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487주년 특집-개혁 교회의 큰 샘, 네덜란드 / 세계 개혁주의 중심축 되다
종교개혁 이전부터 큰 영향…독립과정 통해 칼빈주의 신학 확립에 공헌
2004년 10월 19일 (화) 12:00:00 김은홍
<글 싣는 순서>
? 칼빈주의 신학 확립 - 네덜란드 개혁교회
② 개혁신학 세계화의 견인차 - 캄펜 신학대학교
③ 칼빈주의자가 바라보는 한국 통일

한국에는 히딩크 감독의 나라로 익숙한 네덜란드, 이 나라의 14세기 한자동맹 도시에 가면 두 손으로 성경책을 가슴에 끌어안은 채 묵묵히 앞을 응시하고 있는 한 인물이 있다. 캄펜신학대학교 도서관 뜰에 서있는 그 주인공은 바로 칼빈이다. 캄펜신학대학교와 칼빈! 이 둘의 긴밀한 결합은, 이 대학교의 정체성과 사명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데, 그것은 바로 칼빈에서 기원된 개혁사상과 그것의 전파이다. 이점은 이 대학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수여하는 위원회의 공식 명칭이 ‘요한네스 칼빈 아카데미’(De Johannes Calvijn Academie)라는 점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이 캄펜 신학대학교는 2004년 올해로 개교 150주년을 맞았다. 유럽에 있는 대학으로서는 일견 역사가 젊어 보이는데, 그 이유는 이 대학의 정체성이 ‘네덜란드개혁교회의 신학교’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 ‘교회를 위한 신학’을 지향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개혁주의 신학자와 전문적인 목회자를 배출하기 위한 ‘신학 대학’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대학은 종합대학 안에 존재하는 여러 분과 중에 하나인 ‘신학과’와는 선명한 차별성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캄펜신학대학교의 역사적 의미와 학문적 역할은, 곧 네덜란드개혁교회의 그것을 의미한다.
지난 9월 1일부터 4일까지, 개교 150주년을 기념해서 전 세계 약 14개국에서 130-150여명의 신학자들이 캄펜에 모여 국제 컨퍼런스를 열었다.
이 캄펜신학대학교에 대한 개괄적인 안내는 한국에도 여러 글들을 통해 잘 소개되어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한명의 역사 신학자의 관점에서 네덜란드개혁교회의 신학교인 캄펜신학대학교의 사상적 근원에 대해서 많은 지면을 할애할 것이며, 150주년 컨퍼런스를 개최하는 그 역사적 의미와, 필자가 이 컨퍼런스에서 담당한 한 강의를 진술하려고 한다. 개혁주의와 칼빈주의를 지향하는 유수한 신학교들이 세계 안에 존재하고 있거니와, 이 글에서는 세계 개혁주의의 중심축 중의 하나인 네덜란드 캄펜신학대학교와 그 어머니 교회가 되는 네덜란드 개혁교회로 범위를 제한하고자 하는 것이다.

네덜란드개혁교회의 사상적 기원
캄펜신학대학교는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신학교이기 때문에,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역사와 성격을 그대로 담아내는 그릇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캄펜신학대학교의 사상적 기원은 네덜란드의 교회개혁운동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14세기 공동생활형제단으로 잡는 것이 좋을 것이다.
네덜란드는 종교개혁 이전에 이미 종교개혁에 깊이 영향을 준 개혁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중세 말인 14세기와 15세기에, 그리스도인의 내면의 개혁을 통한 교회 및 사회 개혁과 ‘세계 내 경건’을 주창했던 ‘새로운 경건’(Devotio Moderna) 운동이 조직화된 공동생활형제단의 운동이 네덜란드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영적 운동은, 그리스도에 헌신하는 삶과 교육을 강조했다. 이런 종교적 풍토 속에서, 어거스틴적 영성과 버나드적이고 프란시스칸적인 영성을 16세기 종교개혁에 전달해준 토마스 아 켐피스(1380-1471)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진다. 그는 19세에, 캄펜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쯔볼레(Zwolle)에 세워진 아그네스템베르크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가, 평생을 ‘그리스도를 본받아’(De Imitatione Christi)와 같은 고전을 저술하면서, 칼빈의 종교개혁과 네덜란드 교회 개혁운동의 깊은 토대를 놓았다.
네덜란드인 에라스무스(Erasmus: 1469-1536)도, 이 공동생활형제단에서 교육을 받은 후, 성경적 경건과,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영적이고 도덕적인 개혁 사상을 형성했으며, 칼빈의 개혁사상의 길을 예비했던 것이다.
칼빈과 네덜란드의 깊은 관계는, 일차적으로는 그의 가족적인 환경과 친구관계를 통해서 잘 드러난다. 그의 어머니 잔 프랑(Jeanne Franc)과 아내 이들렛트 드 부르(Idelette De Bure)는 모두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당시의 네덜란드였던 캄브라이(Cambrai)와 리에주(Liege) 출신이었다. 칼빈의 고향 노용(Noyon) 또한 당시의 네덜란드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따라서 칼빈은 개인적으로 네덜란드를 어머니의 나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칼빈은 네달란드 개혁주의자들에게 매우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통해서 네덜란드에 개혁신학이 전파되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이다. 칼빈의 ‘기독교강요’ 최종판(1559년)이 이미 1560년에 네덜란드어로 번역되어 크게 영향을 준 것을 보면 칼빈과 네덜란드 개혁주의와의 관련성이 얼마나 깊은지를 잘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칼빈은 네덜란드에 몇 차례 논문을 발송했는데, 특히 1543년에 보내진 논문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 내면에서 개혁주의를 받아들일 뿐 아니라, 외적으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역설한 것이었고, 이것은 바로 네덜란드 칼빈주의자들의 적극적인 개혁신앙을 위한 청사진을 제시한 것이었다.

칼빈주의와 네덜란드 독립운동
16세기 후반에 신성로마의 황제였던 스페인의 필립 2세의 절대주의적인 스페인화와 가톨릭화 정책에 대항해서, 네덜란드의 칼빈주의자들은 1565년에 헤이즌(Geuzen)동맹을 결성하여 맹렬한 독립전쟁을 전개한다. 당시의 네덜란드에서 독립운동을 강력하게 추진한다는 것은, 투철한 칼빈주의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독립 직후, 칼빈주의자들 내부에서 예정론 논쟁이 발생했고, 이 아르미니우스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최초의 칼빈주의 세계 대회인 도르트레크트 총회(1618-1619)가 네덜란드에서 열리게 되었다. 그 결과 영문 약자를 따서 튤립(Tulip)이라고 알려진 칼빈주의 5대 교리가 확립되었다. 이 교리는, 전적타락, 무조전적 선택, 제한 속제, 불가항력적 은혜, 그리고 성도의 견인으로서, 매우 핵심적인 칼빈주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네덜란드의 개혁주의 교회는 네덜란드의 독립 과정을 통해서 칼빈주의 신학 확립에 공헌했던 것이다.
글=안인섭 박사

'안인섭 박사'
고려대학교 사학과와 총신신대원을 졸업하고 네덜란드 캄펜신학대학교에서 ‘어거스틴과 칼빈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 비교’로 교회사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총회신학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