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교회개혁은 왜 일어났는가?

  때가 찬 경륜

  1400년대를 마감하고 1500년대가 시작되는 한 시대의 변혁기에 유럽에서는 실로 엄청난 정신적 변화가 조용한 혁명을 예비하고 있었다. 이 변화는 매우 복합적인 것이었다. 정치질서나 문화현상, 세계관뿐만 아니라 교회중심의 구조(ecclesiastical structure)는 새로운 개편을 요청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16세기에 접어들면서 로마 가톨릭교회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던 중세문화가 붕괴되고 서구문명의 새로운 단계의 중요한 양상들이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16세기에는 이전 시대와는 선명하게 구별되는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 등이 유럽의 들판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러한 변화는 새로운 지식을 매개로 한 것으로써 이 변화에 영향을 준 대표적인 인물은 콜룸부스(Columbus), 바스코 다 가마(Vasco de Gama), 그리고 코페니쿠스(Copernicus)였다.
   콜롬부스는 1492년 10월 12일, 신대륙을 발견함으로써 구라파 중심의 세계질서에 충격을 주었고, 바스코 다 가마는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인도양으로 와서 1498년 인도와 중국을 발견하였다. 그러한 지리상의 발견은 세계관의 변화를 주기에 충분한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폴란드인으로서 교회법학자이자 의사였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地動設)은 천동설 중심의 우주관에 매여 있던 중세의 마당에 떨어진 폭탄이었다. 천체의 움직임과 지동설에 대한 그의 해석은 단순히 물리학자의 발견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업과 무역, 도시화와 새로운 사회계급(bourgeoisie)의 대두, 그리고 사상적 혁명과 사회구조의 변혁을 가져왔다. 니콜라우스 카자누스(Nikolaus Casanus, 1401~1464)와 야콥 뵈메(Jacob Böhme)같은 학자들의 자유로운 학리(學理)이론 역시 새로운 시대를 예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역사의 새로운 단계의 중요한 양상들은 떠오르는 태양처럼 16세기 초, 유럽의 언덕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세계사적인 사건들은 후론하게 될 교회 내외의 변화의 동인들과 더불어, 소위 '중세'(the middle ages)라고 불리는 장구한 교황 중심의 질서를 서부 유럽의 서편으로 퇴각시키는 역사의 동력이 되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볼 때 종교개혁은 우선 하나님의 때가 찬 경륜이었다. '때가 차매'(갈 4:4) 그 아들을 보내셨던 하나님께서는 교회개혁의 때가 충만했을 때 루터의 역사의 한복판으로 불러내신 것이다. 당시 루터는 작센지방의 작은 도시였던 비텐베르크의 무명의 교수에 지나지 않았다. 이곳은 겨우 2천명의 인구를 가진 한적한 지방 도시로서 루터 자신의 표현대로 '문명세계의 끝'에 지나지 않았다. 비록 루터는 교회개혁을 의도하거나 그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는 그 시대의 변혁을 이끌어간 사건들을 태동시킨 첫 인물이 되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루터가 제기한 '95개의 항의'는 한 달이 못되어 유럽의 주요 도시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때로부터 유럽을 격동시킨 힘들은 한 개인의 의지나 노력과는 비견할 수 없는 강력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점들은 교회개혁이 바로 그 시대적 요청이었으며 개혁의 때가 성숙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교회개혁은 누군가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역사의 필연이었다.
   역사에 있어서 모든 동인(動因)은 하나님의 섭리에 있음을 고백할 때 교회개혁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이었다. 시대 시대마다 신실한 사역자들을 세우시고 일해 오신 하나님께서는 16세기에도 교회를 새롭게 하시는 역사를 시작하셨다. 개혁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이었다.

