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개혁파 신학교
작성자: 황대우
‘최초의 개혁파 신학교’하면 혹자는 ‘제네바 아카데미’를 떠올릴지 모른다. 하지만 최초의 개혁파 종교개혁지인 스위스 취리히를 감안해야 한다. 취리히 종교개혁자 츠빙글리는 성경 한 권을 본문으로 선택하면 1장부터 시작하여 마지막장이 끝날 때가지 연속적으로 성경 말씀을 해설하는 방식의 ‘연속강해’(lectio continua)라는 획기적인 설교 방법을 탄생시켰다. 츠빙글리는 1519년 1월 1일 35회 생일에 취리히 대성당 시민 사제직에 취임한 후, 마태복음 1장부터 강해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연속강해’의 기원이 되었다. 이러한 연속강해 방식은 교회력에 따른 절기설교나 신학 논제에 따른 주제설교와 다른 방식이었다. ‘연속강해’는 신자 개인과 교회의 모든 것을 오직 성경의 권위에만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츠빙글리는 이와 같은 연속강해 방법을 취리히 종교개혁에 정착시키기 위해 다른 동료 목회자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훈련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1520년 여름 이후 다른 동료들과 함께 공적인 연속 강해 설교 외에도 사적인 모임을 통해 연속강해 방식으로 성경공부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1525년 6월 19일에는 성경 주해와 더불어 신학적 교리를 해설하는 모임을 공식적으로 개설했는데, 이것이 바로 ‘프로프짜이’(Prophezei)였다. ‘프로프짜이’라는 이름은 고린도전서 14장, 특히 1절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말씀에서 기원된 것으로, ‘예언모임’이나 ‘예언연구회’로 번역될 수 있는 성경연구모임이었다. 이 모임은 취리히 대성당 참사회실에서 개최되었고 구성원, 즉 참석자들은 “모든 목사들과 설교자들과 참사회원들과 고학년 학생들”(alle Pfarrer, Predikanten, Chorherren und größeren Schüler)로 이루어졌다. ‘프로프짜이’는 일주일 가운데 예배일인 주일과 장날인 금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오전 8시에(여름에는 오전 7시에) 시작되었다.
‘프로프짜이’의 순서는 다음과 같았다. 먼저 츠빙글리가 강단에 올라가 기도한 후, 학생 한 명이 라틴어 번역성경 불가타(Vulgata)를 낭독하고 나면, 세 번째 사람이 동일한 본문의 히브리어 성경을 낭독했다. 그런 다음 네 번째 사람이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 성경 셉투아긴타(Septuaginta)의 본문을 낭독한 후 본문의 의미를 요약하고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그리고 다섯 번째 사람이 나와 낭독한 본문을 라틴어로 설명하고 나면,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 사람이 나와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일반 시민들을 위해 독일어로 해설하고 구체적인 적용까지 제시하는 설교를 했고 긴 중보기도로 마무리 했다. 마지막 순서는 대부분 레오 유트(Leo Jud) 혹은 카스파르 메간더(Kaspar Megander)가 담당했지만 때로는 츠빙글리 자신이 맡기도 했다.
이 예언모임은 취리히의 모든 성직자들이 반드시 참석하도록 규정함으로써 목사양성 기관의 역할을 감당했다. 또한 외국의 학자들도 참석할 수 있었고 이들도 질문과 의견 제시가 가능했으므로 완전한 신학교(Seminary) 형태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비록 취리히의 예언모임이 성직자들에 의해 주도된 모임이었고 목회자들과 설교자들의 참여가 의무적이었으며 그들을 위한 성경해석과 신학교육이 주요 목적이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해석과 신학에 관심이 있다면 학생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즉 도시의 시민들인 일반교인들도 참석할 수 있는 열린 모임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것은 확실히 일정한 커리큘럼의 학위과정과는 다른 것이었다.
취리히의 ‘프로프짜이’는 성경을 가르쳐야 할 성직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성경과 성경에 근거한 교리를 알고자 하는 일반 교인에게 말씀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는 점에서 그것이 16세기 취리히 교회를 위한 성경공부모임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 모임의 주된 목적이 성직자들과 라틴어 학교 고학년생들에게 신학적인 틀을 제공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반 교인들의 참여가 배제되거나 금지된 것은 아니었지만 일반 교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이 예언모임의 위치는 오늘날 초등-중등학교에 해당하는 라틴어학교와 중세 시대의 대학 사이에 있었다. 당시 라틴어학교는 도시마다 설립되어 있었으나 대학은 많지 않았다. 중세 대학은 지역을 다스리는 왕족이나 귀족, 혹은 교황이 설립할 수 있었고, 교황의 최종 승인 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리고 중세 신학교가 대학의 최상위 과정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프로프짜이’를 정식 신학교라고 보기는 어렵다. 종교개혁자들은 종교개혁 신앙을 가진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한 새로운 교육과정, 즉 대안(代案) 신학교가 필요했는데, 취리히의 ‘프로프짜이’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러므로 취리히의 예언모임은 일종의 대안 신학교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늘날 목회자를 교육하고 양성하는 신학교의 기능과 유사한 역할을 감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프로프짜이’는 최초의 개혁파 대안 신학교라고 볼 수 있다. 또한 19세기에 설립된 취리히대학교의 전신이기도 하다.
