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학문연구와 창달을 위한 교수님들의 연구발표와 학문적 대화를 가지는 정기적 교수포럼에 대한 설명과 강의안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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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성화의 맥락에서 본 “예수의 흔적”(갈6:17)
강의 내용 요약: 황대우 목사 / 김문정 전도사
갈라디아서 6장 17절을 합독하겠습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아시다시피 이 갈라디아교회는 사도 바울이 전해준 복음을 버리고 유대교에서 개종한 완전주의자들, 즉 율법주의자들의 거짓된 꼬임에 넘어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실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구원을 얻었지만, 예수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교회적인 상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편지를 쓸 때 상당히 격한 감정으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편지마다 나오는 친절한 인사가 생략된 채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고, 심지어는 편지의 앞머리에 누구든지 우리에게 전해주신 복음 이외에 다른 것들을 전파하는 자들이 있다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단호한 발언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격한 감정들이 편지 말미에 오면서 진정이 되고 다시 갈라디아교인들을 향한 사랑하는 감정들이 생겨났습니다. 바울의 마지막 고백은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고백은 무엇에 대한 대답일까요? 고린도교회든 갈라디아교회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바울의 사도직분을 그들은 문제 삼았습니다. 바울이 정말 사도인가? 열두 사도가 따로 있는데, 예수님께서 세우지 않은 사람이 진짜 사도일 수 있는가? 이와 같은 모든 의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얘기하는 예수의 흔적. 희랍어 성경에는 복수로 되어 있는데, 이 예수의 흔적들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것에 관해서는 크게 육체적 해석과 형상적 해석이 있습니다.
육체적 해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는 데, 하나는 핍박설입니다. 즉, 여기서 나오는 예수의 흔적은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는 가운데 고난을 당한 육체의 흔적이다. 우리가 많이 광범위하게 따르고 있는 학설이죠. 두 번째는 제의적 문신설입니다. 즉, 그 당시의 종교에는 신에게 자기 자신을 헌신하는 의미로 몸에 문신을 새겨서 자기를 그 신에게 전적으로 헌신된 존재라고 신앙을 고백하는 종교적 관습이 있었는데, 바울이 바로 그런 문신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세 번째는 성흔(stigmatization)설인데, 이것은 건전한 주석학적 결론이 아니라 신비주의적인 해석입니다. 즉, 마치 중세 수도사 프란시스(Francis of Assisi)의 손과 발에 못자국이 생기고 이마에 가시관의 흔적이 기적적으로 생겼다는 이야기에서처럼 깊은 기도와 명상 속에서 기적이 일어나서 몸에 거룩한 상처가 생기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죠. 이 세가지 학설 가운데 아마도 여기 계신 목사님들 대부분이 배워 오시고 지금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설은 핍박설일 것입니다. 즉 “예수의 흔적들”이란 바울이 복음 전도 사역을 하면서 받은 박해로 인해 몸에 생겨나게 된 상처라는 것이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러한 학설이 맞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라는 것이죠. 그래서 이 예수의 흔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리고 그것이 왜 타당한 것인지를 살펴서 거기서 목회자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삶에 윤리를 이끌어내는 것이 이 강의의 목표입니다.