우리는 역사의 발전을 어느 한 가지 요인으로 설명하기에는 감당할 수 없는 복합적인 요인들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교회개혁의 경우에도 예외일 수 없다. 교회개혁의 원인에 대한 토론은 오늘날까지도 쟁점으로 남아 있다. 이미 불크하르트(Jocob Burckhardt)가 말한 바처럼 그 어떤 설명으로도 개혁의 원인을 완벽하게 기술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하여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중세교회의 부패

   종교개혁의 원인일 뿐만 아니라 개혁을 가능케 했던 직접적인 요인은 중세교회의 부패였다. 특히 중세 후기의 교회는 세속권력과의 야합, 재물에 대한 탐욕으로 크게 속화되어 있었고 성직자들의 영적, 도덕적 부패는 가공할만한 것이었다. 오도된 신학과 교리적 탈선, 불의한 제도와 이교(異敎) 의식 등 교회의 타락과 종교생활의 폐해는 심각했으므로 개혁은 불가피하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천주교 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예를 들면 개혁운동기의 초기 교황이었던 아드리아누스 6세(Adrianus Ⅵ, 1522~1523)는 신성 로마제국의 뉘른베르크 국회(1522~1523)에 파견한 교황사절 프란체스코 치에레가띠(Francesco Chieregati) 추기경에게 보낸 훈령에서 "루터 이단으로 교회가 받은 어려움의 책임은 성직자들, 특히 교황청과 그 성직자들에게 있다."라고 시인하였다.
   소위 '돈 만드는 천재'(financial genius)로 알려진 교황 요한 22세(John ⅩⅩⅡ, 1316~1334)는 각종의 징세제도를 창안하여 돈을 모았고 성직을 매매하고 면죄부를 발행하기도 했다. 그가 창안한 징세제도는 교회질서를 극도로 문란하게 했고 교황청의 사치를 가중시켰다. 교황 비오 2세(Pius Ⅱ, 1458~1464)나 이노센티우스 8세(Innocentius Ⅷ, 1484~1492) 등은 도덕적으로 방종하여 사생아까지 두어 세인의 지탄을 받았던 교황이었다. 교회개혁 직전의 교황이었던 알렉산더 6세(Alexander Ⅵ, 1492~1503)의 타락은 그 이전의 교황과는 비견할 바가 못 된다. 그는 당시 교회의 관행과 규율을 무시하고 방종한 생을 살았던 악명 높은 교황이었다. 그는 교황이 되기 전에 이미 몇 사람의 정부와 3남 1녀의 자녀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그 후에 7명의 자녀를 더 얻었다. 그는 1492년에 교황이 되었는데, 이때도 그는 경쟁자들을 금품으로 매수하였다. 그의 폭식, 음란은 극에 달하였고 일단 파티를 열면 녹초가 되기까지 먹고 마시고 즐겼으므로 역사가는 그의 ‘살인적 파티’(lethal dinner parties)를 유명한 일화로 기록하고 있다. 그의 아들들도 ‘천재적인 난봉꾼들’(Virtuosen des verbrechens)로 알려져 있다. 플로렌스에서 교황청의 부패와 통박하고 교회개혁을 주장했던 도미니칸 수도사 사바나롤라(Savanarola)를 처형한 것도 알렉산더 6세였다. 15세기 말 이탈리아의 콘스탄츠 교구의 경우 연간 1500명에 이르는 사제(신부)들의 사생아가 태어났다는 기록만 보아도 당시 교회 지도자들의 도덕적 상태를 감지할 수 있다. 더욱 더 가관이었던 것은 당시 교회는 사생아를 둔 성직자들에게 취첩과 아이 양육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세금(concubinagefee)을 물게 하여 성직자들의 비행을 묵과하는 동시에 부를 축적하도록 하였다는 점이다.
   루터가 95조개를 게재할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10세(Leo Ⅹ, 1513~1521)는 사냥과 오락을 즐겼던 인물로서 매우 세속적인 교황이었다. 그는 교회 내에 여러 개혁의 요구, 곧 에라스무스(Erasmus, 1466~1536), 로이힐린(J. Reuchlin, 1455~1522), 훗텐(Ulrich von Hutten, 1488~1523)의 개혁 요구를 묵살하고 교황권을 남용했을 뿐만 아니라 면죄부를 발행, 판매케 함으로써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발달을 제공하였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니콜라스 5세(Nicholas Ⅴ, 1447~1455)에서 레오 10세에 이르는 10명의 교황을 르네상스 교황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이름 그대로 르네상스시대의 영향을 받았던 자들로서 교회의 재산과 영토를 사유화하고 교회의 중요한 직책을 족벌체제화한 과오를 범하였다. 이들은 교회의 영적, 도덕적 지도자라기보다는 불의한 세속군주였다.

