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칼빈의 후기활동
  1541년 칼빈이 제네바로 귀환한 이후 전개된 일련의 개혁운동은 많은 반대와 저항에 부딪치기도 했으나 1555년에는 엄격한 치리와 질서가 확립되어 명실상부한 개혁이 이루어졌고 제네바는 개혁과 개혁교회의 중심지로 변화되었다.

개혁파교회의 형성
제네바는 특히 그 지리적 위치 때문에 개혁운동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외적 요인들을 지니고 있었다. 인접해 있는 여러 나라에서 종교적 박해를 피해 온 피난민들이 모여들었고 복음적인 개혁신앙의 본거지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1540년부터 1564년까지 프랑스, 이탈리아, 화란 등지에서 거의 1천명이나 되는 이국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선택하여 제네바로 모여들었다. 스코틀랜드의 위대한 개혁자이자 그곳에 장로교회를 기초 놓았던 낙스(John Knox, 1513?~1572)도 이곳에 이주해 왔던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제네바는 유럽의 대지(大地)에 개혁의 빛을 전파하는 ‘영적인 모국’(Spiritual motherland)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독일에서의 루터의 개혁과 더불어 스위스의 취리히를 중심으로 한 쯔빙글리의 개혁운동, 그리고 제네바를 거점으로 한 칼빈의 개혁운동은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었으며, 상호연합을 위한 시도는 없었는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이지만 1529년 루터와 쯔빙글리 간의 신학적 토론이 있었고 상호연합을 위한 노력이 있었으나 성찬관의 차이 때문에 결렬되고 말았었다. 이보다 앞서 1526년에는 루터와 부쩌 등이 상호 장점들을 수용하는 ‘비텐베르크 연합’(Wittenberg Concord)에 합의한 일도 있다.
   여러 형태의 연합을 위한 시도가 있었으나 독일의 개혁운동과 스위스의 개혁운동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어 저들의 연합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루터와 쯔빙글리 간의 연합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결국 루터를 중심으로 한 개혁운동은 점차 루터파(Lutheran)라고 불리는 별도의 복음주의 신학운동으로 발전되어 갔다. 그러나 쯔빙글리의 개혁운동과 칼빈의 개혁운동은 보다 긴밀한 협조와 연합을 시도하게 되었다. 비록 쯔빙글리는 세상을 떠난 후였으나 그 후예들은 칼빈과 함께 1549년 ‘취리히 협정’(Zürich Consensus, Consensus Tigurinus)을 체결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협정에 따라 칼빈의 개혁과 쯔빙글리파의 개혁운동은 긴밀한 협력을 이루어갔고 ‘취리히 협정’을 따르는 이들은 ‘루터란’(Lutheran)이라는 칭호에 대조되는 ‘개혁파’(Reformed)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교회 연합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던 칼빈의 역할과 영향이 컸다.
   사실 칼빈은 루터파와도 연합을 시도한 일이 있었다. 즉 데오도 베자와 기욤 파렐의 중재로 대화를 시도했으나 성찬문제로 합의를 보지 못했다. 칼빈은 성찬론에 있어서 루터와 쯔빙글리의 중간 입장을 취했던 마틴 부쩌를 따랐으므로 루터파의 연합도 불가능한 시도라고는 보지 않았다. 그러나 루터파와의 연합을 위한 노력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루터의 후예들은 보다 관용적이지 못했다.
   1555년 루터란이였던 요아킴 베스트팔(Joachim Westphal)은 칼빈을 비난하는 논문을 출판하고 루터파의 지역인 독일 북부 지방에서의 개혁파의 진출에 불만을 토로하였다. 그리고 자신이야말로 성찬에 관한 루터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멜랑히톤에게도 칼빈을 비판하라고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결국 루터파와 그 추종자들은 취리히 합의서를 받아들인 인사들과 소원해지고, 전자는 루터파로 후자는 개혁파로 발전하여 복음주의 계열의 양대 지류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어떻든 칼빈의 개혁활동은 거듭된 반대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제네바시는 개혁의 본거지가 되었다. 존 낙스는 제네바에 대해 말하기를 칼빈은 ‘사도시대 이래 지상에 결코 있어 본 일이 없는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의 학교’를 만들었다고 평가하였다.