이 핍박설은 많은 학자들에게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는 이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론에는 심각한 문제점이 있습니다. 우선 문맥에서 사도 바울은 거짓 교사들인 율법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아주 명료한 대조를 이루는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육체를 이야기하고, 율법을 이야기하고, 할례를 이야기하면서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한편 바울은 그것을 대조하는 방식으로 아주 정교한 수사학적 기교를 사용하여 그들의 논리를 날카롭게 격파해 나가고 있습니다. 즉 율법주의자들이 육체를 얘기할 때 바울은 영혼을, 그들이 율법을 이야기할 때 그는 복음을, 그리고 그들이 할례를 이야기할 때, 그는 예수의 흔적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사용한 이러한 율법주의자들과의 날카로운 대조 방식은 갈라디아서에서뿐만 아니라 로마서에서도 나타납니다.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이면적 유대인이 진짜 유대인이다”라는 대조가 그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육체의 표피를 벗기고 거기에 흔적을 새겨서 그것을 할례의 표로 삼았는데, 이 할례가 율법의 의무를 짊어지겠다는 표입니다. 갈라디아교회의 거짓 교사들은 이 율법을 지켜야지만 구원을 받을 수 있고, 따라서 이 율법을 짊어진다는 표인 할례를 몸에 새겨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바울의 대적들이 ‘우리는 이렇게 우리의 몸에 할례의 표가 있다’고 자신의 특정부분을 자랑할 때, 바울은 ‘나도 여기에 그런 표가 있다’ ‘이게 복음을 전하다가 맞은 칼자국이고 돌에 맞은 자국이다’라는 식으로 육체의 특정부분에 새겨진 할례의 흔적을 대항하는 수단으로 자기 몸에 새겨진 제 3의 물리적인 상처들을 가지고 대항했다는 것이 핍박설인데, 이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합니다. 위 본문을 핍박설로 해석하면 바울이 사용한 수사학적인 구조들이 다 깨어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의 흔적”을 “내 몸에” 가졌다고 할 때 “몸”은 희랍어로 “소마(soma)”인데, 이것은 여기서 단순히 살과 뼈로 이루어진 물리적 몸을 의미하기 보다는 오히려 바울이 자신의 전 존재 속에서 예수의 죽음에 의한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 것입니다. 여기서 종교개혁가 존 칼빈(John Calvin)의 유명한 합치(conformity) 교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2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세상을 본받지 말고”라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서 “본받다”를 의미하는 희랍어 단어가 “수스케마티조(suschematizo)”입니다. 이 단어는 어떤 물건이 있는 데 그것을 정해진 틀 속에 집어넣어서 찍어내거나 틀에 부어서 생산해내는 것이죠. 동전 같은 것을 주형의 틀에 찍어내거나, 밀가루 반죽을 틀에 부어서 붕어빵을 찍어 내는 것과 같습니다. 컨포머티(conformity)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그러면 “세상을 본받지 말라”는 말씀은 직역하면 “세상이라고 하는 주형의 틀에 찍혀낸 바 되지 말라”는 뜻이 됩니다.
칼빈의 설명에 의하면 인간은 둘 중에 하나에 의해서 형성됩니다. 하나는 세상입니다. 한 시대에 태어나면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그 시대의 정신을 그대로 따라가는 사람들이 됩니다. 성격이 급한 사람, 공부 잘하는 사람, 못하는 사람, 게으른 사람, 느린 사람, 그런 개별적인 본성에는 차이가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이 만들어낸 어떤 틀들을 그대로 답습해가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유행이라는 게 그렇지 않습니까? 유행, 자기도 모르게 어떤 흐름이 한 시대를 흐르는 거예요. 모두 똑같이 되는 거죠. 목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대로 따라가는 거예요. 요즘 목회에서 각광받는 게 “성공”입니다. 목회를 시작하는 후배들을 만나보면 온통 관심사가 성공입니다. 이런 것들도 한 시대가 만들어낸 한 유행입니다. 세상이라는 주형에 의해 찍혀지는 겁니다. 한 사람이 태어나자마자 이 세상은 자기 틀 속에 넣고 똑같은 사람으로 찍어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과는 다른 주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말씀은 예수의 주형에 의해 찍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합치(conformity)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결국 세상의 틀에 찍히든지, 예수의 틀에 찍히든지 둘 중에 하나가 됩니다.
여기서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세상의 틀 속에 찍힌 사람을 그 속박에서 벗어나서 예수의 형상을 닮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영혼에 대한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행동이라는 겁니다. 합치(conformity)는 예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의 죽음을 짊어진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결국 예수님께 합치되는 것(conformity to Christ), 즉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찍혀지는 그것입니다.