    교리적 탈선

   교회개혁의 원인에 대하여 우리가 간과해서 안 되는 점은 교회의 부패를 도덕적, 윤리적 측면에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보다 중요하고도 근원적인 문제는 교회의 신학적 혹은 교리적 탈선(doctrinal deviation)이었다. 특히 구원관은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크게 이탈하였다. 이 교리적 탈선은 교회생활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었다. 예컨대 교직자들이 여러 직책을 맡고 그 수입과 성직록(聖職錄)을 독점하였던 소위 ‘겸직제도’나, 한 사람이 동시에 두 장소(성당)에 있을 수 없으므로 겸직제도에 합법성을 부여하기 위해 만들었던 ‘부재직임제도’(不在職任制度, absenteeism)등과 같은 제도는 교리적 탈선의 결과였다.
   당시 교회에 편만해 잇던 각종 미신과 잡다한 이교적 풍습 또한 교리적 탈선을 예증하고 있다. 루이스 스피츠(Lewis Spitz)에 의하면 교회의 각종 신조들은 명확하게 정의되지 못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당시 교회가 시행하는 미사나 예배의식은 이교적 관습과 혼합되어 있었다고 했다.

이 시대의 신학적 혼란은 새로운 신학운동, 곧 비아 모더르나(via Moderna)라고 불리는 윌리암 옥캄(William of Occam, 1300~1349)을 따르는 유명론자들(唯名論者, nominalists)과 비아 안티꾸아(via Antiqua)라고 지칭되던 토마스 아퀴나스(Thomans Aquinas, 1224~1274)를 따르는 실재론자들(實在論者, realists)간의 대립으로 더욱 가중되었다. 신앙과 이성을 융합하려는 토마스의 합리주의적 신학은 13세기 이래 교회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14세기에서부터 프란체스코 신학자들은 토마스의 이성주의(理性主義), 곧 인간에게 있어서 이성이 최고의 기능이라는 견해에 대립하여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은 던스 스코투스(Duns Scotus, 1265~1308)의 신학을 주창하였다. 스코투스는 토마스의 이성(理性)에 대한 의지(意志)의 우위성을 강조하였는데 이 견해는 프란체스코 신학자들에 의해 계승되었고, 이들은 후에 신앙과 이성을 완전히 분리해 높음으로써 합리주의적 스콜라 사상의 기초를 붕괴시켰다.
   실재론자인 토마스는 실재론적 철학에 근거하여 신학과 교회의 구조를 설명하였는데, 개체(個體, individuals)는 우주적 실재(宇宙的 實在, Universals)에 근거한다고 주장하고 교회나 국가는 다수 개체의 집합체가 아니라 이보다 우선하는 보편적 실재에 근거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프란체스코 신학자들의 전통 속에서 성장한 옥캄은 장구한 세월 동안 교회의 이념적 기초였던 토마스의 스콜라 신학(Scholasticism)에 반기를 들고 참으로 실재하는 것은 개체뿐이며 보편은 이름뿐이라고 하여 소위 유명론(nominalism)을 주장하였다. 당시 교회는 토마스의 철학에 근거하여 개체보다 우선하는 보편의 실재를 믿는 보편교회를 주장해 왔으나 옥캄과 그 추종자들은 보편은 시재하지 않는다고 보았으므로 당시 교회 곧 전 구라파를 포용하는 거대한 조직체는 이론적 기반을 상실하게 되었고 결국 중세교회의 붕괴에 기여하였다.
   루터는 옥캄의 유명론을 따랐던 가브리엘 비엘(Gabriel Biel, 1420~1485)의 저서를 통해 비아 모더르나 신학을 공부하였다. 비록 그는 옥캄의 개인주의적 유명론 철학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보편은 이름뿐이며, 실재하는 것은 개체라고 주장했던 옥캄의 신학(via moderna)에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프란짼(A. Franzen)과 돌란(J. Dolan)은 「교회사요론」(A Concise History of the Church)에서 루터의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사상은 옥캄의 신학을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