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는 목사: 배우는 자의 자세 없이는 잘 가르칠 수 없다!
작성자: 황대우
인생은 평생 배움의 길이다. 누구든 한 번뿐인 인생은 언제나 낯선 경험의 연속이다. 하지만 누구나 인생의 길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인생의 길은 스승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 생겨난다. 긍정적 의미에서든 부정적 의미에서든 부모는 자녀에게 인생의 스승이다. 물론 부모에게서 인생을 배우고자 하는 열정과 지혜가 자녀에게 있을 때 그 부모는 그 자녀의 스승이 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스승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께 속한 자’를 뜻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 속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는 의미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자,’ 혹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인은 교인, 즉 ‘교회에 속한 자’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처럼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자를 바울은 ‘성도’라고 부른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도’, 즉 ‘거룩한 자’다. 거룩함이란 죄인이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질 때 일어나는 기적이다. 그 때 죄인은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이 씻기고 새로운 피, 즉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를 수혈 받아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고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거듭난 생명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배우고 익혀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아비 같은 스승’이다.
‘아비 같은 스승’이신 그리스도에게서 최선을 다해 배운 자는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처럼 ‘아비 같은 스승’이 될 수 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아비 같은 스승’이었다. 왜냐하면 바울이 잉태와 같은 인고의 가르침으로 그들을 낳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종, 즉 설교자는 바울처럼 그리스도로부터 배운 것만을 교인들에게 가르치는 ‘아비 같은 스승’이 되어야 한다. 반면에 교인들 역시 머리에 뿔난 염소와 달리, 주인의 목소리를 알고 따르는 양처럼 순종하는 제자가 되어야 한다.
진정한 ‘아비 같은 스승’이 되려면 먼저 말씀으로 자신을 가르치는 배움의 자세가 필요하다. 설교자는 끊임없이 말씀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충실한 말씀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성경과 성경 주석뿐만 아니라, 교회 역사와 기독교 교리에 관한 참고도서들도 부지런히 읽어야 한다. 잘 배워야 잘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배우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배운 사람이 잘 가르치지 못할 수는 있지만 배우고자 하는 자세 없이 좋은 선생이 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다.
한국 상황에서 목회자가 양서를 선별하고 꾸준히 독서하는 습관을 갖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양질의 목회를 위해 시간을 쪼개서라도 독서 시간을 확보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2-3백 명 이상의 교회를 담임하는 목회자들은 대부분 양서를 탐독할 시간이 부족하다. 대체로 바쁘게 돌아가도록 계획된 목회 프로그램과 담임목사의 대외적인 업무 때문이다. 그래서 심지어 가벼운 간증이나, 설교 모음집 정도조차 차분히 볼 시간적인 여유가 없는 경우도 있다.
아무리 목회가 바빠도 최소한 한 달에 신학전문서적 2권 정도는 정독할 수 있는 시간을 할애해야 설교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거나, 때론 이단과 별 다를 바 없는 내용이 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소위 한국에서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목사치고 허접한 설교를 하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그들 대부분은 설교를 마냥 재미있고 감동적인 스토리로만 채우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무식한 설교자가 왠지 모를 인기 덕분에 위대한 설교자로 추앙 받는 기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들 중에는 심지어 전혀 역사적 근거가 없는 황당한 이야기와 예화들을 서슴없이 들이대기도 하는데, 문제는 청중이 아무런 문제의식도 반항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유는 대부분의 청중이 들을 귀가 없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 구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청중들은 설교의 진정성과 내용의 깊이를 따지지 않는다. 자신의 귀만 즐거우면 그만인 것이다. 그래서 청중의 귀를 즐겁게 하는 설교만 살아남게 된다.
모름지기 목회자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업무, 1차적인 과업이 설교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인식은 교인들에게도 반드시 필요하다. 양서를 읽는 습관을 들이지 못하다보니 어느 순간 스스로 설교를 작성하는 것조차 버거운 일이 되고 만다. 그래서 남의 설교를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그냥 가져다 사용하는 일이 난무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에 만연한 설교 표절 문제다. 단순히 몇 문장을 가져다 사용하는 정도가 아니라, 한 설교의 반이나 삼분의 일, 심지어는 몇 문장 정도만 바꾼 채 거의 대부분을 마치 자신의 설교인양 가져다 사용한다.
목사는 말씀의 종이다. 목사가 말씀의 종이라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가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목사가 말씀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즉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관한 수많은 전문 신학서적들을 꾸준히 탐독하는 습관을 들일 필요가 있다. 또한 겸손한 자세로 신학 각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끊임없이 배우는 자세와 노력이 필요하다. 잘 배운 만큼 잘 가르칠 수 있다. 목사에게 독서란 목회다. 따라서 독서를 위한 계절이 따로 없다.
교회사, 기독교 교리, 성경의 주요 주제를 다룬 서적, 및 일반서적의 베스트셀러를 한 달에 각각 한 권씩은 읽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1년에 최소한 48권의 서적을 읽는 셈이다. 1년에 최소 48권의 책을 정독하기 위해서는 독서 시간을 하루 최소 2시간 정도 할애해야 한다. 깊은 우물에서 청결하고 시원한 물을 퍼 올리듯이 성경의 깊은 우물로부터 청결하고 시원한 설교를 퍼 올리기 위해서는 매일의 기도와 성경 묵상은 물론이거니와 독서와 사색 훈련도 동반되어야 한다. 청중의 귀와 마음만 즐겁게 하는 설교가 아니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성령의 날선 검처럼 청중의 영혼을 해부하는 설교가 되어야 한다.
하루에 2시간만 투자한다면 다음과 같은 양서 4권을 한 달 안에 독파할 수 있다. 예컨대, 교회사 분야에는 로버트 루이스 윌켄의 <초기 기독교 사상의 정신>(서울:복있는사람, 2014), 혹은 디아메이드 맥클로흐의 <종교개혁의 역사>(서울:CLC, 2011)를, 기독교 교리 분야에는 마이클 호튼의 <개혁주의 조직신학>(서울:부흥과개혁사, 2012), 혹은 카렐 데던스의 <세례반에서 성찬상으로>(서울:성약, 2014)를, 성경의 주요 주제를 다룬 분야에는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하나님의 선교>(서울:IVP, 2010), 혹은 크레이그 블롬버그의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소서>(서울:IVP, 2012), 혹은 그레고리 비일의 <예배다인가, 우상숭배자인가?>(서울:새물결플러스, 2014)를, 베스트셀러 일반서적 분야에는 마이클 샌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서울:와이즈베리, 2012), 혹은 엘렌 랭어의 <마음챙김>(서울:더퀘스트, 2015), 혹은 기시미 이치로의 <미움받을 용기>(서울:인플루엔스, 2015) 등등.
*이것은 "개혁정론"에 "목사의 공부계획"이라는 제목으로 기고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