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루터파의 성립과 발전
독일에서 루터주의는 1526년 제 1차 슈파이에르 제국회의를 전후하여 예배의식을 발전시켜갔고, 교회조직을 갖추어가기 시작하였다. 루터는 전통적인 예식문(liturgy)을 이용하여 독일어 찬송가 가사를 지었으며 음악과 찬송, 가정생활과 교육을 강조하였다. 그는 성경이 명백하게 금지하지 않는 한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전해오던 관습은 반드시 부인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그는 행정당국자들에게 각자의 권한 안에서 예배와 교회의 조직과 운영을 규제하도록 격려하였다. 그리하여 독일 안에는 영방교회(領邦敎會, Landeskirchen)가 생기게 되었고 그 밖의 다른 나라에서는 국가교회가 출현하게 되었다.
1521년 당시만 해도 루터는 외롭게 보름스제국회의 앞에서 정죄를 받았으나 1529년 제 2차 슈파이에르 제국회의 당시는 결코 루터가 외롭게 심판대 앞에 나와 있지 않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루터를 중심으로 한 개혁운동은 하나의 커다란 조직을 갖추면서 독일 내에서 새로운 신앙운동을 일으키며 확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1529년 슈파이에르 제국회의에서 ‘로마 가톨릭 신앙만이 유일한 합법적 신앙’이라고 선언했을 때 5명의 군주(제후)들과 14개 도시의 대표들이 루터를 지지하고 제국회의 결정에 ‘항의’(protest)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1530년은 루터파의 역사와 신앙에서 볼 때 중요한 해였다. 황제 칼 5세는 오랫동안 불화관계에 있던 교황과 프랑스왕과 화해하였고 1530년 2월 24일 볼로냐(Bologna)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이제 그는 독일에서의 종교적 분쟁을 해결할 여력을 얻게 되었고 그 자신이 로마 가톨릭교회와 루터파와의 문제를 직접 해결하기 위해 9년 만에 독일로 돌아온 것이다. 그래서 1530년 6월 20일 제국회의가 아우그스부르크(Augusburg)에서 공식적으로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로마 가톨릭측은 교회에 ‘반역한 무리’들이 ‘교회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도록 할 것을 황제에게 요구하였고, 프로테스탄트 측에서는 그들의 문제가 편견 없이 공정하게 취급될 것을 요청하였다. 또 한편 다수의 인사들은 이 회의를 통해 양측의 화해와 타협을 기대하였다. 멜란히톤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타협적으로 로마교회 측과 프로테스탄트진영 간에 화해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했었다.
황제 칼 5세는 그간의 사건의 전개와 더불어 양측의 신앙상의 차이를 알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신교도들에게 그들이 로마 가톨릭교회와 다른 점들을 분명하게 밝혀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래서 루터의 동료이자 후계자였던 필립 멜란히톤은 1530년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였는데 이것이 유명한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서’(Confessio Augustana, The Augusburg Confession)이다. 남부독일의 바덴(Baden)지방에서 출생한 멜란히톤은 당대 최대의 히브리어 학자였던 요한 로이힐린(Johannes Reuchlin, 1455-1522)의 영향을 받았던 유명한 인문주의자였다. 그는 언어적 재질과 함께 학자로 명성을 얻었는데 로이힐린의 천거로 비텐베르크대학의 헬라어 교수로 임명되기도 했다. 이미 그는 1521년에 신학요의(Loci Communes)를 썼는데, 이 책은 최초의 개신교 조직신학서로 알려져 있다.
