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황대우
<여성과 종교개혁>이라는 책이 최근 한글로 번역되었다. 그 책은 종교개혁시대 대표적인 여성들의 역할과 활약상을 분석함으로써 그 시대 여성들이 종교개혁과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었는지, 또한 그 시대의 여성관은 무엇이었는지 잘 제시하고 있다. 수도사나 수녀뿐만 아니라 사제도 독신서약을 한 사람들이다.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수도사나 사제 출신들이 대다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독신서약을 한 사람들이었으므로 결혼할 수 없는 신분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결혼했다. 그들의 결혼 상대는 수녀 출신이나 과부인 경우가 많았다. 이런 일은 오늘날 이 시대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다.
종교개혁자들 대부분은 성직자의 독신서약이 비성경적이라고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자가 된 이후 스스로 독신서약을 파기기고 결혼을 감행했던 인물들이다. 독일북부 비텐베르크의 종교개혁자 루터가 그랬고, 독일남부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자 부써(Bucer)도 그랬으며, 스위스 취리히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Zwingli)도 그랬다. 이처럼 1세대의 주요 종교개혁자들이 결혼한 사제였기 때문에 종교개혁의 당위성과 도덕성은 도마 위에 오르기 일쑤였다.
종교개혁자가 되기 전, 루터와 부써는 수도사 출신의 사제였고 츠빙글리는 수도사였던 적이 없는 설교하는 사제였다. 종교개혁자가 된 이후, 부써는 공식적으로 독신서약 파기를 청원하여 허락을 받았으나, 루터는 이미 파문된 상태였으므로 그와 같은 공식적 청원을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고, 츠빙글리는 정치적으로 독립된 스위스 취리히가 이미 종교개혁을 수용했기 때문에 공식적인 청원이 불필요한 환경이었다. 이유나 과정이 어떠했든, 당시 사제의 결혼은 당대 최고의 충격적인 사건이었고, 또한 교황주의자들이 종교개혁의 명분과 의도를 부도덕한 것으로 치부할 수 있는 너무 좋은 빌미거리였다.
종교개혁시대의 여성들 가운데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가 아마도 가장 유명할 것이다. 그녀는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출신이었으나 몰락한 집안 형편으로 가난했다. 그래서인지 5~6살 때 수녀원에 들어가 16살이 되던 1515년에는 정식 수녀가 되었다. 하지만 1523년에는 루터의 계획에 따라 그녀는 자신을 포함한 12명의 수녀가 수녀원을 탈출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수녀원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수녀원을 빠져나온 카타리나는 고향집으로 가지 않고 작센의 수도,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로 왔다. 그녀가 그곳에 도착한 후 사랑을 나눈 첫 연인은 루터가 아니라, 비텐베르크에 유학 온 히에로니무스 바움가르트너(Hieronimus Baumgartner)였다. 하지만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에게 카타리나와 자신의 결혼 포부를 밝혔을 때, 그녀가 가난하고 혼기를 넘긴 수녀 출신이라는 이유로 가족들이 강력하게 반대하자 결혼 계획을 포기하고 말았다. 카타리나는 실연의 아픔 때문에 몸살을 알았으나, 루터의 도움으로 회복될 수 있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결국 1525년 6월 13일(화요일), 루터와 카타리나는 결혼을 하게 되었고, 5명의 하객만 참석한 비공개적인 결혼식이었다. 멜랑흐톤(Melanchthon)도 참석하지 못했다. 루터의 결혼은 교황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에라스무스(Erasmus)와 같은 인문주의자들조차 조롱할 만큼 부도덕한 일로 간주되었다. 교황주의자들은 그 때나 지금이나 이 문제로 종교개혁과 그 지지 세력을 흠집 내기에 분주하다.
결혼은 루터보다 부써가 선배였다. 1521년 4월 29일에 자신의 도미니칸 수도사 신분에서 합법적으로 벗어나 자유인이 된 부써는 1522년 여름, 란트슈툴(Landstuhl)에서 수녀 출신인 엘리자벳 질버라이전(Elisabeth Silbereisen)과 결혼했다. 부써가 임신한 아내와 함께 스트라스부르에 피난 온 것은 1523년 5월이었는데, 그 도시의 시의회는 그 해 11월에 부써에게 시민권을 부여했다. 부써가 시민권을 획득한 것은 결혼한 사제도 한 도시의 시민으로써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된 최초의 선례적 사건이었다. 부써는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결혼과 이혼에 관한 최고의 전문가로 인정받게 되는데, 이유는 그가 최초로 결혼한 사제 종교개혁자였다는 사실보다는 그가 남긴 결혼과 이혼에 대한 긴 논문 때문이다.
