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없이 설교하기?
황대우 목사(고신대학교 교수, 개혁주의학술원 책임연구원)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한국어 단어는 아마도 ‘빨리빨리’가 아닐까 싶다. 외국어를 접할 때 인사말부터 배우기 때문에 ‘안녕하십니까,’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등과 같이 단어들이 가장 먼저 알려지는데, 한국어는 여기에다가 반드시 ‘빨리빨리’가 첨가되던지 아니면 인사말을 익히기 전에 이미 이 단어부터 배우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기도 하는 것 같다. 이런 점에서 ‘빨리빨리’라는 단어는 오늘날 한국을 대변하는 용어일지도 모른다.
‘빨리빨리’는 ‘서둘러야 한다!’ ‘쉬지 말아야 한다!’ ‘앞서야 한다!’ ‘뒤지지 말아야 한다!’ ‘반드시 해내야 한다!’ 등과 같은 의미를 가장 강력하게 대변하는 부사다. 한국 현대사를 한 단어로 요약해야 한다면 ‘빨리빨리’보다 더 적합한 것이 있을까? 그래서인지 한국사회는 지금도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덕분에 한국이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루어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반면에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 라고 했던가? 인생도 역사도 어쩌면 그런지도 모른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 바쁘게 몸을 움직여서 남보다 한 발 앞서면 여러 가지 편리하고 유익한 혜택을 누리게 되지만 그만큼의 여유를 잃게 된다.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기 위해 앞만 보고 달리면 천천히 좌우를 둘러보면서 한 눈 파는 재미를 잃게 된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은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래서 경제 성장이라는 엄청난 대물을 잡았지만, 그 과정에서 동료도, 친구도, 심지어 가족도 잃어버렸다. 잃어버린 것이 어디 그뿐이던가? 예의도, 윤리도, 양심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 ‘성공’이라는 두 글자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성공은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집어삼키는 괴물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철저하게 무장하지 못한 교회도, 목사도 이 괴물 앞에서는 무기력한 희생제물이 되고 말았다. 교회의 규모가 클수록 바쁘고, 큰 교회의 목사일수록 바쁘다. 아니, 거의 모든 교회의 목회 현장은 대부분 분주하다. 담임목사만큼 바쁜 사람이 있을까? 교회 내의 목회 업무만으로도 충분히 바쁜 몸일텐데, 대외적인 일도 결코 적지 않다. 대형교회의 담임목사일수록 대외적인 볼 일이 대내적인 목양 업무보다 훨씬 많다. 이들은 그 많은 업무를 어떻게 다 감당할까?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담임목사는 일주일에 주일 오전과 오후[혹은 저녁] 2번만 설교한다. 그런데 어느 교단의 일부 목사들은 한 편의 설교를 준비하는데 소비되는 시간이 약 15-20시간 정도이므로 설교를 일주일에 한 편만 하도록 줄여달라고 청원한 적이 있었다. 물론 그 청원이 받아들여지진 않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다. 아무튼 설교 한 편을 준비하는데 하루 4시간씩 4-5일 정도 걸린다고 봐야 한다.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담임목사에 비하면 한국교회의 목사들은 거의 최악의 조건 속에서 목회하고 있다. 새벽기도회, 수요기도회, 금요기도회, 주일예배, 주일학교예배 등 설교하는 횟수만 해도 일주일에 최소 10회 정도는 된다. 작은 교회는 담임목사 한 사람이 이 모든 것을 다 감당해야 한다. 이들은 철인인지도 모른다. 네덜란드 개혁교회 목사들이 이런 한국 목회의 현실을 안다면 혀를 내두를 것이다.
하기야 16세기 제네바의 칼빈도 설교를 많이 할 때는 일주일에 8번(주일 두 번, 수요일 두 번, 그리고 월, 화, 목, 금 한 번씩) 했는데, 여기에다가 3번의 강의와 성경공부 1번까지 합하면 일주일에 12번 강단에 섰다. 칼빈도 했으니 우리도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칼빈은 정말 잘 준비된 목회자였다. 그는 성경언어에 능통한 인문주의자였고 그가 목회자로 활동하기도 전에 이미 『기독교 강요』를 출판했다.