부연하자면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서 외에도 그해 7월 8일에는 쯔빙글리가 작성한 신앙고백서(신앙의 이유, ratio fidei)가 제출되었고, 이로부터 사흘 후에는 스트라스부르크, 콘스탄츠, 멤밍겐, 린다우 등 4개 도시의 신앙고백서, 곧 ‘4도시 신앙고백서’(Confessio Tetrapolitana, Tetrapolitan Confession)가 부쩌(Bucer)와 카피토(Capito)에 의해 제출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일련의 문서가 제출된 후 다양한 입장의 신학적 견해가 논의되었던 것이다. 멜란히톤이 작성한 아우그스부르크 신조는 후일 루터파의 가장 중요한 공식문서가 되었고 1517년부터 1648년까지의 교회개혁 기간 중에 나타난 첫 신앙고백문서가 되었다. 어떻든 이 문서는 루터주의의 복음적 신앙을 표현하면서도 로마 가톨릭과의 어느 정도 화해를 의도하였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을 자극할만한 교황수위권의 문제, 연옥설 등 7개항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스토페르(Richard Stauffer)의 말처럼 사실 멜란히톤은 이 문서를 통해 프로테스탄트들이 ‘로마 가톨릭의 기본적 신앙’에서 이탈되지 않았음을 보이려고 시도하였고 따라서 가능한 한 비텐베르크와 로마를 갈라놓은 교리적 차이들을 축소시키려 애쓴 흔적이 있다. 또 복음주의 교회에 도입된 개혁적 조치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폐습들을 교정하려는데 있었음을 지적하려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 신앙고백서는 루터파에 대한 오해를 해소하고 교회의 폐습들을 개혁하는 한편, 프로테스탄트신앙을 천명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 신앙고백서는 전 28장으로 된 문서인데 1장에서 21장까지의 제 1부는 ‘신앙과 교리’로서 루터파의 기본적 신앙을 진술하였다. 즉 하나님, 원죄, 세례와 같은 교리는 따랐지만, 칭의, 성찬, 선행 등에 대해서는 로마 가톨릭과 견해를 달리하였다. 22장에서 28장까지의 제2부 ‘개정된 폐단들에 대한 논의’에서는 당시 교회의 폐단들에 대해 지적하고 있는데, 성찬식을 행할 때 평신도들에게 분잔 하지 않는 일, 성직자의 결혼을 금지한 일, 미사, 고해, 수도원 서약 등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루터는 1521년 보름스제국회의에서 정죄를 받아 법의 보호를 박탈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우그스부르크에는 가지 못하고 코부르크(Coburg)까지만 갔고 멜란히톤이 루터파의 대표단을 이끌고 아우그스부르크 제국회의에 참석하여 이 신앙고백서를 제출하였다. 이 문서는 제국회의 본회의장에서는 낭독되지 못했으나 1530년 6월 25일 황제의 개인접견실에서 200여명의 고위성직자들이 자리한 가운데 삭소니지방 선제후의 고문이었던 크리스티안 바이어(Christian Beyer)에 의해 약 두 시간에 걸쳐 낭독되었다.
비록 이 문서가 유화적이고 화평을 의도하였으나 제국의회의 과반수이상을 차지했던 로마 가톨릭주의자들에게 호의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제국회의는 멜란히톤과 에크를 대표자로 하는 양측의 위원회를 임명하였고, 로마 가톨릭측은 루터의 적수였던 에크로 하여금 멜란히톤에게 응전토록 하였다. 그래서 에크, 파베르, 코흐레우스 등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서에 대한 반박서’(Confutatio Confessionis Augustanae)를 제출하였고 그해 8월 3일에 채택케 하였다. 그래서 멜란히톤이 제출한 신앙고백서와, 로마 가톨릭측이 제출한 반박서를 중심으로 타협을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타협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사실 멜란히톤은 타협의 길을 모색하여 루터파와 로마 가톨릭파의 다른 점은 미사에 있어서 독일어를 사용하는데 불과한 극히 작은 것이라고 보는 데까지 이르렀고, 교황권 자체를 승인하려는 데까지 타협적이었다. 반면에 루터는 교황이 그의 지위를 폐지하지 않는 한 그와의 평화를 도모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보았다. 결국 제국회의는 1530년 11월 회의를 끝내면서 로마 가톨릭측이 제출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에 대한 ‘반박서’를 교회의 공적인 대변서를 받아들이고, 프로테스탄트에 대해서는 루터와 그 추종자들을 이단으로 정죄했던 1521년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결정을 재확인하는 것으로써 신·구교간의 문제를 종결지었다. 다시 말하면 루터파의 지도자들에게 로마 가톨릭으로의 복귀를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헷세의 필립, 작센의 요한, 브른스빅-루네부르크의 에른스트 등은 이 명령에 불복하였다. 멜란히톤은 한때 로마 가톨릭과의 타협을 시도하였으나 타협이 결렬되자 다시 루터주의의 신학입장을 강하게 변호하였다. 그것은 코부르크에 와 있던 루터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멜란히톤은 그가 작성한 신앙고백서를 변증하는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 변증서’를 1531년 5월 라틴어로 출판하였다. 독일어로는 그해 가을에 출판되었는데, 이 변증서는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에 대한 신학적인 해설서로서 신앙고백서보다 4배나 많은 분량이다.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제출할 때만 해도 로마 가톨릭과의 타협을 희망하였고 고백서 마지막 부분에서 이 점을 밝히고 있으나 이러한 희망이 좌절되자 변증서에서는 현실을 시인하고 프로테스탄트의 입장을 보다 분명히 천명하고 있다. 이를테면 신앙고백서에서는 침묵을 지켰으나 변증서에서는 교황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했고 7성례에 대해서도 강도 높은 비판을 가했다.