제네바 아카데미의 설립
칼빈의 개혁활동에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제네바 아카데미(Geneva Academy)라는 교육기관의 설립이다. 물론 제네바는 종교개혁이 시작되면서부터 공적인 교육기관을 갖고 있었다. 1536년에는 파렐에 의해 중등학교(college)가 설립되었는데 칼빈은 이 학교에 대학교육과정을 설치하려는 계획을 한 일도 있었다.
   칼빈은 ‘미래의 씨를 육성할 필요성’을 느끼고 1541년부터 교육기관 설립을 준비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동안 개혁운동에 대한 여러 반대자들과의 투쟁 때문에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다가 1559년에 와서 구체화할 수 있게 되었다. 즉 1559년 5월에 소의회에 대학설립 허가를 얻고 6월 2일 정식 개교하게 된 것이다. 처음 개교할 당시 이 학교의 공식 명칭은 Leges Academiae Genevensis였는데 첫 입학생은 162명이었다. 이 당시 제네바와 인접해 있는 도신인 베른시 당국과 그 곳의 로잔 아카데미 교수들 사이에 벌어진 갈등 때문에 몇몇 교수가 해임되고 제네바로 이주해 오자 칼빈은 이들의 협조를 얻어 ‘제네바 아카데미’를 설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학장 겸 희랍어 교수로는 데오도 베자(Theodore Beza, 1519-1605)가 임명되었다. 칼빈의 친척이기도 했던 베자는 후일 칼빈을 계승하여 제네바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고 최초로 칼빈의 전기를 썼던 인물이었다.
   제네바 아카데미는 분명한 교육이념, 잘 짜여진 교육목표, 우수한 교수진 등으로 유럽에서 명성을 얻었고 곧 영향력에 있어서는 독일 루터파 신학의 이념적 중심지였던 비텐베르크대학을 능가하게 되었다. 설립된 지 5년 후에는 약 300명의 학생이 등록하였고 이 아카데미의 부속기관이었던 신학예비과정(Collége)에는 1천명 이상이 적을 두고 있었다. 아직도 신학은 ‘모든 학문의 여왕’(regina scientiarum)이었으므로 다른 학문들은 신학을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제네바 아카데미에서는 성경언어와 철학, 변증학, 신학 등이 교수되었고, 아카데미의 예비과정에서는 고전어와 고전(古典), 논리학 등 교양과정이 주로 교수되었다.
   이 제네바 아카데미는 수많은 설교자와 교수, 교사들의 양성소가 되었고 유럽 전역에 개혁신앙을 보급하는 근원지가 되었다. 이 학교에서 수학한 젊은이들이 각기 본국으로 돌아가 개혁신앙을 유지, 계승,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므로 제네바 아카데미가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우르시누스(Zacharius Ursinus)와 함께 1562년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Heidelberg Catechism)을 작성했던 카스퍼 올리비아누스(Casper Olivianus)도 이때 제네바에서 수학한 학생이었다. 사실 칼빈이 제네바 아카데미를 설립한 후 구라파의 여러 교회에 보낸 편지, “당신들은 통나무를 보내주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불붙는 장작을 만들어 보내드리겠습니다”는 말은 진실이었다. 그의 말처럼 유럽 각국으로부터 몰려온 젊은이들은 개혁신앙에 불타는 열정과 확신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후기의 집필활동
칼빈이 교회개혁의 과업을 거의 이루고 제네바에 소위 신정정치(神政政治, Theocracy)1)가 확립되었지만  칼빈에게 있어서 휴식이란 낯선 사치였다.
   그는 그의 사역 말기에 해당하는 1550년대 말에도 휴식을 모르는 왕성한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정기적인 설교와 강의, 교수와 집필, 상담과 면담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현재 출판된 60여권의 칼빈전집(
Calvini Opera Omria)만 보더라도 그의 저술과 집필활동이 얼마나 방대하며 광범위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집필 중 성경주석과 「기독교 강요」의 증보는 대표적인 집필 작업이었는데 1540년 「로마서 주석」을 출간한 이후 주석집필은 계속되었다. 구약주석으로는 1551년 「이사야서 주석」, 1557년 「시편」과 「호세아서 주석」, 1559년 「이사야서 주석」및「소선지서 주석」, 1561년 「다니엘서 주석」, 1563년 모세오경, 예레미야, 애가서 주석이 출간되었고 「여호수아 주석은 칼빈의 마지막 주석 집필로 임종 직전까지 쓰여졌다.
