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란 무엇인가?                                                                          


황 대 우(창원은광교회 부목사)   


개혁주의를 간단명료하게 정의하고 설명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한마디로 요약해야 한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를 의미하는 “soli Deo gloria”라는 문구가 될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이 용어를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로 이해한다. 물론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완전히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바울 사도도 우리에게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위의 문장에서 라틴어 “gloria”라는 용어는 목적어가 아닌 주어이다. “영광을”과 “영광이” 사이에는 개혁주의를 오해하느냐, 바르게 이해하느냐라는 중요한 문제가 놓여 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이라 번역하면 그 주체는 우리 인간이 되지만,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라고 번역하면 그 주체는 하나님이 된다. 즉 전자의 번역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신자 개개인의 자세와 행동에 달려 있고, 후자의 번역에 의하면 그것은 하나님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는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태도가 마치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장 중요한 원리인양 가르치고 있다. 우선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도 그 내용이 대부분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태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교회의 프로그램도 대부분 이와 같은 원리에서 만들어지고 구동된다. 한마디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긍정의 심리학이 가장 큰 설득력을 얻고 있다.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긍정의 심리학을 통해 교회가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전도를 통한 교회의 부흥일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교회의 부흥을 진심으로 갈망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뀅 잡는 것이 매”라는 식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를 부흥시키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은 분명 문제가 있다.   


우리 모두가 간절히 원하고 원해야 하는 교회의 부흥이란 실로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 소원의 동기와 목적이 정말 오직 하나님과 그리스도께만 속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 자신의 인간적인 필요도 거기에 포함되는 것인가? 우리 모두가 연약한 인간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우리의 형편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 즉 우리의 부족과 필요를 채우고 싶은 마음을 완전히 배제한다는 것은 아마도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교회 부흥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가져야할 마음 자세는 교회 부흥의 동기와 목적을 하나님께 두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부흥을 갈망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구호를 단순히 교회 부흥의 대의명분이나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교회 부흥의 유일한 내용과 목적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부흥의 목적이 아닌 대의명분과 수단으로 전락할 때 우리는 결과제일주의와 결과만능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결과만 중시하는 것은 지극히 세속적인 성공주의의 전형이다. 이러한 성공제일주의가 교회에 침투하게 된 것은 “soli Deo gloria”를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로 이해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교회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신자 개개인이 사회적으로 성공해야 할뿐만 아니라 교회도 세상적으로 성공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고 가르친다. 이것은 세상이 인정하고 알아주는 것이 곧 성공이며, 이 성공이야 말로 이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정말 그런가? 정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유일한 길이란 세상이 인정하는 “잘 됨”이요 “성공”인가? 공부를 잘하는 사람, 좋은 직장을 가진 사람, 돈을 잘 버는 사람 등등 소위 세상에서 인정받는 성공한 사람들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주인공들인가? 과정이야 어떠하든 상관없이 결과만 좋으면 되는가? 우리는 너무 쉽게 착각한다. 성공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성공 지향적인 심리를 포장하고 숨기며 정당화한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은 허울 좋은 대의명분과 수단에 불과하며 가장 유의미한 목적은 자신이 원하는 성공일 뿐이다. 이 성공은 반드시 부귀영화로 귀결된다. 그는 성공을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거짓과 속임수, 위선, 악평과 비방도 유익한 수단이 될 것이다.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 성공할 수만 있다면. 아마도 그들은 정직과 성실이란 성공하지 못해서 가난하고 못난 사람들,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들의 자기변명 구실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수억, 수십억, 수백억을 들여 지은 교회 건물 가운데 과연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을 준법정신에 따라 세워진 것이 몇 개나 될까? 법대로 하면 건물 짓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이 공공연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대부분의 교회 신축 건물들은 불법, 탈법에 연루되었을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분명 오늘날 교회가 "바르고 정직한 것", "성실한 것"보다는 "잘 되는 것" 즉 "성공"을 지향한 결과임에 틀림없다. 하나님께서 과연 그러한 성공을 원하시고 인정하실까? 이와같이 교회에 만연해 있는 성공제일주의는 분명 “soli Deo gloria”란 문구에 대한 오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성공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성공은 죄악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공하는 그리스도인보다는 겸손히 최선을 다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을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성공이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정직과 성실을 실천하는 것, 즉 올바른 성공이며, 일의 내용과 과정이 정직과 성실로 채워졌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자신이 살아 계심을 보이기 위해 자신의 정의를 자신의 백성들을 통해 하수같이 이 세상에 흐르도록 하시길 원하신다.  


