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세계칼빈학회를 다녀와서 - 기독신문 2010년 10월호와 기독개혁신보 2010년 9월호에 게재됨

 

4년마다 개최되는 세계칼빈학회(International Congress on Calvin Research)는 16세기 종교개혁가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 연구에 관한한 세계 최대의 학회이다.

제10회 세계칼빈학회는 2010년 8월 22-27일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이하 남아공)에서 열렸다. 남아공은 이미 2010 월드컵으로 잘 알려진 나라이다. 학회가 개최된 장소는 프리 스테이트 대학교(University of the Free State)인데 이 학교는 남아공의 사법수도인 블룸폰떼인(Bloemfontein)에 있다. 블룸폰떼인은 네덜란드어로 ‘꽃’(Bloem)과 ‘샘’(fontein)을 의미하는 두 단어의 조합이다.

이번 제10회 세계칼빈학회에는 전 세계에서 100여명의 학자들이 모였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한국과 일본과 대만의 학자들이 참석했고 한국에서는 13명의 대표가 참석했다



1. 다양한 주제 발표된 세계칼빈학회


참석자 전원이 참여하는 플레너리(Plenary) 발표가 10개, 세미나(Seminars)가 5개, 소논문(Papers) 발표가 20개 준비되어 있었다. 플레나리 발표와 세미나에 할애된 시간은 각각 1시간 30분이며 소논문 발표에는 40분씩 할애되었다. 본래 계획은 세미나 발표가 6개이고 소논문 발표가 19개였는데, 라일 비르마 교수(Prof. Lyle Bierma)의 세미나가 소논문 발표로 변경되어 진행되었다.

발표된 글들은 하나의 주제로 묶을 수 없는 매우 다양한 내용이었다. 주강의에 해당하는 플레너리 발표 주제들만 해도 그렇다. 칼빈탄생 500주년이었던 2009년의 칼빈기념행사와 발표된 글들을 소개한 글인 “칼빈 2009: 그 결과들”로부터 시작하여 칼빈의 윤리와 정치와 화해 사상, 이성적 신앙에 대한 루터와 멜랑흐톤과 칼빈의 사상 비교, 보편성과 보편교회에 대한 칼빈의 사상, 16세기 제네바의 금요성경공부모임과 목사회에서 논의되었던 신학주제들 연구, 19세기 프랑스 선교사들의 설교에 나타난 칼빈의 유산, 루터주의자들과의 긴장과 대립관계 속에서 살펴본 칼빈 신학, 노예에 대한 칼빈의 사상, 불링거와 칼빈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비교하되 특별히 교회와 시정부의 관계와 이슬람에 대한 그들의 사상을 비교 연구한 글, 칼빈의 설교에 나타난 칼빈의 화해 신학 등의 주제들이 발표되었다.

5개의 세미나 발표에서 다루어진 주제들은 칼빈과 후기 개혁 신학이 원죄의 결과인 전적 부패를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지, 칼빈의 기도에 대한 개념은 정확히 무엇인지, 칼빈과 카피토(Capito)의 창조론이 어떤 점에서 유사하고 어떤 점에서 다른지,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 칼빈에게서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칼빈의 회심 문제가 문자적 역사적 정황을 고려할 경우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의 문제들이었다.

20개의 소논문 발표에서는 더 다양한 주제들이 선보였는데 성상 제거에 대한 칼빈의 입장, 칼빈의 성찬론, 첫 성찬론 논쟁,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교육서에 나타난 칼빈의 영향, 디지털 세대에서 칼빈 연구의 장점과 한계, 16세기 서구유럽 종교개혁가들의 이민과 신앙고백, 칼빈이 스페인에 끼친 영향, 적응된 계시의 역동적 성격, 1542년 교리문답교육서에 나타난 개혁신학, 신학의 통일성을 지향한 대표자 칼빈, 섭리와 자유의 관계, <기독교 강요> 초판부터 최종판에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 이해의 발전, 환자에게 성찬을 베푸는 문제에 대한 칼빈과 베스트팔(Westphal)의 대립과 일치, 세계적 칼빈주의의 선구자들, 일본에서의 칼빈 유산,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에 대한 칼빈의 최종 판단, 당대의 선지자로서의 칼빈, 네덜란드 신학자 시몬 오미우스(Simon Oomius)와 칼빈 비교 연구, 목회자로서의 칼빈, 1563년 앙부와즈(Amboise) 평화조약에 대한 칼빈의 자세를 통해 본 그의 전쟁론 등의 주제들이 발표되었다.

발표자들의 나라별 분포로는 영국, 독일, 프랑스, 스위스, 네덜란드 등 유럽 학자들과 미국 학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했고 그 중에서도 네덜란드와 미국 학자들이 가장 많았다. 그리고 남아공, 일본, 대만 출신 학자가 각각 한 명씩 발표했다.

한국 발표자는 2명이었는데, 총신의 교회사 교수이며 한국칼빈학회 회장인 안인섭 박사가 ‘칼빈의 설교에 나타난 화해 신학’이라는 주제로 마지막 플레너리 발표를 장식했고 필자가 ‘칼빈의 <창세기 주석>과 카피토의 <하나님의 6일간 창조>에 나타난 창조론’을 비교 연구한 논문을 둘째 날 세미나 시간에 발표했다.


