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사회적 유산

  이환봉 교수 (개혁주의학술원장)

금년에 칼빈 탄생 50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는 칼빈의 신학과 사상의 유산을 새롭게 조명하고 오늘 우리를 향한 그 유산의 현대적 의의를 새롭게 확인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칼빈(1509년 7월-1564년 5월 27일)은 종교개혁 제2세대에 속하지만 그의 생애와 가르침은 종교개혁을 강화하고 완성함에 있어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그의 신학과 사상의 포괄성과 통일성은 개혁교회의 건설을 가능하게 하였고, 제네바의 시민사회를 세상에서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의 학교”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칼빈의 신앙과 사상이 그가 출생한지 500년이 지난 오늘도 우리의 문제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칼빈의 말을 오늘도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여전히 현재 시제로 말할 수 있느냐? 제네바에 정착된 아름다운 질서와 평화가 오늘 우리 사회 속에서도 여전히 재현될 수 있을까?

칼빈은 500년 전 중세의 한 인물이었고 지금 우리 사회는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중세 사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변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오늘날도 여전히 우리에게 살아있는 교훈을 주고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 그가 하나님의 영원한 계시의 진리를 명료하고 실제적인 방법으로 설명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광범위한 친분 관계와 폭넓은 접촉을 통해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에 접할 수 있었고 동시에 그는 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야만 했었다.

물론 한 시대의 아들로서 칼빈이 오늘 첨단 정보시대에 살아가는 우리가 직면한 사회의 그 모든 복합적인 문제들과 질문들에 모두 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 시대의 모든 영역에서 그의 영향을 찾아내려하거나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에 대한 그의 해답을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계 14:6)에 철저하게 복종하여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인간의 근본적인 태도를 분명히 함으로써 수백 년 전이었을지라도 인간이 살아가는 기본적인 관계들 속에서 그 자신의 시대와 오늘 우리 시대의 실제적인 문제들에 직면할 수 있었다.

특별히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실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모든 창조세계가 구체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고 하나님의 선한 뜻이 크고 작은 우리 삶의 모든 유형 속에 들어나야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러한 칼빈의 신학과 사상은 오늘도 우리에게 현실 적합성을 가진 진리 체계로서 다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으며 우리 시대와 사회의 어둠을 밝히는 횃불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경제적 유산

  현대 사회에 여전히 실재하는 칼빈 사상의 가장 큰 영향중에 하나는 경제 행위를 그리스도인의 삶의 영역에 포함시킨 것이다. 칼빈은 부와 재산을 하나님의 선물로 인정하였을 뿐 아니라 정당한 재산의 축적을 공익을 위한 공헌으로 까지 간주하였다. 또한 사유재산과 정당한 이자를 인정하였고 산업과 상업을 장려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혹자는 성급하게 칼빈을 자본주의의 기초자로 말한다.

그러나 칼빈은 부당한 재산축적과 고리대금을 반대하고 빈자에 대한 부자의 의무와 구제를 강조하였다. 또한 창세기 2장 15절 주석에서 “모든 사람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자신을 하나님의 청지기로 생각하도록 하라”고 역설함으로써 부와 재산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청지기적 사명을 강조하였다. 청지기의 정신을 가지고 우리 사회를 하나님이 정하신 인간 삶의 원리인 “자연의 질서”(naturae ordo) 즉 조화와 봉사의 질서가 실현되는 사랑의 공동체로 만들어 갈 것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창조질서의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과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역사를 통해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될 때 참으로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것은 칼빈이 인간 사회의 경제적 질병은 근본적으로 구조의 질병이기 전에 인간의 질병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

이러한 칼빈의 경제윤리는 사회의 불균등성만을 강조하여 탐욕적인 재산의 증식만을 일삼는 자본주의와는 분명한 차이를 가지고 있으며, 구조의 변화가 인간의 변화를 약속할 수 있다고 보고 경제사회 구조의 혁명적 개선만을 부르짖는 사회주의와도 맥을 달리한다. 물론 우리는 칼빈에게서 부분적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요소를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칼빈의 사상은 자본주의적이거나 사회주의적이 아니라 다만 성경적일 뿐이다. 그는 성경의 교훈을 따라 자본주의적 요소를 강조해야할 때에는 실제적 현실에 기초하여 그 현실을 극복하려 하였고, 동시에 사회주의적 요소를 강조해야할 때에는 당위적 신앙을 따라 그 이상을 실현하려고 하였다.

특히 칼빈의 가난한 자에 대한 목회적 관심과 실천은 오늘도 모든 교회의 헌신적인 구제와 배품의 동력을 제공하고 있다. 그는 신명기 15장의 설교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수령인들로서 가난한 자들을 우리에게 보내신다. 그리고 비록 구제금이 인간 피조물에게 주어졌을지라도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을 마치 하나님의 손에 우리가 놓아두었던 것처럼 받으시고 만족하게 여기시고 그리고 그것을 우리 각자의 예금계좌에 넣어 주신다”고 말함으로써 가난한 자에 대한 적극적인 구제를 격려하고 있다. 칼빈은 아름다운 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 부자와 가난한 자는 서로 각자의 적극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구제 행위를 통하여 부자는 자선을 시행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사랑 안에 성장할 수 있으며, 가난한 자는 부자의 의무를 상기시켜 줌으로써 하나님의 돌보심에 감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교회와 사회가 이러한 상호 조화와 봉사를 통하여 참된 하나님의 형상과 창조질서의 회복을 마땅히 반영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정치적 유산