황제는 제국회의를 마감하면서 프로테스탄트들에게 항복을 요구하고 1531년 4월 15일까지를 시한으로 결단을 촉구하였다. 그렇지 않을 경우 무력행사를 불사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프로테스탄트들은 또 한 번의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만일 황제가 스페인 병력과 독일내의 로마 가톨릭을 지지하는 영주들의 군대를 동원한다면 프로테스탄트를 지지하는 영주들은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루터주의를 지지하는 영주들은 동맹을 맺지 않을 수 없었다. 루터는 이 문제에 대하여 오랫동안 고민하였다. 그러나 황제에 대항하여 정당방위로써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라고 결론짓고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하여 프로테스탄트 영주들은 소위 쉬말칼텐동맹(League of Schmalkald)을 체결하였다. 이번에도 정치적 변화는 루터파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미 1529년 9월 비엔나를 공격했던 터키군은 이전의 실패를 설복할 기회를 찾고 있었고 터키인들의 발칸 진입을 저지하는 일은 제국의 가장 긴박한 과제였다.
프랑스왕 프란소 1세도 다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처럼 강력한 대항세력에 적절히 대처하기 위해서는 프로테스탄트의 지원이 필요했으므로 황제는 1531년 7월 23일 뉘른베르크 평화회의(The Peace of Nürenberg)를 통해 프로테스탄트와의 ‘휴전’을 체결하였다. 그래서 아우그스부르크 제국회의에서의 황제의 시한부적 항복요구는 일단 유보되었고 그 대신 프로테스탄트들은 터키에 대항하여 황제를 지원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이제 루터주의는 새로운 정치적 변화 속에서 여러 지역으로 확장되어 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독일을 중심으로 하여 스칸디나비아 반도지역으로 확산되어 갔고 교회개혁을 통해 나타난 양대 교파의 하나인 루터파교회로 발전되어 갔다. 1517년 교회개혁이 시작된 후 30년간 개혁의 최전선에 서 있던 루터는 1546년 2월 18일 아이스레벤에서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8. 루터의 개혁운동과 문서의 역할
루터의 개혁운동에 관한 우리들의 긴 이야기를 마감하면서 인쇄매체가 개혁운동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던가를 정리해두고자 한다. 비록 루터는 그 시대를 이끌어간 사건들을 태동시킨 인물이지만 그 뒤를 이어 온 유럽을 격동시킨 힘들은 한 개인에 비할바 없는 강력한 것이었다. 그 중요한 매체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뒷받침된 문서의 역할이었다. 이 문서들을 통해 가장 짧은 기간 내에 가장 심오한 정신적 혁명을 가져올 수 있었다. 일반 대중들에게 대규모적으로 사상이나 정신을 전달하는데 있어서 문서는 중대한 역할을 하였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때가 차매…"(갈 4:4)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던 하나님께서는 개혁운동이 짧은 시간 안에 유럽 전역에 전파될 수 있는 외적 여건이 갖추어진 때에 루터를 보내시고 그를 통해 일하셨던 것이다. 1517년 95개조의 게시로부터 루터파가 정식으로 법적으로 인정을 받았던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평화회의까지 약 40년간은 신․구교간의 대립이 심각하였고, 이름 그대로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개혁정신은 문서를 통해 확산되었고 루터에게 유리한 여론이 형성되어 갔다.
구텐베르크(1394/99~1468)에 의한 활판 인쇄술의 풀현은 세계사의 여러 가지 발명중에 가장 획기적인 사건으로서 군사사(軍事史)에 있어서의 화약의 출현과도 비길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14, 15세기는 흔히 발견과 발명의 시대로 일컬어지고 있다. 지리상의 발견이 유럽인의 시야를 대서양 너무 미지의 대륙에까지 넓혀주었고 지적 세계의 끝없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면 인쇄물의 발명은 이 가능성을 실현토록 뒷받침해 주었다. 따라서 16세기에서부터 룻소에까지 이르는 스스로 갈등하며 자유로운 지성의 출현에 큰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독일 마인쯔시의 귀족 가문 출신의 금은세공(金銀細工) 기술자인 구텐베르크는 정치적 이유로 1440년경 스트라스부르크에 망명한 이후부터 인쇄에 종사하였다. 그리고 마인쯔로 돌아간 후에 1450년에는 수동식의 금속활자에 의한 인쇄기술의 발명에 성공하였다.