물론 우리도 신학교를 학부부터 다니면 7년이요, 강도사와 부목사 경력까지 합하면 최소 십 수 년은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교육과정에서도 성경을 연구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할 뿐만 아니라, 언어 실력도 대부분 빈약하다. 정말 열심히 성경을 연구하여 설교할 준비를 탄탄히 잘 한 목회자들이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대형교회 담임목사들은 도대체 어떻게 그 많은 교회의 목양 업무와 대외적인 볼 일을 감당하면서 동시에 설교 준비까지 한단 말인가? 대형교회의 담임목사는 사실 일주일에 설교하는 횟수가 칼빈처럼 많지는 않다. 오히려 소형교회일수록 담임목사의 설교 횟수는 더 많은 편이다.
대형교회 담임목사는 대부분 일주일에 3-4번 설교하는 것으로 보인다. 가장 비중이 큰 설교는 물론 주일 오전예배 시간이다. 그런데 대형교회 가운데 상당수는 주일 오전예배 시간에 담임목사 설교를 부교역자가 대신 작성해주거나 설교 자료를 준비해주는 것이 점점 보편화되어 가고 있다. 여기서 진일보한 대형교회들은 담임목사의 설교만 작성해주는 전담 부목사를 행정목사나 교육목사 등의 이름으로 뽑고 있다.
그러다보니 중형교회나 소형교회의 담임목사들은 해야 할 설교 횟수와 분량이 많은 것에 비해, 대형교회처럼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설교 준비 시간의 부족분을 채울 방법을 찾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매월 일정액만 지불하면 일정량의 새로운 설교들을 CD나 인터넷을 통해 받는 방법이다.
이와 유사한 것들이 오늘날 다양한 목회 업무로 숨 가쁘게 살아가는 목회자들에게 설교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절약하는 방법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목회컨설팅’이나 ‘설교세미나’와 같은 이름으로 설교를 제공받기도 한다. 그렇다면 설교를 위해 이런 방법이 과연 정상적이고 수용 가능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역사적으로 목회자의 설교 준비를 위한 가장 오래된 방법은 설교집일 것이다. 설교집은 초대교회에도 존재했을 정도로 역사가 깊다. 지금도 유명 설교자들의 수많은 설교집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목회자가 설교준비를 위해 설교집을 사용하는 것은 주석집을 사용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설교를 거의 그대로 자신의 설교에 사용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주석집의 경우도 이런 식으로 사용된다면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설교는 논문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논문에 적용하는 표절 원칙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민하면서 자신의 목회 환경을 고려하여 자신의 것으로 체화되지 못한 내용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설교한다면 그것은 표절의 문제이기 이전에 먼저 설교자의 양심의 문제다. 설교자는 양심상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아마도 이것은 이미 신학 교육을 정상적으로 받은 사람이라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설교 준비를 위해 위에 열거된 현대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확실히 양심의 문제를 넘어선다. 왜냐하면 CD나 인터넷으로 받은 설교들을 사용하는 목회자들 대부분은 그 속의 문단들을 통째로 발췌하거나 같은 본문 설교들을 짜깁기하는 방식으로 설교를 작성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 양심의 문제를 넘어서 표절의 문제가 된다.
