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9년판을 필두로 이후 계속 개정증보 되다가 칼빈 사망 2년 전인 1562년에야 비로소 시편 150편 모두가 개작된 제네바 시편찬송집이 완성본으로 출간되었다. 이 시편찬송집에는 모두 124개의 곡조가 사용되었는데, 104개의 곡은 하나의 시편을 위해 사용되었고, 15개는 두 편, 4개는 세 편, 1개는 네 개의 시편을 위해 사용되었다. 1551년판 제네바 시편찬송집에서 마로가 개작한 50개 시편의 곡조는 루이 부르주아(Louis Bourgeois)가 작곡한 것이고, 베자(Beza)가 개작한 34개 시편의 곡조는 부르주아가 작곡한 것과 편집한 것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머지 40개의 곡조는 최종 완성판인 1562년에 나타나는데, 이것은 마이트르 삐에르(Maitre Pierre)가 작곡, 혹은 차용한 것들로 간주된다.
종교개혁 이후 제네바에서 예배시간에 불리기 시작한 시편찬송은 제네바 종교개혁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네덜란드 개혁교회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통해 개혁주의교회의 전통이 되었다. 대부분의 개혁교회가 지금까지도 이러한 시편찬송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반면에, 대부분의 장로교회는 시편찬송의 전통을 포기했다. 시편찬송도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천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네덜란드의 개혁교회들 사이에서도 서로 다른 것을 사용한다. 아직도 시편찬송을 사용하는 장로교회는 네덜란드 개혁교회가 사용하는 것과 다른 곡조들도 많고 편곡도 많다.
우리가 주지할 필요가 있는 것은 처음부터 시편찬송집에는 시편이 아닌 일반 찬송가도 들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개혁주의 신학이 시편만을 ‘유일하게 합당한 찬송’으로 고집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시편찬송은 칼빈의 ‘오직 성경’의 원리와 부합하는 전통이다. 칼빈은 성경에서 근거를 발견할 수 없는 예전, 즉 예배형식을 인간이 발명한 위험한 전통으로 보았다. 그래서 예배를 위한 찬송도 성경 속에서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시편 절대주의를 고집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특별한 날의 특별한 예배, 가령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경우 독립기념주일의 예배시간에 애국가를 부르는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칼빈에 따르면 예배를 위한 찬송으로서의 시편은 다른 어떤 찬송보다 탁월한데, 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찬송의 가사는 히브리어에서 직역된 불어성경의 내용을 그대로 차용하지 않고 운율에 맞추어 재해석한 내용으로 의역되었다. 또한 이 가사는 시대와 언어에 따라 조금씩 변천되기도 했다. 거의 모든 시편은 내용상 기도다. 그래서 찬송을 곡조 있는 기도라고 하는 것이다. 시편들은 기도이면서 동시에 신앙고백이기도 하다. 신앙적인 삶에 대한 노래가 시편이다.
한국교회는 시편찬송보다는 일반찬송, 즉 찬송가의 노래가 먼저 소개되었다. 찬송가는 18-19세기에 작사 작곡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우리나라 작곡가들의 찬송가는 20세기에 속한다. 이러한 찬송가는 전도를 위해 작사 작곡된 노래 가사가 많은 것이 특징이긴 하지만, 대부분 시편처럼 기도와 신앙고백 등 신앙적인 삶을 노래하는 것이다. 시편이 성경말씀인데 반해, 찬송가는 그 시대의 신앙적인 산물이다. 때로는 현실에 맞게 찬송 가사도 적절하게 개작될 필요가 있다. 시편찬송도 그러했듯이.
개혁주의를 지향하는 교회는 반드시 예배시간에 시편만 불러야 하는가? 시편찬송만이 예배를 위한 유일한 찬송인가? 예배시간에 시편찬송을 부르지 않으면 개혁교회라 할 수 없는가? 시편찬송을 부르지 않고 찬송가를 부르는 장로교는 더 이상 개혁교회의 전통을 따르지 않는 것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반대로, 예배시간에 시편찬송만 부르면 개혁교회다운 것인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전통을 소중히 여기고 따르는 것도 필요하고, 전통을 시대에 맞게 지혜롭게 조정하는 것도 필요하다.
시편찬송은 아직 한국에 제대로 소개되어 있지도 않고, 더더욱 보편적 정서와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시편찬송을 부르는 것은 여전히 어색하고 서툰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시편가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것을 사장시키는 일은 불행이다. 그리고 우리의 시편 번역은 시답지 못한 것이 대부분이다. 시적인 운율을 살리고, 또한 이것을 적절한 곡조에 붙여 노래 부르는 것도 필요하다. 물론 16세기 제네바 시편의 전통을 맛보는 것도 권장할만한 일이다. 이렇게 할 때 반드시 지혜가 발휘되어야 할 것이다. 시편찬송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즉 시편찬송만을 고집하는 것은 단순히 현재 한국교회의 현실을 무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교회일치라는 개혁주의의 더 중요한 정신을 파괴하는 것이다.
먼저 시편찬송이 어떤 점에서 얼마나 좋은 것인지 여러 통로를 통해 알려야 한다. 그리고 조금씩 시도하고 차츰 바꿈으로써 찬송의 보편적 정서를 만들어가야 한다. 시편을 위한 곡조는 옛날 것 그대로를 차용해야 하는 것인가?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특히 한국교회의 찬송가 전통은 이미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고, 이외에 복음성가들도 널리 보급되어 있다. 시편을 찬송가의 가사로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일은 반드시 추구되어야 하겠지만 곡조도 옛날 그대로여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물론 그 중에 좋은 것들은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 물론 편곡도 가능하리라 본다.
결론적으로, 반드시 시편찬송을 불러야만 개혁교회의 전통에 서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개혁주의 전통을 편협하게 하고 왜곡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때론 개혁주의 전통을 무시하고 이탈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칼빈은 시편찬송만이 예배를 위한, 예배시간에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찬송이 되어야 한다고 찬송의 범위를 제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시편을 “영혼의 각 부분에 대한 해부”(ανατομην omnium animae partium)라고 정의하는데, 이것은 시편이 우리 영혼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분석하고 가장 알맞은 처방으로 가장 유익한 것을 제공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이미 성령께서는 인간의 영혼을 습관적으로 내던져버리는 슬픔, 비탄, 두려움, 의심, 소망, 걱정, 동요 등으로 말미암아 결국 혼란에 빠져버린 모든 자들을 생명으로 인도하셨다... 진실한 기도는 먼저, 우리의 필요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나오고, 그 다음에는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나온다. 여기서 독자들은 자신의 악을 가장 잘 깨닫기 위해 추구되어야 하는 치료법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만큼 배우게 될 것이다. 또한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기도를 받으실 곳에서 우리를 새롭게 하기 위해 만드실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 책 속에 있다.”
* 이 글은 "개혁정론"에 기획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