복잡한 이야기지만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하면 우리가 목회를 하다가 고생을 합니다. 고생을 하는 데 그냥 고생만 하면 한이 맺히고 화병도 생깁니다. 목회를 하면서 다양한 종류의 어려움을 만나요. 이것은 십자가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절대적 십자가와 상대적 십자가입니다. 절대적 십자가는 자신에게 어떤 흠이나 결함이 없는데도 애매하게 당하게 되는 고통입니다. 이런 고난과 고통이 ‘그리스도와의 합치’를 위해 사용되어질 때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자기는 인격이나 모든 면에서 하자가 없는 상황인데 일방적으로 핍박을 받는다든지 모함을 받는다든지 하는 것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사도들이 사도행전에서 당하는 것과 같은 고난이 절대적 십자가입니다. 상대적 십자가는 자기 자신의 과오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를 닮기 위한 하나님의 연단으로 받아들이면 성숙을 위한 기회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려고 할 때 많은 고난을 당하게 되는 데 이것이 절대적인 십자가든 상대적인 십자가든 간에 그것을 받아들인 태도가 결정적입니다. 만약에 정말 절대적인 십자가를 졌는데 자기가 애매하게 핍박을 당하고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데 그 사람에 대해서 원한이나 미움을 품는다든지 자기를 이런 처지에 두신 하나님에 대해서 원망을 품는다면 십자가를 지고 끊임없이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리스도와의 합치(conformity to Christ)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자기의 죄 때문에 당하게 된 고난인데도 그것을 믿음과 순종으로 받아들이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그런 고난을 받게 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면 자기 죄 때문에 당하게 된 고난이지만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와의 합치(conformity to Christ)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면 누구나 처음에는 자신이 처한 상황과 그 상황에 자신이 처하도록 내버려두신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깊이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자기의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됩니다. 회개할 때 자신을 가장 강력하게 비난하게 되는 대상이 누구입니까? 자기 자신, 즉 자아입니다. 그러면 비난하는 자신은 누구고 비난받는 자아는 누구예요? 여기서 자아의 분리현상이 일어납니다. 죄를 사랑할 때에는 자아와 죄가 하나가 되어있기 때문에 분리현상을 느끼지 못하지만,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의 빛과 성령의 은혜가 임하게 되면 두 자아의 분리현상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둘 사이의 대화가 이루어집니다. 대화의 그 예가 구약에 보면 시편 42편에 나오죠. 뭐라고 나옵니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며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 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 낙심하고 주저앉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는 것은 옛 본성에 속한 자아의 일이고, 그 속에서 끊임없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새 본성으로서의 자아입니다. 그래서 은혜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죄가 스며들게 되면 악한 분리현상이 일어나고, 죄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은혜의 빛이 스며들게 되면 거룩한 분리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제일 먼저 무얼 해야 된다고 하셨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이것을 지금 말씀하시는 겁니다. 자신을 비난하고 자기에 대한 신뢰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자기를 신뢰하지 않으면 그 다음에 누구를 신뢰하게 됩니까?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둘 중에 하나 밖에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자기를 사랑하든지 둘 중 하나만 가능합니다. 자기 깨어짐이라는 것은 자기 사랑을 깨뜨리는 것, 객관적인 실체로서의 자아가 아니라 죄와 결탁된 자아를 깨뜨리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죄에 사로잡힌 이런 자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질서에서 아주 멀리 이탈한 자기를 혐오하는 감정이 생길 때, 깊은 회개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하나님께 매달릴 때, 그때 자신이 죽는 경험을 합니다. 이런 자기 죽음이라는 고통의 실체가 무엇이냐면 이천년 전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기 속에서 실체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 cum Christo)" 교리의 진수입니다. 참된 사랑은 그 자체로 시간을 뛰어넘는 겁니다. 시간을 뛰어넘지 않으면 그것은 참다운 사랑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라는 시간에 묶여서 살아가는 한시적인 인간이 영원을 경험하는 유일한 비결은 바로 이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을 통해서만 영원 자체이신 하나님과의 합일이 이루어집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때 이천년 전에 나무에 매달려 죽으신 예수의 죽음의 고통이 자신의 내면세계 속에서 실제로 나타납니다. 그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게 되면서 왕성한 힘을 얻던 옛 본성의 썩은 성품들이 죽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죽음의 기운에 의해서 생명의 기운이 완전히 삼켜진바 될 때에 자연적 질서 안에 있는 인간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거죠. 이렇게 해서 예수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말하는 것은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즉 노예의 몸에 새겨진 흔적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흔적”은 형상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예수와 예수의 흔적을 가진 바울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를 의미한다. 그래서 바울은 서신들에서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으로 표현하는데,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 “예수의 흔적”입니다. 바울은 예수의 노예이고 그 흔적을 가진 사람이다. 즉 예수에게 사로잡힌 자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흔적은 성경의 “형상(imago)”을 의미하며, 이것은 철학에서 말하는 “(형상)forma”과 통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형상을 가진 사람은 속된 삶을 살지만, 예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은 예수처럼 사는 것이다. 