참된 성공은 인위적인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보상이요 선물이다. 그 보상과 선물은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 있는 것으로 우리가 원하는 때에 주어질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감사의 마음과 겸손의 자세가 없으면 결코 받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라는 사상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의 손에 달린 것도, 우리의 행동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 자신만이 영광의 주체이시며 동시에 그 영광의 대상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받아야 할 영광을 스스로 받으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 사상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심지어 궁극적으로는 사탄의 악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운명론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스스로 받으시되 자신의 모든 피조물들을 통해 받으신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 가운데 특히 인간을 통해 영광 받기를 원하신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통로이며 수단이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자신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으며 우리를 통해 영광 받기를 즐거워하신다. 자신의 영광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영광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역할까지 스스로 정하고 그렇게 하게 해 달라고 때를 쓸 것이다. 예컨대 ‘하나님, 나는 주연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주연이 아니라면 당장 당신의 영광이라는 극장의 무대에서 사라져버리겠습니다.’라는 식의 태도로 하나님을 졸라댈 것이다. 이런 사람은 기도를 어떤 주문이든 들어주는 알라딘의 마술램프로 착각한다. 자신이 주연이고 하나님은 조연이다. 램프의 거인처럼 조연인 하나님은 자신의 막강한 능력을 자신의 각본에 따라 요구하고 지시하는 주연을 위해 사용한다. 얼마나 엄청난 일들을 해내느냐 하는 것은 오직 주연이 잘 짜놓은 각본의 우수성 여하에 달려 있다. 주연은 자신의 든든한 부하장수인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언제든지 자신이 원하고 요구하기만 하면 이루어진다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제 남은 것은 “하면 된다”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일을 추진하기만 하면 된다. 이런 방식으로 성공했을 때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라는 말이 난무하겠지만 결국 그것은 여지없이 “인간 높이기”를 생산할 수밖에 없다. “인간 높이기”의 결과는 하나님께만 돌아가야 할 영광을 특정 인물이 나누어 갖거나 통째로 빼앗아버리게 된다. 자의든 타의든 “인간 높이기”는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이 대신 앉는 것이기 때문에 분명 비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불신앙적이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라는 구호는 하나님 중심 사상을 대변하기 때문에 인간이 주인공이 되는 모든 형태의 인간주체사상을 거부한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있기를 원합니다”라는 하나님 주권사상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수동적인 자세로만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최대한 적극적인 자세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다만 내가 그 빛과 소금의 주체가 아니라, 통로와 도구로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영광의 한 터럭도 탈취하지 않고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만 돌릴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영광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어떤 피조물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받으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인 “우리를 통해” 받으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그 영광의 통로이며 동시에 동참자요 동역자이다. 우리가 그 영광의 도구임을 깨달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모양으로 사용하시든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든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격하고 감사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비천에 처할 줄도 알았던 바울 사도와 같이 우리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이 세상에서 작은 그리스도로서 그리스도의 겸손과 희생적 사랑을 만 천하에 보여줄 수 있는 성령의 사람,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기 위해 부단히 자신을 쳐서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것, 이것이야 말로 코람데오(coram Deo) 정신의 진수요,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진정한 제자도(discipleship), 즉 "자신을 부인하는 삶"이 아닐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