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에드워드 6세 치하에서의 개혁

에드워드 6세
헨리 8세가 사망하자 그의 외아들 에드워드는 아버지를 이어 1547년 1월 왕위에 올랐다. 그는 1537년 10월 12일 생이었으므로 그의 나이 꼭 아홉 살 때 왕위에 오른 것이다. 이  때로부터 그는 1553년까지 꼭 6년간 재임하였다. 어릴 때부터 병약했던 그는 1553년 그의 나이 16세 때 사망하므로 그의 통치는 길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매우 진지하고도 사려깊은 조숙한 어린이었으며 분별력과 판단력의 소유자였다. 그의 통치 기간 중에 많은 분야에 개혁이 이루어졌으므로 개혁자들은 그를 ‘어린 요시아’ 혹은 ‘ 새로운 요시아’(New Josiah)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는 사실상 영국 역사상 최초의 개신교 군주였다고 할 수 있다.
   에드워드 6세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그의 어머니 제인 시머(Jane Seymour)의 동생, 곧 그의 외삼촌인 서머셋 공(Duke of Somerset) 에드워드 시머(Edward Seymour, 1506-1552)가 1549년까지 2년간 섭정을 담당하게 되었다. 허트포드(Hertford) 백작이었다가 서머셋 공작이 된 그는 에드워드가 등극한지 한 달만에 ‘호국경’(Protector)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았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때 교회개혁을 주도한 실제적 인물은 켄터버리 대주교였던 토마스 크랜머였다. 그는 확신있는 개신교도였고 영국교회를 개혁하는데 진력하였다.

개혁을 위한 시도
이 시기의 개혁은 1539년에 작성된 ‘6개 조항법’(‘6개신조’라고도 불림)을 폐지하는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법은 화체설, 성직자의 독신, 청빈의 서약, 사적 미사, 고해성사, 성찬시 떡만을 주는 것 등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어 가톨릭적 입장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법은 에드워드가 왕위에 오른 1547년 폐지되므로 친프로테스탄트적 개혁이 시작되었다. 이제 신자들에게 떡만이 아니라 잔이 허락되었고, 기부금을 낸 사람들을 위한 사적 미사가 폐지되었고 성직자의 결혼이 인정되었다.
   이 당시 개혁을 반대하던 성직자들은 해임되기도 했는데, 윈체스터 주교 가디너(Stephen Gardiner)는 개혁 조치를 반대한 이유로 1547년 9월 투옥되었다가 1551년 2월 15일 주교직에서 해임되었고, 엑세터(Exeter)의 죤 베시(John Vessey), 런던의 보너(Edmund Bonner), 워체스터의 히이드(Nicholas Heath), 그리고 치체스터(Chichester)의 죠오지 데이(George Day) 등도 주교직에서 해임되거나 사임하였다. 그리고 그 공석에 복음주의적 신앙을 가진 인사들이 임명되었다. 즉, 리들리(Nicholas Ridley)가 런던에, 마일즈 커버테일이 엑세터에 불링거(H. Bullinger)의 친구였던 죤 후퍼(John Hopper)는 1551년 그로체스터에 주교로 부임하였다.

이 시기의 또 하나의 커다란 개혁은 예배의 개혁이었다. 예배란 신앙과 신학에 대한 표현이므로 교회개혁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예배의 개혁은 몇 가지 측면에서 추진되었는데, 1548년 3월 8일 ‘성찬조례’(Order of Communion)가 발표되어 라틴어로 진행되던 미사에 영어적 요소가 삽입되었다. 이 해에는 교회당 내부에 있던 성상들의 철거가 요구되었다. 이때의 무엇보다도 중요한 변화는 예배모범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도서의 작성이었다. 크랜머가 중심이 되어 작성된 ‘공동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는 1549년 1월 의회에 의해 승인되었고 그해 6월 9일 성령 강림절 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 기도서는 어느 정도의 개혁은 반영하되 가톨릭측의 불필요한 비난을 피하려는 선에서 조심스럽게 작성된 것이었다. 특히 성만찬에 관해서는 취리히나 제네바의 개혁자들의 입장을 수용하면서도, 화체설이라는 표현은 피하되 가톨릭적 입장을 어느 정도 유지한 모호한 점이 있었다. 이런 점에서 이 기도서는 타협의 열매였다. 이런 점들에 대해서 마르틴 부쩌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큰 변화는 이 기도서는 영어로 작성되어 영국인들은 처음으로 자기들의 말로 된 예배의식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기도서는 모든 교회에서 사용되도록 ‘통일령’(Act of Uniformity)에 의해서 의무화 되었고 기도서에 대한 비판은 금지되었다.

