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튜더(Mary Tudor) 치하에서의 영국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암울한 시기였고 어떤 시대와도 비교할 수 없는 처절한 순교로 점철된 시기였다. 우리는 이 시대의 특징과 성격, 교회적 상황, 특히 메리의 종교정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통치자였던 메리의 주변을 살펴보는 것이 효과적이다.
메리의 로마교에로의 복귀운동
메리는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캐더린(Catherine of Aragon) 사이에 난 여자로서 열렬한 가톨릭교도였고 평생 동안 이 신앙을 수호하였다. 이것은 그의 개인적 확신이자 정치적 요구이기도 했다. 영국에서의 개혁의 시작, 곧 헨리 8세가 수장령을 발표하고 케더린과의 결혼을 무효화시킨 것은 메리의 왕위 계승권자로서의 지위를 박탈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를 사생아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자신의 왕위계승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수장령’을 발표하기 이전의 상태, 곧 가톨릭에로의 회복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왕위계승권 자체가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메리는 그의 통치를 통해 철저하게 가톨릭에의 복귀운동을 전개하였고 이 운동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잔인할 정도로 탄압, 처형시켰다. 그녀는 스페인의 혈통을 지닌 여인이었고 철저하게 스페인이기를 원했다. 스페인은 당시 최고의 가톨릭 국가로서 그녀의 개신교 박멸운동을 지원, 후원하였다. 1534년 그의 아버지 헨리가 어머니 케더린과의 결혼을 무효화시켰으므로 사생아로 전락했던 메리는 20여 년의 세월동안 인생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다가 이제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므로 그녀의 통치는 원한에 대한 복수와 무관할 수 없었다. 바로 이런 메리의 삶의 환경 때문에 그녀의 통치는 처음부터 반(反) 개신교적이었고 원한의 날들에 대한 복수 심리로 인해 그녀의 통치는 처음부터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메리는 1553년 8월 3일 런던에 입성하였다. 이제 그는 헨리8세(1509~1547), 에드워드 6세(1547~1553)에 이어 영국 왕이 되었고, 5여년 간의 통치(1553~1558)를 시작한 것이다. 당신 영국 국민들 중 일부는 헨리 8세 이전 시대의 국교적 가톨릭에로의 복귀를 희망하고 있었으나 로마에 대한 증오심도 품고 있었다. 교회재산을 취득한 부유한 계급의 사람들은 가톨릭에로의 복귀가 재산상의 손실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이를 두려워 하였고, 결혼한(대처, 帶妻) 성직자들은 성직과 처자, 양자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도록 요구하게 될 가톨릭에로의 복귀를 염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메리는 상충되는 요구와 국민적 정서를 조정하고 합리적으로 해결할 만큼 타협적이지 못했다. 메리는 협상보다는 강압을 선택하였다. 사생아로 전락하여 고통 속에 살아왔던 지난날들 동안 가톨릭 신앙은 유일한 위안이었으므로 이제 그녀는 자신의 권력으로 가톨릭교회에 보상해 주고자 시도하였다.
메리는 영어 예배를 중지시키고 라틴 미사를 부활시키며 결혼한 성직자를 추방하는 일로 로마에로의 복귀를 시작하였다. 그녀의 이복동생 엘리자베스는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면서 “진정한 종교(가톨릭을 의미함)로써 국민을 선도해 달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로마 교황청에로의 돌연한 복귀는 국민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었기에 메리의 사촌인 당시 황제 찰스 5세조차도 조심스럽게 일을 추진하고 백성들의 칭송을 얻도록 힘쓰라고 충고할 정도였다. 특히 그녀의 결혼 문제는 국민감정을 완전히 이탈하게 하였다.
메리의 결혼
그녀는 스페인의 필립(후에 필립 2세, Philip Ⅱ)과 결혼하기를 원했다. 영국 의회는 외국 국왕의 영향을 두려워 한 나머지 메리에게 영국인과 결혼하도록 정중하게 요망했으나 36세의 노처녀인 메리는 미남인 스페인 왕자 필립의 초상화를 보자마자 열렬한 사랑을 느끼게 되었고 그 결혼 계획은 은밀히 추진되었다. 필립과 결혼만 하게 되면 스페인 왕녀로서의 긍지와 로마 가톨릭의 신앙, 그리고 노처녀의 강렬하고도 만족을 몰랐던 모든 욕망이 충족될 것이다. 그래서 영국 하원의 진언조차도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로마와 단절한지 얼마 되지 않는 약세의 영국이 전통적인 가톨릭이며 막강한 군대를 지닌 스페인 왕자와 혼인을 통해 통합을 하게 되면 영국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비록 필립은 영국의 법률을 존중하고 메리가 사망할 경우 왕위계승권이 없음을 규정화하였고, 또 필립은 프랑스와의 전쟁에 영국을 끌어넣지 않겠다고 결혼협정문에서 약속했으나 애정에 사로잡힌 여자에게 과연 이와 갚은 약속들이 지켜질지 의문이었다.