여기서 “형상(imago)”은 예수를 닮은 삶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불렀는데, 이 사상의 기원은 구약의 “에베드 야웨(ebed yehovah. 여호와의 종)” 사상입니다. 구약에서 세 신분 즉 제사장과 왕과 선지자가 하나님의 종으로 불렸지만, 그 가운데 특히 선지자를 지칭할 때 “종”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데, 이유는 선지자란 하나님의 계시 즉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백성 앞에 나타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의 사람인 선지자가 그 시대와 타협하지 않는 완전히 별종이 되어서 마치 하늘에서 온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외칠 수 있었습니까? 말씀의 전달자인 선지자들이 남다른 영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종이 된 것은 기도와 말씀에 전무했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는 것이 선지자의 직무였으며 이것이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집사를 세우게 된 동기로 작용했습니다. 호세아의 소명 기사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호세아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 호세아뿐만 아니라 모든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은 말씀이 임하는 경험을 통해서입니다. 그 시대에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게 살아가던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함으로써 그들은 비로소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경험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했습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세상에 의해 형성되어 있던 인생관과 가치관이 해체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이 선지자들에게 “다아트 엘로힘(daath elohiym. 호 4:1)”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생겨나게 했습니다. 여기서 앎을 의미하는 “다아트”는 알다를 의미하는 “야다(yada)” 동사에서 온 것입니다. 그래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는도다”(호 4:6)라는 호세아의 탄식이 나오는 겁니다. “알다”를 의미하는 “야다” 동사가 구약에서 처음 등장하는 곳이 바로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며”라는 말씀인데, 여기서 “동침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가 “야다”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고와 경험을 분리하는 것은 히브리 사람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식에 대한 사상이 신약에서는 빌립보서 3장에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됩니다. 사도 바울이 그 시대의 사람들과 같았는데,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소명을 경험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는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고 어떤 신적인 강제력에 강하게 붙들리게 되었습니다. 그가 열정적으로 얻고 싶어 했던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었고, 이 지식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동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지식은 끊임없이 발전되고 증진될 뿐만 아니라, 이 증진을 통해 자신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발전시킬 수 있고 이로써 더욱 그것을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회복해야 할 정체성은 진리의 전달자라는 사상입니다. ‘이것이 진리다’라고 외칠 수 있는 것이 목회자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사명이야말로 최고의 사명이며 이외의 다른 것들은 이것을 위한 부대적인 사명에 불과합니다. 단순히 개신교의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복음 즉 그리스도의 도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내가 길이요(I am the way.)”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길은 무엇입니까? 도를 가르치는 모든 사람은 그 도를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무엇으로 가르치는 것은 도가 아닙니다. 도를 가르치는 사람은 자신이 이미 그 도를 얻었다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득도는 없습니다. 이미 도를 터득했다하면 사실 그가 찾은 것은 도가 아닙니다. 참 도는 영원히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저 건너편에 있는 객관적인 기준입니다. 참 도는 끊임없이 그 도를 따라가면서 그 도에 합치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얻었다’함도 아니요, 그러나 ‘아무 것도 없다’함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그 도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목회자의 사명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진리에 대한 명쾌한 외침이 사라지고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목사는 교인들이 늘어나면 예배당을 지어야하고, 또한 때로는 사회활동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목사에게 있어서 하나의 중심축이 흔들리면 안 된다. 그것은 목사란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서 세움을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진리에 사로잡히고 지성으로 진리를 위해 헌신하고 진리를 통해 자신이 변화되어가고 부패한 본성과 싸워서 자신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고 내면적인 변혁과 쇄신이 자신 안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이런 저런 일 하다가 일요일에 정해진 설교 시간에만 설교단에 올라가 성경을 들고 말씀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그 한 시간에 외치는 연약하기 짝이 없는 그 외침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일주일 동안 진리를 탐구하고 자신의 온 마음과 뜻을 모아서 그 진리에 합치하는 삶을 살기 위해 몸부림치고 그렇게 살지 않는 자신을 끊임없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자기 죽음의 경험과, 그런 죽음 속에서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부활의 경험들을 간직하고 살아갈 때, 진리를 모르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진리를 알면서도 진리에 합치한 삶을 살아가지 않음으로써 참 된 사랑의 질서를 모르고 혼란 속에서 살아가는 무도한 인간들을 보는 사랑의 마음이 비로소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안타까운 마음이 생겨납니다.