   이와 같은 주석집필은 칼빈의 교의학적 관심뿐만 아니라 주석학적 관심을 반영해 주고 있다. 구약주석 집필과 겸하여 칼빈은 1559년 「기독교 강요」 결정판을 출간하였다. 「기독교 강요」는 1536년 초판이 발간된 이래 계속 증보해 오다가 드디어 최종판을 내게 된 것이다. 칼빈은 극도로 쇠약한 상태에 있었으나 「기독교 강요」를 증보하는 일에 열정을 쏟았고 드디어는 사도신경의 구조를 따른 전 4책 80장으로 된 「기독교 강요」를 출판하게 된 것이다.


칼빈의 죽음
칼빈에게 있어서 건강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힘겨운 도전자였다. 그는 건강이 좋지 못했고 병약했으며 금식과 산적한 업무 때문에 더욱 쇠약해졌다. 그는 밤에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했고 부관된 업무 때문에 세 끼의 식사를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혹자는 병약한 그를 가리켜 “이동하는 종합병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주변의 여러 사람들로부터 휴식을 취하도록 요청받기도 했으나, 칼빈은 “당신은 주께서 나를 게으르다고 책망하시기를 원하는가?”고 반문할 따름이었다. 꼭 참석해야 했으나 건강이 여의치 못한 경우에는 들것에 실린 채 모임에 참여한 일도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비록 건강이 좋지 못했으나 1563년 초까지는 정상적으로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점차 건강은 악화되었고 기력은 쇠약해 갔다. 그가 친구 비레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1542년 곧 그의 나이 33세 때 벌써 시력이 약화되고 있다는 언급이 있고, 말년에는 두통과 위장병이 심했고 무엇보다도 폐가 좋지 못하여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1564년 그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고 그해 2월 6일에는 성 베드로성당에서 마지막 설교를 하였다. 그리고는 임종시까지 상한 몸을 가누며 여호수아서 주석을 집필하는데 마지막 정열을 쏟았다.
   그해 4월 25일에는 이 땅에서의 날이 길지 않음을 예견하면서 유언을 남겼고 5월에는 오랜 개혁운동의 동료이자 칼빈의 생애에 커다란 전환점을 가져왔던 파렐에게 편지를 썼는데, 5월 2일자로 된 이 편지는 칼빈의 마지막 편지가 되었다. 이 편지에서 칼빈은 파렐에게 마지막 날들을 함께 보내자고 부탁하였다.
   칼빈은 이 땅에서 55년의 생애를 마감하고 1564년 5월 27일 베자의 품 안에서 운명하였다. 이 날은 토요일이었다. 그는 55년간 입고 있던 육체의 겉옷을 벗고 약속의 땅에 들어간 것이다. 그는 임종시까지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었고 시편 39편 9절,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옴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연고니라”는 말씀을 암송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이튿날 그의 장례식은 검소하게 치러졌고 그의 시신은 제네바 시내에 있는 플랭 팔리에(Plain Palasis) 묘지에 안장되었다. 어떤 비문이나 묘표도 없이 평범하게 묻혔다. 이것은 칼빈의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하여 모세의 경우처럼 “오늘날까지 아무도 그의 무덤을 아는 자가 없도록”하였다. 사람이 무슨 자랑할 만한 것이 있다고 무덤에까지 업적을 새겨 두겠는가? 단지 높임 받아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니신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Soli Deo gloria). 이것은 칼빈의 생의 목표이자, 그의 생애를 이끌어간 삶의 철학이었다.
   그렇다면 칼빈의 무덤이며 칼빈의 묘표라는 J. C.가 새겨진 무덤은 무엇인가? 저명한 칼빈 연구가인 두메르고에 의하면 그것은 가짜일 뿐, 관광업자들이 관광수입을 올리기 위해 만든 가묘(假墓)일 따름이라고 했다. 칼빈의 임종을 지켜본 베자는 그가 쓴 칼빈 전기에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나는 칼빈의 생활을 16년간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는 더 이상 첨가할 수도, 더 이상 감할 수도 없는 참된 그리스도인이었다”고. 그리고 칼빈의 죽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겨두고 있다. “해가 지는 그날, 지상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인도하던 가장 큰 빛이 하늘로 돌아가고 말았다.” 존 칼빈, 그는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일했던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a minster of the word of God)였다.





1) 미국 칼빈대학 교수였던 존 브랏(John Bratt)은 ‘신정정치’라는 표현이 칼빈의 제네바 개혁운동이 이룬 결과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 될 수 없다며 ‘성경적 통치’(Biblio-cracy)라고 명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