스페인 인에 대한 적개심은 영국인의 불만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일부 주군에서는 폭동이 일어났고 웨일즈(Wales), 데본셔(Devonshire), 그리고 미들랜드(Middleland)에서느 봉기가 일어났다. 켄트(Kent)에서는 토마스 와이어트 경(Sir Thomas Wyatt)이 주도하는 반란군이 런던으로 진격했으나 곧 진압되었고 이들은 12명씩 교수형에 처해졌다. 신하들의 저항과 국민들의 반대에도 아랑곳없이 메리는 1554년 7월 필립과 결혼하였다. 이런 일들은 메리를 더욱 공토의 여인으로 이끌어 갔다.
로마 가톨릭으로의 회복운동은 단계적으로 추진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영국의회에서는 가톨릭에로의 회복을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1553년 10월에서 12월까지의 회기 기간 동안 에드워드 6세 때 제정된 법률을 폐기하기에 앞서 격렬한 논쟁이 전개되었으나, 후일 이 법령들은 폐기되었고 1554년 4월과 5월의 두 번째 의회에서는 메리의 필립과의 결혼이 승인되었다. 그리고 그해 11월 24일에는 교황사절인 추기경 레지널드 폴(Reginald Pole, 1500~1558)이 영국에 당도하였다. 이 때 그는 영국의회의 로마와의 재결합을 위한 청원을 받고 11월 30일 영국을 사면(赦免)함으로써 영국은 교황에 대한 충성을 다시 서약하였다. 영국에서 로마의 권위가 인정되자 수도원 해산 법령을 제외한 모든(교회)개혁 입법이 폐기되었고, 동시에 1555년에는 반(反)이단 법률이 부활되었다. 성자(聖者)들을 위한 축일이 부활되었고 결혼한 성직자들은 아내를 버리도록 요구되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1529년 이전의 위치로 복귀하였다.
개혁자들에 대한 탄압
이제 교회개혁자들에 대한 탄압은 명약관화한 사실이었다. 투옥되거나 유배, 망명의 길을 떠난 인사들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었다. 이중 8백 명이 넘는 사람들은 취리히, 바젤, 스트라스부르크 등지에 정착하였다. 이들은 후일 영국과 웨일즈, 스코틀랜드의 개신교 역사에 크게 기여하였다. 메리 치하에서 276명이 처형되었다. 바로 이런 종류의 탄압들 때문에 그녀는 ‘피의 메리’(bloody Mary)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여기서 이 당시의 몇 사람의 순교자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반 이단 법률, 즉 이단 단속령이 부활된 것은 1555년 1월 20일이었다. 2일 후에 조사위원회가 심의를 개시하여 2월 3일 성경 번역자인 존 로저스(John Rogers)가 최초로 스미드 필드(Smith field)에서 화형을 당했다. 틴데일과 커버데일이 번역한 성경을 편찬했던 존 로저스의 처형에 이어 복음적 신앙을 가졌던 네 명의 주교들, 곧 후퍼(Hooper), 페라(Ferra), 라티머(Latimer) 그리고 리들리(Ridley)가 화형대에 올랐다.
존 후퍼(Joh Hooper)는 자신이 시무하는 당 밖에서 화형을 당했는데 그가 처형당하기 전 그를 방문한 사람이 ‘살아있는 것은 즐겁고 죽음은 두려운 것’임을 깊이 생각하라고 충고하였다. 그러나 그는 “죽음이 두렵고 살아있는 것은 좋다는 점은 아는 바이지만 내세(來世)의 죽음은 훨씬 더 두려우며 내세의 생명은 훨씬 더 좋은 것이다. 나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을 지니고 있으며…하나님의 진리를 거부하기 보다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내 앞에 놓여 있는 불타는 고통을 잘 이겨 내기를 바랄 뿐이오.”라고 대답하고 순교자의 길을 갔다.
워체스터와 글로체스터의 주교였던 라티머(Latimer)는 위대한 프로테스탄트 설교자였는데 옥스퍼드에서 리들리와 함께 순교 당했다. 그는 신조만 버리면 목숨을 구할 수 있었지만 처형에 앞서 있었던 토론석상에서 복음서에서는 그 어느 부분에서도 미사를 거행하라는 구절을 찾아 볼 수 없다고 대답하고 가톨릭적 미사의 부당성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사형집행인이 쇠상슬로 몸을 묶을 때, 동료인 리들리에게 “리들리 박사, 마음을 놓으시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영원히 꺼지지 않는 촛불을 영국 땅에 켜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알려져 있다. 리들리(Nicholas Ridley)는 런던의 주교였는데, 그 역시 복음주의적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으므로 순교자의 길을 갔다. 호주 멜보른에는 그를 기념하는 대한인 리들리 대학(Ridley College)이 설립되었는데 호주의 복음주의적인 성공회 신학교육 기관으로 그 이름을 떨치고 있다.
