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아시아 칼빈학회 주요논문- ① 안인섭 박사 = 칼빈의 ‘하나님의 나라’]
칼빈 ‘지상왕국의 종말’ 확인
2007년 09월 11일 (화) 10:08:33 기독신문 ekd@kidok.com

다니엘서 ‘신상의 꿈’ 주석 통해 하나님 나라 섭리 통찰

2007년 8월,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제10회 아시아 칼빈학회에서는 모두 8편의 논문이 발표됐다. 이 논문들 가운데 몇 편을 한국칼빈학회 총무 안인섭 교수(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 역사신학)의 도움을 받아 소개한다. 다음에는 일본 타카시 요시다 목사의 ‘칼빈의 영혼불면론에 나타난 행복에 대한 비전’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칼빈은 1561년에 그의 다니엘서 주석을 프랑스 지역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헌정했다. 그 헌정사를 보면 칼빈이 프랑스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 개혁주의자들을 얼마나 간절하게 격려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다. 칼빈이 프랑스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기를 원했다면, 과연 그는 어떤 의미의 하나님의 나라를 뜻하고 있었을까? 이 칼빈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신학은 오늘날 국가 권력과의 복잡한 관계 속에 놓여있는 현대 개혁주의 교회에 매우 유익한 통찰을 줄 것이다.

19세기에 처음 전래된 칼빈의 사상은, 20세기의 다양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아시아 기독교의 정체성 형성에 큰 공헌을 이룩했다. 따라서 칼빈은 한국을 비롯한 21세기 아시아 교회의 발전을 위한 가장 훌륭한 안내자라고 말할 수 있다.

16세기 초에 프랑스는 유럽 안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으로 부상했다. 프랑스는 독일과 비교할 때 잘 통합된 하나의 국가였을 뿐 아니라, 스위스와 비교한다면 강력한 군주제 국가였다.

프란시스 1세, 그리고 그의 아들 헨리 치하에서 수많은 개신교 신자들이 화형에 처해졌는데, 이것이 합법화 될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 군주들이 한 법, 한 신앙, 그리고 한 군주라는 원칙에 따라, 오직 가톨릭교회만 프랑스 안에서 허락될 수 있다고 강변했기 때문이다.

프란시스 1세는 이처럼 자국 프랑스에서는 개신교주의자들을 박해했으면서도, 교황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칼 5세와 맞서기 위해서는, 대외적으로는 개신교를 후원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칼빈은 종교개혁주의자들은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는 시민들임을 천명하면서 1536년에 출판된 기독교강요를 프란시스 1세에게 헌정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16세기 프랑스 왕들의 종교적인 정책은 이 지역의 개신교도들의 삶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런 국가의 정책에 대해서, 프랑스의 칼빈주의자들이 택할 수 있는 방향은 세 가지였는데, 첫째 그들은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거나, 둘째 순교하거나 아니면 셋째 프랑스를 떠나는 난민이 되어야 했다. 칼빈의 경우는 결국 셋째 카테고리에 속한다.

한편, 칼빈의 하나님의 나라 사상과 관련하여 제네바의 상황을 고찰하는 것이 또한 필요하다. 프랑스의 칼빈주의자들은 정부로부터 어떤 도움도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가혹한 박해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경우와는 정반대로, 제네바에서는 정부가 종교개혁을 주도하고 있었다.

제네바는 이탈리아 북부의 사보이(Savoy) 공국과 로마가톨릭으로부터 이제 막 정치적으로, 종교적인 독립을 쟁취했다. 따라서 긴 전통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제네바 도시 국가의 운명은 제네바 종교개혁의 성공적인 지속성과 깊이 맞물려 있었다. 결국 제네바의 정치적 독립은 신앙적인 종교개혁의 성공여부에 달려 있었다. 칼빈이 1536년에 제네바로 부름을 받았던 당시도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

제네바에서 축출되어 마틴 부써(M. Bucer)가 사역하던 스트라스부르에서 보낸 1538년에서 1541년까지의 3년을 제외하고, 칼빈은 1564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제네바에서 평생을 사역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555년에 있었던 제네바 선거에서 4인의 대의원이 모두 칼빈을 후원하는 인물들로 세워진 이후 제네바에 미치는 칼빈의 영향력은 확고하게 되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칼빈 자신은 실제로 어떤 정치적이고 법적인 권력을 독점하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제네바에서 칼빈이 발휘했던 리더십은, 어디까지나 설교자요 목회자로서의 권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들은 칼빈이 지향했던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잘 암시해 준다.

칼빈의 다니엘서 2장 31-45절의 해석은 그의 기독교강요와 신구약 성경주석 모두에 등장하고 있다. 그의 해석에 근거하면,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 왕에게 신상의 꿈을 주었다. 그것은 지상의 제국들 아래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칼빈은 이것을 교회로 확장했다. 그에 의하면, 다니엘의 비전은 지상에서 고난을 당하는 교회에 위로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 칼빈은 하나님에 대항하는 전쟁을 수행하는 그 왕국들은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한 돌에 의해서 무너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상의 왕국들은 종말론적으로 멸망하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칼빈은 지상의 제국들과 하나님의 왕국을 예리하게 구별했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칼빈은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는 성장할 것이며, 전 세상에 충만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느부갓네살의 꿈에서 산에서 떨어진 돌이 점차 자라서 세상을 덮듯이 말이다.

칼빈의 다니엘서 해석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왕국의 시민들과 교회의 구성원들을 어떻게 돌아보시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역사를 통해서 성취되는지에 대한 의미심장한 통찰을 제공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는 하나님의 특별한 돌보심의 대상이며 하나님에 의해서 지배된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영적으로 다스려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나라이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은 교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들에게 종말의 때까지 자기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질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뉘앙스는 심지어 칼빈이 1555년 이후 제네바에서 매우 독보적인 위치를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이후에 더욱 강조되었다.

한편 칼빈은, 1555년을 전후하여, 국가에 대한 저항은 하나님의 능력의 선명한 증거라고 간주하고 있었다. 이런 칼빈의 견해는 국왕과 그 편에 있었던 가톨릭과, 하위 관료들과 그 편에 서 있었던 개신교도들 간에 있었던 프랑스의 정치적인 발전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첫째, 칼빈에 의하면, 신상의 꿈은 지상의 왕국의 지배 하에서 고난을 겪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다. 둘째, 이 격려는 교회로 확장되었다. 셋째,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왕국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영적으로 지배되는 그리스도의 왕국이다. 넷째 이 그리스도의 왕국은 지상의 왕국들에 반대된다. 지상의 왕국들은 종말론적인 시대에 파멸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칼빈에게 있어서 지상의 왕국에 반대적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왕국이 그렇듯이, 지상의 왕국으로부터 종말론적인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