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하는 그리스도


-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 되어 신학하는 사람이 되자! -




                                                                          이환봉 교수




한국 교회는 그 경이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와 문화 속에 보다 완숙한 차원의 기독교 문화를 창출해 내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교회가 복음과 문화를 분리하여 생각하고, 영적 부흥과 실제적 삶을 연결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복음적 신앙을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실천 또는 역동화하지 못함으로 복음의 능력을 무력화 내지는 화석화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그리스도인 개인의 신앙과 생활 속에서는 더욱 심각하게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적인 신앙고백을 자신의 실재적인 삶에 적용하지 못하고, 신앙과 생활의 이중적인 틀 속에서 끝없는 갈등과 혼동 그리고 무기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예배당 안에서의 “아멘!”이 일상생활의 현장에서의 “아멘!”으로 연결되지 못한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직도 영적 유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 유아들은 자신의 생활을 능동적으로 이끌어 가거나  그들의 가족과 공동체의 가치형성에 실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여 변화를 가져 올 수도 없다. 성숙하여 장성한 사람들이 될 때 비로소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국가와 세상 속에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도 영적으로 성숙하여 온전한 사람들로 그리스도의 충만에 까지 이르러야 한다(엡 4:13).


우리는 단순한 믿음과 전적인 신뢰를 특징으로 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막 10:15)은 늘 유지해야 하지만, 그러나 항상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히 5:12) 유아적인 신앙에 계속 머물러서는 안 된다. 오늘날 교회 중에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로 부터 다시 가르침을 받아야할 유아들이 많이 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어렸을 때에는 말하고 깨달으며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기 위하여서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만 한다. 제자는 그리스도의 학교에 입학하여 하나님의 지식을 날로 새롭게 배워가는 자이다. 그래서 “의의 말씀을 경험”하고 장성한 자들이 되어 단단한 식물도 먹으면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히 5:13-14)이 되어야 한다.


특히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전 14:20)고 권면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 보다 성숙하여 갈 것을 권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곧 “신학”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신학자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신학은 우리 영혼의 양식을 제공한다.




그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정으로 가득 찬 영혼은 먼저 그 지성이 하나님의 성품과 뜻을 온전히 깨달아 알아야 한다. 먼저 내 머리 속에 있지 아니한 그 어떤 것도 내 마음 속에 있을 수 없다. 내가 전혀 모르는 어떤 사람을 우리가 정말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내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내가 하나님을 보다 더 온전히 알면 알수록 그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나의 능력은 더 크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고 하셨을 때에 그 “뜻”은 “생각하는 기능, 지성, 이해”를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온전히 알기 위하여 신학하는 것은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구체적인 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올바른 하나님 지식의 추구를 위한 신학연구의 노력은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하나님 지식이 영적 성장을 위한 “충분조건”이라는 것은 아니다. 필수조건이라는 것은 바라는 결과가 일어나기 위하여 꼭 있어야만 하는 조건을 말한다. 그것 없이는 그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산소(oxygen)는 불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그러나 산소가 있다는 것만으로는 불이 발생할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보장할 수 없다. 이 사실은 사실상 우리에게 천만다행한 일이다. 왜냐하면 만일 산소가 자동적으로 불을 일으킨다면 온 세상은 곧 화염에 휩싸이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산소는 불을 위해 꼭 필요하지만 그 자체만으로 불을 만들기에 충분한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체계적 지식(신학적 지식)은 영적 성장을 위한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영적 성장을 위해 꼭 있어야할 필수조건인 것이다. 궁극적으로 성령께서 은혜로 우리 마음속에 불 붙여 주셔야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분명히 기억할 것은 참된 하나님 지식이 없이는, 신학하지 않고서는, 신학하는 사람이 되지 않고서는 바람직한 영적 성장도 온전한 신앙생활도 불가능하며 구원(성화)을 온전히 이룰 수도 없다는 것이다. 실로 하나님을 먼저 바로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을 바로 믿을 수 없으며 하나님을 바로 믿지 않고는 영생에 이를 자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영생이라고 한 것이다(요17:3).


그 외에 성경 여러 곳에서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이는 참된 믿음도 구원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롬10:17, 롬1:16, 마28:19-16, 요17:17, 엡6:17, 살후2:16).




하나님은 우리가 부지런히 신학을 연구하도록 명령하셨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있어 진보가 있어야 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고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권고하였다. 이것은 우리의 지식으로 교만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고 은혜 안에서 날로 성장하게 하기 위함이다. 성숙한 지혜는 성숙한 생활을 위한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성숙한 영적 생활을 통하여 마침내 그리스도의 충만에 이르기까지 장성해 갈 것을 명령하신다(엡4:13).


우리 인생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영원히 가장 큰 즐거움을 주고 기쁨을 주며 만족을 주는 것도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 자랑할 것도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나를 아는 것과...깨닫는 것이라”(렘9:23-24). 이처럼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의 놀라운 특권인 동시에 우리의 거룩한 의무이기도 하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은 이러한 우리의 의무를 잘 말씀해 주고 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 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6:4-9)


하나님의 율법을 부지런히 가르치고 배워서 하나님의 계시에 능한 자들이 될 것을 명령하고 있다. 보다 더 분명하고 높은 수준의 성경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진리를 전체적인 상호관계 속에서 조직적으로 연구해야만 한다. 그래서 성경은 성경진리에 대한 철저하고도 포괄적인 연구(요5:39), 상이한 부분들의 비교와 조화(고전2:13), 그리고 계시의 큰 중심적 사실(골1:26-27)에 유의함으로 보다 온전한 하나님 지식에 이르도록 명령하고 있다.


그러나 요사이 대부분 교회의 성경공부가 성경 개별 본문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와 구체적인 적용에 치중함으로 성경전체와 하나님의 포괄적인 뜻(the whole counsel of God)에 대한 이해가 어려워져 가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한 교리적 또는 신학적 연구의 필요성에 대한 교회들의 새로운 인식이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건전한 삶이 없어도 건전한 신학이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건전한 신학이 없이는 건전한 삶을 결코 보장할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학은 하나의 추상적인 학문이 아니라 바로 인생의 삶과 죽음 그리고 영원한 삶과 영원한 죽음의 문제이다. 만약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건전한 하나님 지식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단순한 부끄러움 그 이상의 매우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떠나 사는 것은 곧 죽음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고로 신학연구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좋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필수적인 존엄한 의무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