이 당시 순교자들 중에서 크랜머의 이야기는 매우 감동적인데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 모습을 크랜머의 생애에서 읽을 수 있다. 크랜머는 켄터버리 대주교였으므로 그의 문제는 로마에까지 이첩되었는데 로마에서는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그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태우기도 했다. 크랜머는 온유한 사람이었고 권력 앞에 유약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여러 번 방황하며 거듭된 번민과 무려 여섯 차례의 심경의 변화를 통해 개신교와 가톨릭 신앙을 왕래하기도 했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너무도 인간적이었다. 메리는 개혁파의 우두머리 격인 크랜머를 회유, 탄압하므로 패배감을 안겨 주려고 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자기의 동지였던 두 사람의 감독, 곧 라티머와 리들리의 화형 모습을 강제로 지켜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결국 그는 개혁 신앙을 버리겠다는 문서에 서명하였다. 혹자는 이 크랜머의 서명이 화형의 공토 때문이 아니라 모든 신앙에 앞서 국왕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소위 에라스티안주의(Erastianism)에 충실하였기 때문이었다고 변명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크랜머의 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가 서면으로 이전의 신앙을 철회했지만 그의 사형은 피할 수 없었다. 그는 과거 헨리 8세와 케더린의 결혼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주역을 담당하였으므로 메리의 원한과 적의를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크랜머는 그의 신앙문제와 관계없이 처형은 예견된 일이었다. 크랜머는 처형 직전에도 공개적으로 개신교 신앙을 버린다는 문서에 서명하도록 요구받았다. 대주교는 화형 준비가 된 성 메리 교회당으로 끌려갔다. 그를 향한 일장 설교가 행해진 후 자기 입장을 철회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로마교회를 떠난 것을 회개하고 참회할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전의 개신교 신앙을 철회했던 사실 자체를 취해 버림으로써 보는 이들을 경악케 하였다. 그는 자신의 옛(프로테스탄트) 신앙을 재확인하는 선언을 하였으며 자기의 진심과는 달리 잘못된 사실을 서명했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내 손이 먼저 벌을 받아야 하므로 나의 손부터 태워야 할 것이다.”고 했다. 그리고 교황은 거짓 교리와 더불어 적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원수라고 단언하였다.
…이러한 취소 성명은 내 마음 속에 진정으로 믿고 있는 진리와는 다른 것으로서 단지 죽음의 공포 때문에 생명을 구하기 위해 쓰여 진 것입니다 …. 내가 진심으로 신봉하고 있는 것과는 반대되는 사실들에 서명해야만 했던 나의 손이 먼저 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불길 속으로 들어갈 때 이 손들을 먼저 태워야 할 것입니다. 나는 또한 그리스도의 대적이자 적그리스도인 교황을 그의 모든 거짓된 가르침들과 함께 거부하는 것입니다.
토마스 크랜머의 이 용기 있는 행동은 그 이전의 그의 실수들을 잊게 하는데 충분하였다. 그는 실제로 타는 불길 속에 자기의 손을 먼저 집어넣고 오른손이 먼저 불타게 했다.
박해는 고위 성직자들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많은 평신도들도 순교했고 그 중에는 다수의 여성들이 있었다. 메리 치하에서 최후로 순교한 사람은 1558년 11월 10일 켄터베리에서 순교한 4명의 남자와 1명의 여자였다. 이 기간 곧 1555년 2월부터 1558년 11월까지 약 4년간 276명이 화형을 당했다. 이 중 절대 다수인 80% 이상이 런던(112명), 켄터버리(49명), 치체스터(41명), 놀위치(31명) 등 네 곳에서 처형당했다. 이 점은 이들 네 지역에서 복음주의적 세력이 강했음을 보여주는 실 예이기도 하다. 처형이 너무 참혹하여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이 화약봉지를 그 순교자의 목에 걸어주기도 했고. 사형집행인조차 너무 고통스러워 못 본 채 눈길을 돌렸다고 한다. 이 당시의 희생자에 대한 행적은 유명한 신교 작가인 죤 폭스(John Foxe, 1516~1587)의 「순교자 열전」(Book of Martyrs)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오랫동안 성경과 함께 복음적인 신앙인들의 가장 소중한 책으로 영국 가정에 비치되었고 용기 있는 저항의 정신적 힘을 제공하였다. 특히 이 책은 1559년에서 1570년 사이에 저자의 손을 거쳐 영국교회 개혁의 본격적인 변증서로 변모되었다. 이 책에는 영구의 메리치하에서의 박해와 처형에 대한 사실 그대로를 기술하였고 저자의 문학적 재질과 더불어 진한 감동을 주고 있다.
메리는 1558년 11월 17일 아무도 돌보지 않던 죽음의 병상에서 사망하였다. 이로써 그 잔인한 박해도 역사의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메리의 죽음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모닥불을 지펴서 그녀의 죽음을 경축하였다. 결국 개신교를 질식시키려는 그녀의 분노에 찬 탄압은 실패로 돌아갔다. 한 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메리의 그 극심한 탄압에 직접적으로 저항할 수 없었던 신교도들은 개에게 ‘메리’라는 이름을 주었다. 이 경멸적인 견명(犬名)이 신앙의 자유를 따라 영국을 떠났던 순례자들을 통해 미국으로 전래되었고 후일 선교사를 거쳐 우리에게 소개되었던 것이다. 과거에 우리가 강아지를 ‘메리’라고 불렀던 것은 이런 고난의 역사를 지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