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윌버포스
윌리엄 윌버포스. 그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그에 관한 책이 역간된 것은 물론이고 그의 여정을ㄹ 그린 영화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현재 상영중이다.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일생을 싸웠던 인도주의적 정치가,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그리스도인. 그가 영국의회 역사상 최연소 하원의원이었던 윌버포스였다..
노예무역(slave trade)이라는 추악한 인신매매가 언제 시작되었는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처음에는 이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았으나, 국부(國富)에 도움이 된다는 인식과 함께 이를 인정하는 추세로 돌아섰다. 급기야 1631년과 1633년, 그리고 1672년의 국왕의 칙서와 1698년 영국의회에 의해 노예무역이 합법화 되었다. 1660년 왕정복고 후 영국왕 찰스 2세가 매년 3천명의 노예를 서인도제도로 판매하는 회사 설립의 허용은 노예무역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영국에서의 노예무역은 급속히 증가하였고, 1770년 한해의 경우 아프리카에서 잡혀간 노예는 약 10만명에 달했으니 그 비인도적 인간 상실은 극에 달했다. 1783년부터 1793년까지 10년간 리버풀의 노예 무역선은 30만 3천 737명의 노예들을 서인도제도에 공급하여 15,186,850파운드, 곧 현재의 시가로는 약 4천 5백억원의 수입을 얻었다고 한다.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노예무역이 시작된 후 150여년 간 약 200만-300만명이 노예로 잡혀간 것으로 파악된다. 잡혀간 노예들은 열악한 항해 환경과 비인간적인 처우로 25%가 항해도중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두 명씩 쇠사슬에 묶인채 갑판에 결박되어 무더위와 비바람을 맞으며 거친 바다로 내 몰렸고, 늙었거나 불구인 경우는 쓸모없다고 죽이는 경우가 허다했다. 여자들은 공개적으로 강간을 당하기도 했다.
노예무역이라는 인간 학살의 긴 여정은 오직 한 가지 목적 때문에 끈질기게 이어졌다. 인간성을 파괴했고 양심을 물들게 했던 그 목적이란 바로 돈이었다. 국가 지도자, 국회의원, 법관, 무역업자, 사업가들은 이해당사자였기에 노예제도의 폐지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교회나 종교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1780년 10월 21세의 나이로 하원의원이 된 윌버포스는 거대한 조직과의 지리한 싸움을 시작했다. 27세가 되던 1787년 10월, 그는 이렇게 썼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두 가지 목표를 주셨다. 하나는 노예무역을 금지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영국 사회의 악습을 개혁하는 일이다.” 그는 탄원서 제출, 설탕불매운동, 책자출판, 노예제도 반대 여론 형성 등을 통해 노예무역의 부당성과 비도덕성을 드러냈다. 그는 무려 11번이나 노예무역 폐지 법안을 의회에 상정했으나 번번이 부결되었고, 갖은 비난과 중상모략을 감수해야 했다. 두 번에 걸친 암살 위협도 그를 위협했다. 그러나 정의를 위한 그의 20여년 간의 싸움의 결과로 1807년 2월 23일 드디어 영국하원에서 “노예무역폐지법,” 곧 노예무역을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이것은 미국보다 30여년 앞서는 노예폐지운동의 결실이었다. 제18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 지금, 오늘 우리에게는 윌버포스 같은 정치인이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