그가 자신의 인쇄소에서 최초로 출판한 활자본은 후일 「42행성서」(The 42-lines Bible)라고 불리게 된 성경본이었다. 이 책은 구텐베르크가 인쇄소를 시작한 1452년(혹은 53년)에 활자조립을 시작하여 1456년 8월 이전에 출판되었으므로 실로 4년이나 소요된 인쇄였다. 이때로부터 100년 사이에 활자본 인쇄술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그래서 개혁의 기운이 일어나고 있던 15세기 말경에는 독일에 52개소, 이탈리아에 약 80개소, 프랑스에 약 40개소, 네덜란드에 21개소,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에는 31개소의 인쇄소가 설치되었다. 전 유럽을 통해서는 300여 처에 1,000여 인쇄소가 세워져 있었다. 수도원에서는 1480년부터 이 신기술을 도입했다. 그래서 1500년경에는 이미 40,000종 이상의 서적들이 나돌고 있었으며, 총수량은 천만 권 이상에 달했던 것으로 추산된다. 우후죽순처럼 각 지역에 문을 연 인쇄소는 주로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운영되었고, 각종 고전, 교부 문서, 경건서적 등 종교, 신학관계 출판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였으며 사용된 언어는 거의 라틴어였다.
1500년 이후 교회개혁까지 한 인쇄업자가 연간 발행하던 서적 종류는 평균 40종에 달하고 있었지만, 일단 교회개혁의 물결이 밀어 닥치자 이 숫자는 무려 연간 500종으로 급증하였다고 한다. 이 사실은 루터의 개혁운동에 있어서 문서의 역할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의 발명은 슈펭글러가 정의했던 바처럼, "서적 및 독서문화의 시기가 유럽역사에 전개되게 하였고" 이 혁명적 도구가 개혁의 전파와 확산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 결과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내걸었던 95개조는 불과 한 달이 못되어 유럽 전역에 퍼져 나갔다. 루터는 더 이상 비텐베르그 대학의 무명의 교수일 수 없었다. 이젠 교황도 그를 "술주정뱅이 독일인이며, 술이 깨면 달라질 것이라."고 가볍게 보아 넘길 수 없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이 당시 문서들은 대개 8페이지나 16페이지. 혹은 32페이지 정도의 소책자들이었고, 가격도 저렴한 편이어서 그 당시 대중성 있는 판형이었다.
루터의 작품들은 대부분이 이런 소책자들이었고 또 그는 주로 독일어로 글을 썼다. 당시 인문주의자들은 라틴어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식자층의 언어였고 일반민중의 언어는 되지 못했다. 인문주의자들이 교양 있는 식자층에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면 개혁자들은 일반평민을 상대로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했던 점도 특이할 일이다. 1518년에 루터는 「면죄부와 은혜에 대한 설교」를 독일어로 썼는데 이것은 3년 만에 무려 23판까지 출판되었다.(Hans J. Hillerbrand, The World of Reformation, 1973, p.32). 이 후에 나온 루터의 대부분의 소책자들도(특히 독일어로 쓴 글들) 똑같은 인기를 누렸다. 그 당신 10판, 15판, 20판 등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어떤 통계에 의하면 1524년까지 약 100만부의 루터의 소책자가 배포되었다고 한다. 1518년부터 1522년 사이에 독일에서의 출판물의 성격이 크게 달라졌는데 세속적인 책들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종교가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교황대사 알레안더(Aleander)가 1521년에 남긴 글을 보면 "독일어와 라틴어로 된 루터의 소책자가 매일 쏟아지고 있습니다. 루터의 소책자 외에는 여기서 아무것도 팔리지 않습니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또 베아투스 레나누스가 쯔빙글리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서 "루터가 쓴 책들은 인쇄기에서 빠져 나오기가 무섭게 팔려 나갔다."라고 전하고 있다. 1519년 바젤의 인문주의자이며 출판업자였던 요하네스 프로벤(J. Froben)이 루터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가 나아있다.