종교개혁자가 되기 전, 사제 시절에 추문이 없었던 루터와 부써와는 달리, 츠빙글리는 사제로서 글라루스(Glarus)에서 사역한 10년(1506-1516)과 아인지델른(Einsiedeln)에서 사역한 약 3년(1516-1518) 동안 여자의 유혹을 극복하지 못했다. 순결한 삶을 살겠다는 결심을 제대로 지킨 기간은 단지 글라루스를 떠나기 전 6개월과 아인지델른에 도착한 첫 일 년, 도합 1년 반이 고작이었다. 물론 그는 담당 주교에게 이 문제로 고해성사를 했지만 처벌은 솜방망이에 불과했으므로 어떤 제제 효력도 없었다.
츠빙글리의 사제 시절 추문은 취리히 대성당 주임사제로 청빙을 받았을 때 당연히 문제가 되었다. 주임사제를 뽑을 권한을 가진 취리히 대성당 참사회는 조사에 착수했고 그에 관한 추문은 곧 사실로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츠빙글리 자신도 자신에 관한 추문을 인정하는 내용의 편지를 참사회 앞으로 보내었다. 이런 추문은 당시 사제들에게 일반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청빙 자체를 무효화할 만큼 심각한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참사회는 츠빙글리와 또 다른 후보자 한 명을 놓고 표결에 붙였고, 24표 가운데 17표를 얻은 츠빙글리가 다른 후보자를 누르고 최종 청빙의 수혜자가 되었다. 경쟁자는 츠빙글리보다 훨씬 심각한 추문의 주인공, 즉 여섯 명의 자녀를 둔 사제였다. 따라서 투표 결과는 최선이 아닌 차선의 승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리히 시의 청빙은 츠빙글리에게 그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경쟁자에 비해 츠빙글리는 설교를 잘하고 예의 바르고 외모가 준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츠빙글리의 바람기는 취리히의 주임사제로 부임한 1519년 1월 1일 이후로 사라졌다. 취리히 참사회의 용서가 츠빙글리의 인생에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했다. 1522년에 그는 9년간 과부로 살던 안나 라인하르트(Anna Reinhard)를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여 은밀한 결혼식을 올렸지만, 이 사실을 공적으로 인정한 것은 1524년 4월이었다. 약 2년 동안 자신의 결혼 사실을 숨긴 것은 아마도 자신의 사적인 문제로 인해 취리히의 종교개혁이 위협을 받지나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당시 교황주의자들이 우는 사자처럼 종교개혁을 물어뜯을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것은 분명 사실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루터와 츠빙글리는 자신의 결혼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그들은 비밀스럽게 결혼식을 치렀다. 이러한 행동은 성직자의 독신서약이 부당하고 결혼이 정당하다고 주장한 그들의 당당한 글만큼 그들의 결혼이 떳떳하거나 당당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그리고 이런 행동이 종교개혁에 직간접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종교개혁이 결정적인 수세에 몰리게 된 것도 결혼 문제였는데, 그것은 종교개혁의 막강한 지지자 헤세(Hesse)의 영주 필립(Philiph)의 중혼, 즉 이중결혼 사건이었다. 루터를 비롯하여 멜랑흐톤과 부써는 필립의 중혼을 눈감아 주었으나, 결국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중혼 사건은 황제의 로마군과 맞서 싸우는 개신교 연합군의 지도자 헤세의 발목을 잡았고, 슈말칼트 전쟁에서 개신교 연합군이 패배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이 패배는 종교개혁의 확산을 멈추어 서게 만든 분수령이 되었다.
죄악이 관영한 세상 어디에도 완전한 사람은 없다. 우리가 존경해마지 않는 종교개혁자들조차도 이 점에서는 예외기 아니다. 그들 역시 죄의 영향 아래 있는 죄인이었고 허물 많은 사람들이었다. 예컨대, 개신교를 지지하는 막강한 정치가라는 이유로 헤세의 중혼을 눈감아 준 것, 당시 젊은 사제가 순결을 지키기 어렵다는 이유로 일반화 된 나쁜 관행을 따라 성욕에 휘둘린 것, 결혼을 당당히 공개하기를 주저하여 비밀스럽게 진행한 것 등과 같은 사건들을 통해 우리는 종교개혁자들도 약점을 지닌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종교개혁자들의 주장대로 성직자들이 독신서약을 통해 평생 순결을 지키도록 하는 일은 너무 가혹할 뿐만 아니라, 성경적인 가르침도 아니다. 그들에게 결혼을 허용해야 하고, 나아가 결혼한 성직자가 더 성경적인 목회자상과 부합한다는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은 옳다. 하지만 떳떳하지도 당당하지 못한 그들의 행동이 그와 같은 그들의 바른 주장에 의해 상쇄되거나 정당하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잘못한 것은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것이 더 기독교적이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진정으로 뉘우칠 때 용서하는 것 또한 기독교 교리의 정수다.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진정한 회개와 용서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잘못을 잘못이라 쉽게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도 한번 실수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 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보다 더욱 용서를 체질화하도록 훈련해야 하지 않을까? 진정한 회개와 진정한 용서는 사람을 새롭게 하는 성령의 능력이다. 진정한 회개와 용서가 필요한 시대다.
*위 글은 <생명나무> 2015년 4월호와 인터넷신문 "개혁정론"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