 번째는 「교회의 바벨론 감금」(Von der babylonischen Gefangenschaft der Kirche)이라는 책인데 이 책은 루터가 쓴 가톨릭의 성례전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톨릭이 가르치는 7성례 중 성경적 근거가 없는 다섯 가지, 곧 견신례(confirmation), 고해성사(penance), 종유식(extreme unction), 서품식(orders), 혼인예식(marriage)을 비판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성례는 세례와 성찬뿐임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성찬식에서 신자들에게 잔을 돌리지 않는 것과 미사를 희생제사로 가르치는 것을 비판하였다. 특히 루터는 이 글에서 성찬에 있어서 공재설(共在設)을 주장하였다. 이 글은 1520년 10월에 출판되었다.
   세 번째는 「그리스도인 자유에 관하여」(Von der Freiheit eines Christenmenschen)라는 글인데 이글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얻는 자유에 대해 논하였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은 아무 것에도 종속되지 아니한 자유로운 존재이다. 그리스도인은 만민에게 봉사하며 섬기며 모든 것에 종속된다.”라는 두 가지 명제를 제시하였는데 이 글에는 루터 개인의 종교적 체험이 나타나 있다. 이 글에서 루터는 참된 신앙은 영적 노예상태에서 신자를 해방시키고 이웃에 대한 사랑과 봉사를 다하는 것임을 천명하였다.
   이상의 세 편의 글을 흔히 종교개혁의 삼대 작품이라고 말하는데 위의 세 편의 글 외에 1520년 5월에 쓴 「선행에 관하여」(Von den guten Werken)도 귀중한 작품이다. 이 책에서 루터는 믿음과 선행의 관계를 설명하고 공로사상을 배격하였다.

루터가 자기의 입장을 취소하지 않고 교회의 교서를 불태웠을 때 무서운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다. 즉 1521년 1월 3일 교황은 루터를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영원히 추방하는 최후의 파문장, 곧 Decet Romanum Pontificem을 공포한 것이다. 이제 루터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홍해를 건넜고 교회개혁의 출애굽 사건은 새로운 단계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