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 안에 있는 “트로이 목마”는 무엇인가?
- 프래그머티즘 -
이 환 봉
“실용주의”(Pragmatism)는 현 정부가 “중도 실용주의” 또는 “창조적 실용주의”를 표방하면서부터 오늘 한국 사회의 중요한 논제와 화두가 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 그리고 안보 등에 나타나는 양극적 대립을 해소하고 해묵은 현실적 난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정책 철학과 코드로 주목을 받고 있기도 하다. 국민들은 이러한 집권 여당의 정강 정책이 우리 사회에 정약용의 “실사구시”(實事求是)와 같은 실용적 효용성을 더 한층 높여 줄 것으로 기대하기도 한다.
그러나 “프래그머티즘”은 단순히 만족할 만한 실용적 효과를 추구한다는 실천적 담론(談論) 그 이상의 실재와 진리에 대한 근본적 원리로서 인간 삶의 방향과 내용을 결정하는 철학적 가치체계이다. 무엇보다 실용주의는 진리의 존재성 보다는 진리의 효과성에 우선적 가치를 둔다. 현실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만족할만한 실용적 효과를 산출할 수 있느냐가 진리판단의 기준이 되어있다. 다시 말하면, 진리성 여부가 현실적인 행복과 만족을 증진시킬 수 있는 “작용 가능성”(workability)과 “현금 가치”(cash-value)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모든 진리는 결과에 의해 결정된다는 철학이다.
이러한 실용주의가 교회와 신학 안에 도입되어 적극적 사고방식에 의한 자아실현을 강조하는 “자존의 신학”(self-esteem theology)과 현세적 성공에 대한 확신을 강조하는 “번영의 신학”(prosperity theology)으로 발전되었다. 문제는 실용주의 철학이 현대 목회자들의 목회 실천적 사고와 판단 속에도 점차 보편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로 교회가 신앙의 기초를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인간의 경험과 대중의 견해 그리고 만족한 효과에 두게 되고, 신앙의 초점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보다는 인간의 부와 건강 그리고 번영에로 옮기고, 그리고 신앙의 결과적 효과를 거룩한 삶에 대한 하나님의 표준인 성경의 원리와 질서보다 더 중요시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의 학문과 지식을 앞세우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을 예수 그리스도보다 현세적 성공과 축복에 두며, 그리고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보다 항상 결과가 어떻게 산출될 것인가를 더 중요시하게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현실적으로 하나님 중심의 판단보다는 인간 중심의 판단을 정당화하고, 또한 실천적으로 성경의 원리보다는 현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다. 원리적으로는 말씀의 논리를 앞세우지만 현실적으로 문제에 직면하면 접근방식과 해결책의 선택은 늘 현실의 논리를 따라 가고 있다. 따라서 교회와 교단의 중요한 결정들도 말씀에 기초한 개혁의 논리보다 현실에 기초한 정치의 논리를 따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교회의 법과 원리와 질서도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의 논리와 요구에 부합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유보하거나 거부해버릴 수 있다. 그에게 교회의 권위는 이용하는 권위일 뿐이지 순종해야만 하는 권위는 아니다. 실용주의의 망령이 원칙에 현실을 맞추는 어려움에서 벗어나 현실에 원칙을 짜 맞출 수 있는 자유를 제공해 주고, 또한 현실적 요구와 효율적 결과가 불법적인 행위와 과정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우리 공동체와 사회가 혼란을 피하고 현실적인 안정 가운데 영예로운 발전을 거듭하려면 명백한 불법과 불의일지라도 적당히 덮어두고 지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거악을 막기 위해 소악을 용납하자는 현실적인 타협안이 힘을 얻는다. 문제 해결을 위한 절충주의(Eclecticism)의 세속적 지혜가 대중의 환영과 지지를 받는 유능한 지도자의 덕목이 되어 있다. 오늘날 교회 중에도 성경의 원리와 질서를 저버리고 정치적인 현실논리를 따라 불법을 정당화하는 지도자가 있다. 그러나 사실상 그는 세속적 포퓰리즘(Populism)을 추구하는 기회주의자일 뿐이다.