 일반적으로 칼빈이 성공적으로 교회개혁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법과 정치에 대한 그의 능력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칼빈의 사상이 당대에 제네바의 법률 제정과 정치 제도에 폭넓은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근대사회의 정치사상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칼빈은 동 시대의 로마교와 재세례파의 정치사상을 비판하고 다른 종교개혁자들에 비해서 보다 발전적인 정치제도를 확립하려 했다. 특히 구약 이스라엘의 통치제도와 제네바의 정치제도를 조화시켜 민주정을 가미한 귀족정을 가장 이상적인 정치제도로 옹호하였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그 후에 장로교 정치제도로 자리 잡고 또한 근대 대의민주정치제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칼빈은 국가와 관련하여 중세적 전통과 다른 개혁자들과는 다른 독특한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는 시민 정부를 인간의 악행을 통제하고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정상적인 사회의 필수적 요소로 생각하였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신앙에 기초하여 국가의 권위에 대한 최대한의 기본적인 순종을 말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침해에 대해서는 합법적인 저항의 권리와 의무를 강조하기도 하였다. 특히 악한 통치자에 대한 행동적 저항은 무력저항 운동이 아니라 고·하급 관리(magistratus)를 통하여 법적 직무 수행과 법 질서 회복을 촉구하는 합법적 저항운동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저항 정신은 베자와 위그노들에 의해 점차 과격화되어 스코틀랜드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조직적인 힘에 의한 능동적 저항운동으로 발전하였고, 근대에 이르러 영국의 명예혁명, 스페인에 대한 화란의 반란에 반영되어 나타났다. 특히 미국의 독립선언에 칼빈주의자 들이 서명에 참여하였고 따라서 미국 독립운동은 영국으로부터 “장로교도들의 반역”으로 까지 일컬어진 바 있다.

칼빈은 교회의 주도 하에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영적 통치와 세속적 통치를 구분함으로써 제네바 시의회로부터 교회의 독자적인 치리권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칼빈은 이단 방지와 시민 복지 등에 있어 교회와 국가의 상호협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칼빈주의는 이러한 칼빈의 주장을 영역 주권의 원리로 발전시키고 교회와 국가의 이원적 분리를 거부하면서 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상호봉사에 위한 유기적인 관계를 강조하게 되었다. 한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는 두 기관으로서 각자의 고유한 기능과 권위가 인정되는 가운데 한 주권을 위해 상호 협력하는 일원론적 이원화의 관계를 정립하였다. 이러한 상호관계는 화란의 개혁교회들이 국가가 교회를 부당하게 지배하려고 했을 때 단호히 저항할 수 있는 근거로 작용하였다. 이처럼 칼빈의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과 시민저항 정신은 근대 민주주의 발전의 한 동력이 되기도 했다.

 

문화적 유산

  칼빈은 오직 은혜에 의한 칭의의 교리를 강조하였으나 동시에 경건한 삶의 훈련을 강조하는 성화의 교리도 중요시 하였다.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을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유와 감사함으로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율법과 주권적인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신앙적 응답으로서 항상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게 수행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신학적 배경 속에서 칼빈은 인문주의 교양교육의 영향을 따라 수사학, 자연과학, 미술, 음악 등에 대한 동시대의 지식과 문화의 영역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지식과 문화는 종교적 신앙과 소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항상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는 신정적 성격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즉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원리를 따라 복음과 문화의 이원적 분리는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은 역사 속의 인간의 모든 문화행위 속에서 그대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문화 이해는 칼빈에게 있어 어떻게 복음의 진리를 실제적인 삶의 구체적 정황 속에 적용하여 새로운 변화를 가져와야 하는가 하는 실천적 과제가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제네바의 교회법규를 로마법의 원칙을 따라 수정하고, 예배에서 음악의 진가를 높이 평가하며, 제네바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교육적 혁신을 감행하고, 가난한 자와 난민들을 위한 구제와 복지를 제도화하고, 학문과 지식에 대한 기독교적 이론을 개발하는 실천적 문화 변혁자 칼빈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칼빈의 문화적 추구는 서구 사회의 대중문화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면, 칼빈은 프랑스어의 근대화에도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프랑스 산문사의 백미로 알려져 있는 칼빈의 기독교강요 불어판은 짧은 문장과 정확한 용어 사용 등으로 불어 자체의 발전적인 큰 변화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불어를 신학과 철학의 정확한 전문용어로 까지 격상시켰다고 할 수 있다.

초기 미국 문화 속에는 청교도들을 통해 전달된 칼빈주의적 유산이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오늘도 그러한 청교도적 규범들이 미국 사회의 문화 현상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서는 아직도 주일에 술을 판매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비기독교 인구가 많은 다문화 사회이며 개인의 권리를 고양하는 자유 국가의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주일에 술을 구입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도 일반화된 규범적 가치로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처럼 기독신자 공동체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시민 사회를 건전하게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미국 문화의 일반적 현상이 되어 있다.

물론 전체적인 미국의 대중문화에서 미국의 건국 문화를 형성한 칼빈주의적 특성과 규범들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그러나 국제적 테러와 금융위기 등으로 불안한 미국에서 시사주간지 타임지(Time)가 최근에 “뉴 칼빈주의”(New Calvinism)를 “지금 세계를 변화시키는 10대 이념들” 중에 하나로 지적한 것은 칼빈주의가 여전히 미국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제적인 대답이 될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칼빈은 중세의 시대적 격변기 속에서 교회와 사회의 올바른 방향을 밝히 제시해 주었다. 오늘도 우리는 그의 신학과 사상이 여전히 우리 교회의 갱신을 불러오는 교훈이며 우리 사회의 어둠을 밝히는 횃불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지난날 칼빈이 성경의 교훈을 따라 제네바의 시민들과 난민들에게 윤리적으로 자신을 통제하며 서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생존 메커니즘을 성공적으로 제공할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우리 사회의 경제, 정치, 문화의 변혁을 위한 실제적 힘과 방향을 제시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