목회자들이 다양한 목회 업무 때문에 바쁘다보니 처음에는 거의 매일 감당해야 하는 새벽기도회 설교를 위해 그 방법을 사용하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점점 그 영역이 확대되어 급기야는 주일 오전예배 설교를 위해서도 몇몇 설교를 짜깁기하든지, 아니면 몇몇 문장과 단어만 바꾼 채 거의 그대로 남의 설교를 대독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목회자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확실한 명분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설교 준비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한국 목회자들은 목회 업무로 따지면 아마도 전 세계에서 가장 바쁜 목회자가 아닐까 싶다. 교회 내적인 업무도 만만치 않지만 교회 외적인 업무 또한 생각 외로 많다. 교회가 클수록 담임목사의 대외 업무량은 더 많은 것 같다. 그래서인지 대형교회 담임목사일수록 설교 준비할 시간이 부족하단다. 설교 준비 부족을 채워줄 방법을 찾게 된 결과, 설교 자료를 찾아주는 방법이 선호되다가 이제는 설교를 대신 작성해주는 단계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다.
결국 지금 대한민국 대형교회 담임목사들 가운데는 이처럼 자신을 대신하여 작성한 부교역자의 설교를 자기 말로 조금 다듬어서 설교하는, 거의 대독 수준의 설교를 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는 것으로 안다. 어쩌면 이것이 ‘설교 준비 없는 설교’의 가장 악질적 형태가 아닐까 싶다.
그 다음으로 질 나쁜 ‘설교 준비 없는 설교’는 설교집이든 인터넷 자료든 설교세미나 자료든 다른 사람의 설교를 마치 자신의 설교인 것처럼 그 내용의 반 이상, 아니 거의 그대로 도용하는 것이다. 이런 목회자들도 부지기수다. 이것은 주로 중형 혹은 소형 교회의 담임목사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 가운데 하나다. 어떤 경우는 책 한 권을 거의 통째로 베끼는 경우도 있다. 정말 대담한 목사들이다.
마지막으로는 동일한 본문에 대한 설교 몇 편을 자신의 말로 짜깁기하는 설교다. 이들은 아마도 대부분 대학 다니면서 과제물을 제출할 때 자주 사용했을 짜깁기 기술을 유용하게(?) 써먹는 자들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짜깁기 설교 역시 양심의 문제를 넘어 표절 설교의 전형이다. 이것도 설교 없는 설교의 대표적인 한 형태다.
설교 준비 없이 설교할 수 있는 방법은 둘러보면 정말 다양하다. 이것은 목사를 게으르게 할뿐만 아니라 병들게 한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의 종’(servus verbi Dei)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목사에게 설교는 목회의 꽃이요 생명이다. 그런데 다른 업무로 바빠서 정작 설교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현상이다. 이런 현상에 대한 책임을 비단 목사 한 사람에게만 돌릴 수 없다. 이것은 교회적인 문제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가 교역자들에게 너무 지나치게 행사 중심의 목회를 하도록 요구하거나 방치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교회들은 담임목사의 설교보다는 교회적인 주요 행사와 이런 행사의 결과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교회 환경이 목사의 설교 준비를 게을리 하도록 조장하거나 방관할 뿐만 아니라, 설교 자체를 위기로 몰고 가는 것이 아닐까? 이런 교회들에서 설교의 가치는 설교가 유명 강사의 간증으로 대체될 정도로 형편없이 떨어져 있다. 그래서 들을만한 간증이 어지간한 설교보다 낫다는 인식이 보편화되어 있다.
정말 믿음이 말씀을 들음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설교는 다시 교회 안에서 최고의 자리를 회복해야 한다. 말씀 위에 세워지지 않은 교회는 마치 모래 위에 세워진 것과 같다. 설교를 통해 신자가 탄생하고 이런 신자들이 모여 교회가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진리를 외치는 소리인 설교가 권위를 상실하면 설교자의 권위도, 나아가 교회의 권위도 등달아 떨어질 수밖에 없다. 설교 권위의 상실은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다. 설교 준비 없이 설교하는 목사는 스스로 설교의 권위를 허무는 ‘포도원의 여우’다. 이런 여우를 방치하는 교회는 얼마 가지 않아 영적으로 황폐하게 될 것이다. 교회는 이런 여우를 키우고 있거나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자신을 살펴보아야 한다. 다른 분주한 일들 때문에 설교 준비할 시간이 없다는 핑계는 교회를 죽이는 독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