개혁은 신중하게 추진되었으나 1549년 7월 이후 영국의 여러 곳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옛 종교’로 돌아가기를 요구하고 영어로 된 공동기도서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으나 이 반란은 사실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 혹은 사회적 성격이 강했다. 당시 농민들의 불만은 심각하였다. 중세 경제를 조금만 이해한다면 이들의 불만의 요인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6세기 초기에 영주들이 무장부대를 해산시킨 결과 수천 명의 군인이 가두에 범람하였고 실업은 급증하였다. 또 많은 귀족들과 지주들(향사)은 양을 치기 위해 공유목초지와 황무지의 일부를 자기 소유로 구획하였다. 이러한 구역 폐쇄 조치 때문에 농민은 토지를, 노동자는 노역을 빼앗기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스페인이 남아메리카에서 은광을 발견한 이후 유럽의 물가는 오르고 있어서 농민들의 불만은 가중되고 있었다. 농민들의 불만은 폭동으로 변했고 1천 6백 명의 농민들은 노윅(Norwich)시를 점령하였다. 귀족들이 노포크(Norfolk)에서 공유지의 출입을 금지한 것이 불만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 불만은 이전 시대가 남겨준 유산이었고 이 불만은 근원적으로 종교적 문제는 아니었다.
   독일에서와 마찬가지로 농민들의 반란은 곧 진압되었지만 정치적 불안은 더 오래 계속되었다. 이 당시 섭정이었던 에드워드 시머는 농민들의 편에서 대 지주들의 욕망에 제동을 가하려고 했으므로 대 지주들은 그가 혼란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비난하였고 또 진압에 적극적이지도 않았다고 그를 비난하였다. 광신적인 인사들로부터는 그가 관용적인 적당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고 상인들은 그가 부를 축재한다고 비난하였다. 결국 그는 실권하여 ‘호국경’에서 해임되었고 1549년 10월 런던탑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노윅시 반란을 진압했던 워윅(Warwick) 백작인 존 다들리(John Dudley)가 실권을 잡았다. 후일 노섬벌런드 공(Duke of Northumberland)이라는 칭호를 얻는 다들리는 여전히 인기가 있던 서머셋 공을 1522년 1월 22일 처형하고 자신이 섭정 추밀원의 의장이 되어 서머셋 공보다 더 철저한 개혁을 추진해 갔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다들리가 정말 교회 개혁에 대한 신념을 가졌던 사람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사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종교적 확신도 건실한 양심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서머셋 공을 권력으로부터 제거할 무렵 가톨릭측의 지지를 요구하는 조건으로 ‘옛 신앙’의 회복을 약속했었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후 그는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가톨릭으로 복귀할 경우 옛 귀족계급과 보수적 주교들의 정치적 간섭을 우려한 것이 아닌 가 추측된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이해관계 때문에 종교개혁 쪽을 선택했고 그 이해관계 때문에 이전 시대보다 더 철저하게 개혁을 추진했던 것이다.

존 다들리, 곧 노섬벌런드 공의 섭정하에서도 개혁은 크랜머의 주도하에 이루어져 갔다. 이제 이 당시의 중요한 세 가지 개혁에 대해 언급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 1550년 5월 크랜머에 의해 새로운 ‘성직 수임례’(ordinal)가 제정되었다. 이 문서에서는 목사의 임무가 “회중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성례를 집행하는 자”로 정의되었다. 즉 이제 목사는 희생제사를 집례하는 사제(priest)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며 성례를 집행하는 자(minister)였다. 이것은 가톨릭적 사제주의로부터의 신학적 개혁이었고 예배의 개혁이었다.