비텐베르크의 종교개혁자 루터는 이러한 대안 신학교 설립을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이유는 이미 팔츠의 선제후 현자 프리드리히(Friedrich)가 1502년에 비텐베르크대학을 설립했고 루터 자신이 그 대학의 성경 교수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루터는 종교개혁 이후 비텐베르크대학의 커리큘럼(curriculum)을 대대적으로 개편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 반면에 츠빙글리의 취리히에는 그런 종류의 고등교육기관이 없었다. 그래서 대안으로 예언자 즉 말씀을 가르치는 설교자들을 교육하고 양성하는 공식 교육기관, 즉 ‘프로프짜이’를 설립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개신교에서 신학교를 ‘선지학교’라고 지칭하게 된 최초의 역사적 근거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고려신학대학원에서 발행하는 ‘선지동산’이라는 잡지의 이름은 역사적으로 16세기 취리히의 ‘프로프짜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츠빙글리는 취리히 종교개혁 초기부터 이미 성경의 연속강해를 통해 주일 예배 시간에 자국어 설교, 즉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 설교를 제공했으며 장날인 금요일 이외의 평일에도 그와 같은 형태의 독일어 성경 해설을 제공하기 위해 정기적이고 공식적인 모임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예언모임이었다. 예언모임은 츠빙글리 생전에 구약만 다루었는데, 츠빙글리의 후계자 불링거(Heinrich Bullinger)의 증언에 의하면 예언모임이 구약 전체를 모두 다룬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프로프짜이’의 가장 중요한 열매인 취리히 성경이 독일어로 번역 출간되었는데, 이 일은 1531년에 일어났다.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애가는 츠빙글리가 번역했고 나머지는 그의 동료들이 번역했다.
한편 오전의 예언모임과는 별도로, 오후에는 신약성경에 대한 강해 모임이 츠빙글리의 동료이자 최초의 츠빙글리 전기 작가 미코니우스(Oswald Myconius)의 주도로 성모마리아 성당의 참사회실에서 진행되었는데, 1526년 이후에는 츠빙글리도 이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여하여 최소한 한 주에 한 번 정도는 신약성경을 강해한 것으로 밝혀졌다. 오후의 이 신약성경 강해 모임이 구약성경을 연속적으로 강해한 오전의 예언모임과 어떤 관계였는지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은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오후 모임에는 일반 교인을 위한 독일어 해설 없이 배운 사람들을 위해 라틴어로만 신약성경이 해설되었다는 것이다.
취리히의 예언모임은 독일 남부의 팔츠(Paltz) 지역과 동 프리슬랜드, 저지대 라인랜드, 네덜란드 등과 같은 다양한 지역의 개혁교회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존 아 라스코(John à Lasco)가 취리히 모델을 런던에 있는 피난민교회에 소개한 이후, 그 성경연구모임은 영국의 국교회인 성공회와 비국교도 교회들(Nonconformist Churches)에 속한 모든 청교도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주었는데, 이 영향으로 청교도들은 자신들의 성경공부모임, 즉 대안 신학교를 ‘프로프싸잉’(Prophesying. 예언모임) 혹은 ‘엑서싸이즈’(Exercise. 훈련모임)이라고 불렀다. 결론적으로 취리히의 예언모임, 즉 ‘프로프짜이’는 종교개혁 이후 개혁파 신학을 추종하는 모든 개혁교회 신학교의 원시적 기원이 되었다.
예언모임을 통해 취리히 번역 성경이 출간되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개혁파 신학교의 커리큘럼을 위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취리히 성경은 취리히 예언모임이 학생들에게 라틴어와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로 성경을 가르친 최상의 결과물이었다. 개혁파 신학교는 성경의 의미를 성경 언어와 자국어로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다. 신학교라면 적어도 자신의 신학적 정체성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스터디 바이블(Study Bible) 하나 정도는 생산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먼저 이것이 신학교의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라는 인식 없이는 불가능하다. 개혁파 신학의 정수를 담은 성경연구서가 만들어진다면 최소한 중구난방의 잡동사니 신학 때문에 신학생들과 교인들이 신학적 혼란에 빠지는 일은 방지할 수 있지 않을까?
*<생명나무> 2016년 1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