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황대우
나는 예정론을 신봉하는 예정론자다. 그것도 많은 기독 지성인들이 혐오하는 이중예정론자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택을 믿되 한 사람이 선택 받을 때, 다른 한 사람은 버림 받는 다는 것을 믿는다. 즉 하나님의 선택하심과 동시에 유기하심을 믿는다.
이런 믿음은 예수님의 종말론적인 가르침과도 부합하는 것이라 용감하게 주장하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도 이렇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인자가 세상에 다시 오시는 날에는 남자든 여자든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물론 성경학자들은 이 본문이 예정론과 무관한 것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감안하여 곰곰이 생각해보면 모종의 관계를 지을 수 있다고 본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데려가시고 어떤 사람을 버려두실지 성경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다만 "깨어 있으라!"라고만 권면할 뿐이다.
나는 예수님의 예언에 나타난 하나님과 인자의 행위를 '불공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의 믿음이 내게 성경을 통해 '하나님보다 더 공평한 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나는 합리를 추구하는 우리의 이성도 죄에 물들어 있음을 믿는다. 그래서 우리가 어느 정도 합리적일 수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절대적으로 합리적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이성은 마치 100% 정확하지 않은, 아주 근소한 오차를 가진 기계와 같다. 이 기계가 작은 단위를 측정할 때는 유용하겠지만 매우 정밀한 것을 측정하거나 엄청나게 큰 단위를 측정할 때는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 나는 합리를 추구하는 우리의 이성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사역을 모조리 설명한다거나, 그분의 선하신 뜻에 의해 이루어진 그분의 작정을 인간의 이성으로 측정하고 이해하려는 것 자체가 무모하고 황당한 시도라 생각한다.
나는 또한 우리의 이성적 이해와 합리성을 선거 때의 여론조사나 출구조사와 유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론조사는 매우 합리적이고 뭔가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으로 뭔가의 결정적인 결론을 도출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이성이 가진 이해의 한계를 인정해야 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하심을 모조리 측정하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무례하고 황당한 것인지 알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나는 칼 바르트(Karl Barth)에 동의하지도 할 수도 없다. 물론 그도 하나님의 선택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버리심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선택은 그 반대인 버림을 늘 동반하고 있음을 바르트는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유기'에 대한 그의 부정은 '버림'의 행위 자체가 사랑의 하나님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정말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이유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사고는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Menschliches, allzu menschliches)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중예정론을 믿는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것을 믿지 않을 자유도 있고, 그런 자신의 믿음에 대한 합당한 이유를 제시할 수도 있다. 나는 그런 사람과 함께 진지한 토론과 고민을 나눌 용의가 있다. 오직 상대방을 비난할 무기로만 완전무장한 사람이 아니라면!
칼빈이 이중예정론자였다면 그의 절친이었던 멜랑흐톤은 이중예정론자가 아니었다. 멜랑흐톤뿐만 아니라, 칼빈과 취리히 일치신조에 합의함으로써 돈독한 우호관계를 과시했던 취리히의 개혁파 종교개혁자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도 이중예정론자가 아니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마르틴 부써(Martin Bucer), 피터 마터 버미글리(Peter Martyr Vermigli), 테오도르 베자(Theodore Beza) 등은 하나님의 유기하심을 확신했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다른 종교개혁자들은 이중예정론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칼빈의 행보가 현명하지 못한 것으로 여겼다.
칼빈은 멜랑흐톤이 이중예정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대해 비판하면서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의절할 정도로 관계를 악화시키지는 않았다. 둘 사이에 이견으로 인한 긴장이 없지 않았지만, 그들은 끝까지 좋은 친구로 남아 서로를 정말 아끼고 존중했다. 물론 칼빈이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 시대의 이단자인 펠라기우스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까지 교제권에 넣을 만큼 관용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이런 불관용은 단지 칼빈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종교개혁가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점이다. 이것은 공통점은 초대교회의 교부들에게서도 발견되는 공통점이기도 하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 예정론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단지 그 하나의 차이 때문에 적으로 만들고 싶지는 안다. 그들과도 충분히, 그리고 진지하게 신앙의 문제를 나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하고 싶다. 하지만 나의 신학적인 관용도 분명 한계는 있다. 그 한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무한히 자유로운 영혼이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누구와 함께 교제할 수 있고 교제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항상 진중할 필요가 있다.
나는 궁극적으로 예정론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에 관심이 있다. 그 구원이 하나님의 예정으로 더 풍성하게 수용될 수 있다면 그것을 환영하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이 예정이 얼마나 오해되고 있는지... 참으로 안타깝다.
*이 글은 이전에 페이스북에 올렸던 것인데, 약간 수정해서 다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