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학술원 제9회 신진학자 포럼
- 김창훈, 조광현 박사 발표
손재익 객원기자
개혁주의 학술원(원장 이신열)이 매년 두 차례 개최하는 신진학자 포럼이 제9회를 맞아 2019년 7월 15일(월) 오후 2시 향상교회당(용인시 기흥구, 김석홍 목사 시무)에서 열렸다. 이 날은 김창훈, 조광현 박사가 각각 발표를 맡았다.
논문발표에 앞서 한국개혁주의설교연구원(원장 서창원 목사)과의 MOU 협정 체결식이 있었다. 장소를 제공한 향상교회 담임 김석홍 목사가 기도한 후, 이신열 원장이 인사 한 뒤 협정 체결식이 있었다. 서창원 원장과 이신열 원장이 각각 협정문에 서명한 후 문서를 교환했다. 인사에서 이신열 개혁주의 학술원장(고신대 신학과 교수)은 13년 된 개혁주의 학술원이 27년 된 한국개혁주의설교연구원(원장 서창원 목사)을 선배로 모시겠다고 말했다.
▲ MOU 협정에 서명하는 두 원장 ⓒ 손재익
▲ 참석자 단체 사진 ⓒ 손재익
이어 김창훈 박사가 마태복음 2:15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러냈다”는 말씀의 호세아 11:1 인용에 나타난 기독론-모형론적 해석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김 박사에 따르면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기에 대해 다루는 1-2장에서 구약을 4번 인용한다. 이는 마태복음 전체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주제들을 마태복음의 도입부에서 소개하기 위해서다. 특별히 호세아 11:1을 인용하는 마태복음 2:15은 예수님이 부친 요셉을 통해 유아 시절 이집트로 도피한 사건을 예수님의 생애(특별히 십자가와 부활)를 통해 이루어지는 자기 백성의 구원을 미리 보여주는 모형으로 해석한다. 마태의 이러한 모형론적 해석은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며 다층적이다. 마태복음 2:15에서 마태는 억지스럽게 기독론적 전제를 호세아 본문에 주입하여 읽은 것은 아니다. 마태는 호세아 11:1을 호세아 11장의 문맥과 호세아서 전체의 빛 안에서 읽으며, 호세아 자신이 갖고 있던 출애굽에 대한 논리를 가져와서 사용한다. 마태는 호세아가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 호세아가 본 것을 자신도 보고 있다. 마태는 자신의 논리를 호세아에게 주입한 것이 아니라, 호세아의 논리를 사용하여 호세아 11:1을 모형론적으로, 기독론적으로 읽은 것이다. 마태가 호세아 11:1을 모형론적, 기독론적으로 읽어 예수님에게 적용하기까지 마태의 두뇌 속에서 일어난 사고의 단계가 있다. 호세아가 첫 출애굽을 기억하고, 이스라엘의 새로운 출애굽을 기대하고, 구원자를 통한 새로운 출애굽을 기대하고, 마태가 이러한 호세아의 기대를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 것으로 보는 과정이 있다. 마태는 호세아서 전체의 넓은 문맥 안에서 호세아가 반복적으로 가리키는 이스라엘의 애굽으로의 미래 귀환(호 7:11, 16b; 8:13b; 9:3, 6)과 애굽으로부터의 미래 탈출(호 1:11; 11:11)이라는 개념을 발견하였기에, 예수님의 애굽 도피와 이스라엘로의 귀환을 호세아가 이스라엘이 미래에 경험할 것으로 기대한 바의 성취로 이해했다. 아기 예수가 애굽에 들어가셨다가 나오신 사건은 역사적 출애굽(첫째 층)을 닮은 미래의 새로운 출애굽을 통해 하나님의 새언약 백성, 즉 새로운 이스라엘이 죄와 사망 권세에서 해방되고 구원될 것을 기대한다. 아기 예수는 과거 이스라엘의 속박과 해방의 경험을 몸소 재현함으로써 새 이스라엘의 속박과 해방이 미래에 일어날 것을 몸소 미리 보여준다. 마태는 아기 예수의 애굽-이스라엘 왕복 여정이 그분의 전체 생애(특별히 십자가와 부활)를 통해 행하실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 사건을 요약적이고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하기에, 헤롯 대왕의 박해를 피한 예수 가족의 애굽행이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사건임을 호세아 11:1의 성취인용(fulfillment quotation)으로 나타낸다. 특별히 마태는 호세아 11:1과 주변 문맥에서 새 출애굽, 즉 모세를 통해 행하신 이스라엘의 출애굽에 대한 기대를 발견하며 그 기대가 아기 예수님의 이집트 피난과 이후 성인 예수님의 십자가-부활 사역에서 성취되었다고 해석한다. 그러므로 마태에게 있어 예수님은 새로운 출애굽을 일으키는 새로운 모세이며, 새로운 출애굽을 경험하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대표시다.