현대 사회의 사람과 일에 대한 평가도 실용주의적 가치와 효능의 기준에 따라 이루어진다. 소위 지도자들이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을 극복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까다롭게 법과 원칙을 따지지 말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협력해야 한다고 일장 설파를 한다. 이처럼 동기와 과정의 윤리성을 질문하지 않고 결과만을 따지는 성공 지상주의의 성향이 오늘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사람이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떠한가. 일 잘해서 모두가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 아닌가.” 그래서 오늘 많은 사람들이 군사정권의 개발독제에 대한 향수를 느끼고 있고, 이제는 그 역사적인 정당성도 인정해야 한다는 소리를 높이는 것 아니겠는가. 또한 사회 지도층의 불법적인 병역기피와 위장전입도 계속 되는 것 아니겠는가.
심각한 문제는 실용주의 망령을 좇아 생각하는 것과 행하는 것에 있어 교회도 세상 사회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에 있다. 교회 안에도 법과 원리를 무시하고 질서의 중요성을 짓밟아도 그 모든 것들이 현실 우선의 가치와 성공 지향적 논리에 의해 정당한 것으로 합리화되고 있다.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를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라는 등소평의 실용적 기능주의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의 결과 지상주의는 결코 성경의 가르침일 수 없다. 기독교 윤리는 어떤 일의 동기와 과정과 결과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정당해야 할 것을 요구한다. 참으로 성공한 사역은 항상 정당한 사역이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나무는 나쁘나 열매는 좋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다.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마12:33).
오늘날 실용주의는 포스트모던이즘(Postmodernism)과 결합하면서 현대 사회의 불확실성에 대한 유일한 대안으로 현대인들의 사고와 판단을 거의 장악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늘 교회도 이러한 시대적 풍토병에 걸려 휘청거리며 마침내 그 거대한 실용주의의 위력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은 아닌가? 누구보다도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성장의 힘겨운 과제와 교회갈등의 거센 소용돌이 속에서 점차 소위 “거룩한 실용주의”라는 손쉬운 탈출구를 찾아 “현실”이라는 위장논리에 점점 익숙해져 가는 것은 아닌가?
한국교회 성장은 막다른 골목에 접어들었고 목회 현실은 더욱 어렵고 복잡해져 가고 있다. 오늘 우리 교회가 항해해 가는 바다는 포스트모던이즘이라는 해류가 요동치고 후기 자본주의의 소용돌이와 다원주의의 안개로 가득 차 있다. 우리 모두 이 흉흉한 바다 속에서 쉽사리 방향을 잃어버리고 그저 떠밀려갈 수밖에 없는 위기적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와 교회가 혼란과 위기에 처할 수 있다고 해서 바른 길과 원리도 외면하고 세상의 조류를 따라 눈앞의 현실만을 좇아간다면 우리는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하고야 말 것이다.
우리는 문제가 어려울수록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벼랑 끝 상황에 처할수록 본질적인 원리와 임무를 붙들어야 하고 기본적인 윤리와 요구에 충실해야 한다. 우리의 조상이 누구인가! 우리도 개혁자들처럼 골리앗 같은 세상의 완고한 현실의 논리를 돌파하는 변혁의 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온갖 현실논리의 탈을 쓰고 나타나는 현실의 압력에 맞서 질문하고 또 질문하여 마침내 현실의 벽을 뛰어 넘고 돌파해 나가는 개혁자의 후예들이어야 한다. 때로는 진리와 거룩을 붙잡기 위해 희생을 각오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는 자리에 설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 교회는 개혁교회로서의 안전한 자리매김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 교회의 이곳저곳에서도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세상의 거짓 사상과 위장논리들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죤 맥아더(John F. MacArthur) 박사는 실용주의의 현실논리를 교회 안의 “트로이 목마”(Trojan Horse)로 비유하였다. 오늘 교회 안에 자리 잡은 그 목마 속에 감추어져 있는 복병들의 공격으로 교회가 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이다. 말씀에 기초한 법과 원리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개혁해 가야할 교회가 만일 어느 한 개인과 작은 집단의 이익을 위해 세속적 실용주의의 망령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현실논리로 바라보고 판단한다면 그 교회는 소망이 없는 것이 아닌가?
"미션"(Mission)이라는 선교 영화에서 한 종교 지도자가가 정치적 현실논리를 따라 원주민 대학살을 승인한 후에 푸념 속에 악한 세상 구조를 탓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주어진 양심의 소리는 “아닙니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아니 바로 내가 그렇게 만들었습니다”라는 고백이었다. 오늘 우리도 교회 안으로 "트로이 목마"를 끌어들인 불행한 교회사의 주역들이 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