진리를 멀리 이탈하여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방황하는 인간들을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자신이 걸아 가는 그 진리의 길을 함께 가자고 외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말씀 선포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 설교는 단순한 진리에 대한 객관적이 외침이 아니라, 삶이 동반하는 외침이 될 수 있고, 그 객관적인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 주는 가운데 그것을 외칠 수 있는 삶과 외침이 일치하는 그 무엇이 될 수 있습니다. 거기서 피 맺힌 외침이 나오는 것이고, 뼈 사이에서 우러나오는 신앙 고백과 몸부림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심각함과 진지함들이 거의 사라지고 있다. 이 진리의 말씀을 강단에서 외치다가 피가 솟아오르는 것 같은 토혈의 감정을 경험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교인들은 냉담할지라도 설교자는 그 진리에 사로잡혀서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고 그렇게 붙들 수밖에 없고, 거기에 자기를 복종시킬 수밖에 없는 그 진리의 힘에 사로잡혀서 눈물을 흘리는 경험이 얼마나 있는가? ‘이것이 바로 진리이고 이 길이 그 진리에 합치하는 길이고 이 삶이 그 진리를 따라갈 때 나타날 수 있는 한 삶의 양식이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어서 교인들이 심오한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처절한 죄인이고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는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 참회(conversio), 자신의 삶을 돌이키고 자신을 그 진리의 삶에 합치시키고자하는 갈망을 갖게 하는 참회의 역사가 바로 목회의 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피상적이고 표피적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외칠 때 자신의 죄를 심오하게 회개하고 하나님을 향해 자기의 삶을 돌이키는 교인들, 그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무지막지하고 강팍한 교인들을 가슴에 끌어안고 그들이 회심하지 않는 것이 자신의 죄악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서 꺾어지는 것이 목회입니다. 오랜 목회 끝에 ‘고생하였노라’고 말할 수 있지만, ‘예수의 흔적을 지녔노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우리는 목회자로서 자기 깨어짐의 경험이 충분합니까? 어떤 계기이던 이 목회 길을 들어선 것이 출세에 대한 욕망이나 인생에 있어서 번영에 대한 욕구가 아니라, 사랑 때문이 아닙니까? 아무도 우리에게 이 목회 길을 가라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 바로 우리에게 목회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이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개척한지 13년 밖에 되지 않은 목회자입니다. 하나 깨달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방법으로 한 목회는 방법이 잘못되면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목회는 토혈의 목회라는 것입니다. 피를 토하는 목회이다. 한 목회자가 많은 어려움이 있어도 엎드려서 어린아이처럼 깊이 꺾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영광과 존귀가 아니라,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고난의 길을 함께 걸으며 예수의 흔적을 지니기 위해 이 길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러면서 끊임없이 참회의 눈물을 흘리면 그 눈물이 교회의 밑바닥으로 스며들어서 쓴 뿌리는 그 눈물을 먹고 죽고 주님께서 심으신 뿌리들은 그 눈물을 먹고 자랍니다. 그것이 목회입니다. 성공하지 않으면 큰 일 납니까? 누구를 위한 성공입니까? 모두 지나가는 것입니다. 큰 교회를 목회했든 작은 교회를 목회했든 그것은 영광도 아니고 부끄러움도 아닙니다. 언젠가는 의자를 다음 세대에 물려주고 자리를 비워야 합니다. 그 때는 생각보다 속히 옵니다. 목회를 은퇴할 마지막에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한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에 있고 한 사람의 존재의 가치는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의지의 크기에 달려 있습니다. 목회하면서 망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끊임없이 우리가 당하는 많은 고난을 자기 쇄신의 기회로 삼고 어린아이처럼 처음 부르셨던 주님을 의지하면서 그렇게 매일매일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몇 천 명을 목회하는 것도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고생스럽다한들 세상에 그 정도 고생하지 않고 밥 먹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정말 어려운 것은 ‘한 사람’을 목회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조국 교회의 갱신을 수없이 이야기하지만 요점은 하나입니다. 프랭카드를 내 걸고 “어게인(Again) 1907”을 외쳐도 부흥은 그렇게 오지 않습니다. 나 혼자면 어떻습니까? 뜻이 맞는 두 명의 목회자면 어떻고, 세 명의 교인이면 어떻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오직 하나님을 향해 세웁시다. 그리고 이 세상의 잦대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내 영혼이 얼마나 주님 앞에 순수한지, 때가 묻지는 않았는지 살피며 주님의 은혜를 목마르게 구합시다. 어린아이처럼! 한 순간도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 자기 안에 예수의 형상을 이루도록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빕시다. 끊임없는 참회와 자기 깨어짐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시다. 인생의 의미 그 자체가 자신을 철저히 깨뜨려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것, 그것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죽은 만큼 내 안에 예수의 형상이 살아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