▲ 마태복음 2:15의 의미를 발표하는 김창훈 박사 ⓒ 손재익
잠시 휴식한 뒤 이어서 조광현 박사가 논문을 발표했다. 조 박사에 따르면 현대 설교학은 내러티브 설교에 관심이 높은데, 그 결과 바울 서신서에 대한 무관심으로 귀결되었다. 내러티브 설교가 발전하는 만큼 바울과 그의 서신서는 현대 설교학에서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조 박사에 따르면 서신서에는 바울이 전제하는 거대 내러티브가 내포되어 있다. 거대 내러티브와 아울러, 서신서에는 바울과 수신자들 사이에 전제된 내러티브도 포함되어 있다. 각 서신서는 바울과 수신자들 사이에 목회적 관계를 전제하고 있다. 그러므로 서신서는 서신서를 보내기 전에 바울과 수신자들 사이에서 이미 일어난 사건과 이야기를 포함한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사용하는 내러티브의 종류를 명백히 확인할 수 있는 곳은 서신의 서두(1:1)이다. 바울이 사용하는 하나님과 예수 이야기는 세 가지 중심된 사건, 즉 예수의 죽음, 부활, 그리고 재림이 근간이 되는 이야기다. 바울은 각 사건의 줄거리를 세부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간결하고 압축된 어구를 사용하여 예수의 죽음, 부활, 그리고 재림 이야기를 암시한다.
바울의 내러티브는 내부자와 외부자를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바울의 내러티브는 공동의 이야기이면서 또한 공동체의 내부자와 외부자를 구분하는 이야기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경계를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고 이 작업은 설교에서도 필요한 작업이라는 점을 가르쳐 준다. 최근 일어나는 미셔널 처치 운동의 일각에서는 내부자와 외부자를 구분하는 경계가 복음 전파에 방해가 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교회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경계가 필요하다. 경계가 없이는 대항 문화적인 성격을 띠는 교회가 생존하기는 불가능하다.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설교에서도 경계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경계를 해체하고 주변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내러티브만 설교한다면, 그 설교는 청중을 격려할 수는 있으나 결코 회심에 이르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설교자가 청중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격려는 그들을 회심시켜, 즉 경계를 통과하도록 하여 세상과 구별된 공동체의 일원으로 형성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설교는 내부자와 외부자의 기준을 명확히 제시하여 주변 문화와는 다른 독특한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강화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바울의 본은 목회를 통해 만들어진 이야기가 예화 이상의 기능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목회를 통해 발생한 이야기들은 설교자와 청중 사이에 그리고 청중과 청중 사이에서 친밀감을 높여준다. 그뿐만 아니라, 목회를 통해 생성된 이야기들이 공동체의 공동 이야기로도 기능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공동 이야기를 반복해서 말하고 들을 때, 그 교회는 다른 어떤 교회와 구별되는 독특한 공동체의 정체성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 바울의 내러티브 사용과 설교학적 함의를 발표하는 조광현 박사 ⓒ 손재익
▲ 질의 응답 시간에 자리한 김창훈, 조광현 박사 ⓒ 손재익
김창훈 박사는 서울대학교 영어교육과(B.A.), 고려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한 후, 미국에서 고든콘웰신학교(Th.M.),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교(Ph.D.)를 졸업하였고(신약학), 마태복음을 전공하였다. 그랜트 오스본 교수의 지도로 마태복음 27:45-54가 마태복음 전체에서 기독론, 종말론, 구속사적 측면에서 문학적, 신학적 절정으로서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대해서 박사논문을 썼다. 현재 향상교회에서 사역하며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조광현 박사는 고신대학교 신학과, 고려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고든-콘웰 신학교에서 설교학으로 석사를 마쳤다. 이후 고든-콘웰 신학교에서 A. J. 고든 연구원으로 머물면서 쓴 논문을 프레토리아 대학교에 제출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학위 논문 Paul's Community Formation Preaching in 1 Thessalonians: An Alternative to the New Homiletic은 Peter Lang에서 출판되었다. 현재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설교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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