우리는 내가 출판한 당신의 전집 600권을 프랑스와 스페인으로 발송했습니다. 이들은 파리에서 판매되어 소르본느에서 읽히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파비아(Pavia)의 서적 도매상 클라부스도 상당한 양을 이태리 전역에 팔기 위해 가져갔습니다. 영국과 브라방(Brabant) 지방에도 이들을 발송하였으며 현재 재고는 10권뿐입니다. 나는 이제까지 서적출판을 통해 이처럼 돈을 번 적이 없습니다.(Froben to Luther, February 14, 1519, in Martin Luthers Werke: Briefweehsel vol 1, Weimar, 1930, vol 1, p.332)
이와 같은 여러 자료들을 통해서 볼 때, 루터의 사상이 그 당시 상당한 공명을 얻었고, 문서를 통해 그의 개혁의지를 전파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520년에 루터는 「독일 크리스챤 귀족에게 보내는 편지」, 「교회의 바벨론 감금」, 「기독자의 자유」등 소위 종교개혁의 3대 작품을 발표했는데 이 세 작품은 종교개혁 정신이 표명된 중요한 작품이다. 이 루터의 글이 개혁운동에 끼친 영향은 대단한 것이었고 이 문서를 여러 도시에 공급하기 위해 세 개의 인쇄소가 동시에 책을 출판한 일도 있다. 수요가 공급에 훨씬 앞질렀기 때문이었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이해(1520)에 독일에서는 208종의 인쇄물이 나왔는데 그 중 133종이 루터의 작품이었다고 한다.
루터의 개혁운동 가운데 최대의 업적은 그의 성경번역임은 이미 말한바 있다. 그가 보름스 제국의회 이후 1521년 5월부터 발트부르크성에 은거하는 동안 헬라어 원문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일을 착수하였다. 그는 1521년 12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성경 제2판(1519년판)을 대본으로 번역하여 1522년 9월에 출판하였고 1536년까지 16회 수정판이 나왔고 계속해서 50판이 나왔다. 구약을 원어로부터 번역하는 작업은 그가 비텐베르크로 돌아온 후 친구의 도움을 얻어 1534년에 완성하였다. 루터의 성경번역은 종교개혁운동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독일어의 통일과 문화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루터의 성경번역을 영어를 포함한 기타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도록 자극을 주었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가 있다.
루터의 다양한 저술과 성경번역이 종교개혁에 준 영향은 문서의 역할과 중요성을 예증하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루터는 1517년 이후 1546년 사이에 약 400여 편의 논문을 썼는데, 이는 평균 한 달에 1편 이상씩을 집필한 셈이다.
보름스 제국의회 당시 제국의 황제였던 챨스 5세와 교황의 사절 알렉산더는 제국의회 책상 위에 놓인 모든 책들을 루터가 썼다는 사실을 의심할 정도였다. 루터의 문서들은 쮜리히를 비롯한 스위스 여러 지방에 전파되어 있었고, 그곳에서 이미 동조자들을 얻고 있었다. 화란에도 일찍이 루터의 문서들이 전해지고 읽혀졌다. 이곳에서는 재세례파나 칼빈파보다 훨씬 앞서서 루터의 글들이 소개되었는데. 당시 루터의 문서를 배포하거나 읽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안트윕에서 400부가 켄트에서는 300부가 불태워지기도 했다.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1519년에서 1522년 사이에 루터의 문서들이 밀반입되었고 이곳의 개혁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에서의 개혁운동의 지도자인 르페브로(Jacques Lefevre, 1455~1536)는 1530년에 불어로 서경을 번역했는데, 이것은 루터의 독일어 성경번역이 준 자극의 결과이기도 했다.
복음주의 운동은 종족과 언어를 초월하여, 노동자에서부터 영주들에 이르기까지 제국의 전 지역으로 확산되어 갔고 16세기 유럽의 역사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오고 있었다. 문서를 통한 전파가 이 혁명적 역사과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도구의 역할을 한 결과였다.
르네상스시대의 프랑스왕 루이 12세는 활판 인쇄술의 발명을 가리켜 "그것은 인간적이라 보다는 오히려 신적인 발명"이라고 감탄했는데, 루터는 "인쇄술이야말로 복음의 전파를 위해 하나님께서 내리신 최대의 선물"이라고 했다. 이것은 그의 개혁운동과정에서 얻은 생생한 체험으로부터 나온 확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