   둘째로 '공동 기도서'의 개정이었다. 1549년의 제1기도서에는 가톨릭적 요소가 여전히 남아 있었고 따라서 비판이 적지 않았으나 1552년 개정, 공포된 ‘제2기도서’에서는 명백하게 대륙적 개신교의 특징이 나타나 있다. 예를 들면 미사의 성격을 규정하는 신학적 원칙들과 함께 ‘미사’라는 단어가 삭제되었고, 성찬 용어들은 감사와 기념을 강조하였고, 제단(祭壇)은 성찬대로 대치되었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와 중세적인 예복도 폐지되었다. 오직 중백의(中白依, surplice)의 사용만 허락되었다. 이 제2기도서에는 마르틴 부쩌의 제안이 상당히 반영되었다. 이 기도서는 1552년 3월 의회를 통과한 ‘제2통일령’에 의해 승인되었고 모든 교회가 이 기도서를 사용하도록 요구되었다. 에드워드 6세 치하에서 공포된 이 기도서는 기본골격이 그대로 유지된 채 오늘날에까지 영국 교회의 기도서로 사용되고 있다.
   셋째로 신앙고백서의 작성이었다. 이 신앙고백은 개신교적인 성격을 보다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데, 1553년 6월 ‘42개조’(Forty-two Articles of Religion)라는 이름으로 공포되었다. 이 기도서는 크랜머에 의해 리들리와 존 낙스와 같은 신학자들의 도움으로 작성되었는데 성상, 성골숭배, 성자숭배, 면죄부, 연옥 등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또 화체설, 성찬식에서의 남은 것들에 대한 숭배, 영국교회에 대한 교황의 재판권 등이 거부되었다. 특히 이 ‘42개조’에서는 예정론이 강조되고 성찬에서의 칼빈의 견해가 반영되어 칼빈주의적 셩격을 띄게 되었다.

에드워드 6세의 사망
병약했던 에드워드 6세는 1553년 7월 6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겨우 16세 때였고 그가 새로운 신앙고백서를 공포한지 한 달 후였다. 그의 죽음은 커다란 비극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유럽이나 영국에서는 통치자의 종교에 따라서 그 나라의 종교가 결정되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가 병상에 눕게 되고 죽음이 가까운 것을 안 섭정 노섬벌런드 공은 헨리 7세의 증손녀가 되는 제인 그레이(Jane Grey)를 후보자로 내 세우고 자기 아들과 결혼하도록 꾸몄다. 말하자면 자기 며느리를 다음 군주로 내세워 자신의 집권을 연장하려고 했던 것이다. 에드워드 6세가 임종시에 제인 그레이에게 왕위를 계승하게 하겠다는 유언장에 서명하도록까지 하였으나 이 일은 성사되지 못했다. 런던으로 의기양양하게 입성한 노섬벌런드는 제인 그레이를 여왕으로 선포하였으나 메리(Mary)는 쉽게 물러날 만큼 만만한 여자는 아니었다. 스페인 대사는 당시 황제였던 칼 5세에게 보낸 서신에서 메리는 “열렬하며 과단성이 있다”고 했고 명령만 하신다면 빨래판을 타고 영불해협을 건널 만큼 무서운 여자라고 했다. 사실 그녀는 군인의 용기와 광신적이라고 할 만한 가톨릭 신앙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런던으로 입성하였고 주어진 권력을 놓치지 않았다. 추밀원은 그를 여왕으로 공포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발전되자 노섬벌런드는 ‘여왕 메리 만세!’를 외쳤으나 그의 환호는 때늦은 것이었다. 그는 런던탑에 유배되었다가 참수되었고 마음에도 없는 왕위 찬탈자가 된 제인 그레인은 6개월 후 같은 운명의 길을 갔다. 에드워드 치하에서 교회개혁이 크게 진전되었으나 가톨릭교도인 메리가 왕위를 계승함으로써 영국교회와 개혁자들은 심각한 탄압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상했던 대로 비극의 역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