2. 진지한 토론과 교제의 열정 돋보인 학회


개회를 한 주일 저녁부터 마지막 날인 금요일 오전까지 일정은 매우 빡빡했다. 숙소에 돌아오는 시간은 매일 거의 예외 없이 저녁 10시경이었고 다음 날은 오전 6시쯤 일어나 세면과 짐정리를 한 다음 7시 전후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가 숙소에서 학회 장소로 출발하는 8시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조금 이른 시간에 숙소를 나서야 했다.

숙소와 대학 사이는 버스로 15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고 학회 장소에 도착한 후 매일 8시 30분부터 9시까지 예정된 경건회 형식의 예배를 드림으로써 하루의 학회 일정이 시작되었다.

학회 중에 있었던 특별 행사로는 화요일 저녁 시간에 프리 스테이트 대학교 총장이 배설한 만찬이 있었고, 수요일에 레소토(Lesotho)라는 남아공 내에 있는, 마치 작은 섬과 같은 독립 국가를 둘러보는 여행이 계획되어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학회 장소의 이동을 겸한 여행이었는데 이유는 그곳에서도 두 개의 플레너리 발표가 3시간 동안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목요일 오후에 잠시 남아공 천문대 방문이 있었다.

세계칼빈학회에 처음 참석한 필자는 책으로만 알고 지내던 세계적인 칼빈학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진지하게 토론하며 격의 없이 교제하는 일에 동참할 수 있어 행복했다.

발표는 대부분 영어로 이루어졌으며 혹 독어나 불어로 강의해도 영어로 번역된 강의안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런대로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가장 부담스럽고 힘들었던 시간은 역시 토론이었다. 아시아 사람들 외에는 영어, 독어, 불어로 대화하고 토론하는 것이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독어나 불어로 발표하면 영어권이나 네덜란드어권에서 온 학자든, 독어나 불어권에서 온 학자든 독어나 불어로 비평하고 질문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그럴 때는 꿰다 놓은 보리자루마냥 신기한 듯 그 모습을 멍하니 구경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잠을 자는 것도 그런 시간을 땜질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지만 학자의 품위 유지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아 그럴 용기가 나질 않았다.

또한 학자들 간의 팽팽한 줄다리기 토론이 전혀 흥분 없이 차분하게 이루어지면서도, 한 치의 양보 없이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흥분 잘 하는 나의 모습이 몹시 부끄러웠다. 어줍지 않은 영어 실력이라 몇 마디 내뱉고 나면 그 다음 말이 쉽게 이어지지 않아 얼굴이 화끈거릴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한 마디로 쌓아야 할 실력이 한참 남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이 자리까지 온 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신학의 다른 분야는 잘 모르겠지만 역사신학, 즉 교회사 분야는 아직도 동양 학자들이 가야 할 길이 멀다. 그것은 대부분 언어 장벽 때문이다.


3. 미래를 위해 투자해야 하는 한국교회


세계칼빈학회 회장인 헤르만 셀더르하위스 박사(Prof. Dr. Herman Selderhuis)는 현재 네덜란드 아뻘도런(Apeldoorn)에 소재한 기독개혁신학대학교(De Universiteit van de Christelijke Gereformeerde Kerk)에서 교회사와 교회법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필자와 같은 지도교수 밑에서 학위를 받았기 때문에 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장신인데다 덩치도 크다. 무엇보다도 지금 서 있는 위치, 그리고 감당하고 있는 역할이 필자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대단하다. 그는 라틴어뿐만 아니라 영어, 독어, 불어 등의 사용이 자유롭다. 이런 것은 사실 세계칼빈학회에 참여하기 전에도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이번에 좀더 분명하게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리는 언제쯤 그런 위치에 설 수 있을까? 물론 그런 일이 수년 혹은 수십 년 내에 이루어지라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언젠가 그들이 서 있는 위치에 우리 한국 사람들도 오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은 너무나도 실망스럽다. 인문과학이 점점 외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문 분야의 인재를 키우려는 열정, 그 분야의 기초인 사고훈련과 언어습득에 대한 열정이 수면 깊이 가라앉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아는 사람도 많지 않고 그것을 외치는 사람은 더더욱 적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투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교회조차 먼 곳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나라의 꿈을 꾸기보다는 현실적인 실리를 따지고 당장 눈앞에 내보이는 결과만을 추구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칼빈은 16세기 인물이지만 그는 그 시대에 국한된 인물이 아니다. 그는 주어진 현실에 충실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처한 환경 속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칼빈의 위대함을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과 자신의 환경에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는 교회 안에서 설교만 한 것이 아니다. 신학 저술을 하기 위해 집에만 틀어박혀 있지도 않았다. 설교와 저술, 강의도 소홀히 하지 않았지만 이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과 수고를 제네바 시 전체를 위해 쏟아 부었다. 그는 아이들 교육을 위해 초등교육과정을 재정비하여 가난하여 교육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했으며, 제네바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고등교육도 실시했다.

제네바의 병자들과 빈민들을 위해 제네바 시가 운영하던 구호소가 제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하자 그 일에 관여하여 구호소 운영을 재정비하였으며 피난민들을 돕기 위해 구호기금을 마련하고 그것을 관리하는 구호단체도 만들어 운영했다. 이런 점들 때문에 칼빈은 단순히 신학 분야에서만 영향력 있는 인물이 아니라 현대 서구 사회의 형성 역사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칼빈은 그 모든 일을 교회의 이름으로 했다. 교회가 단지 세상에 구원을 선포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 어떻게 복음대로 살 것인지 그 본보기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칼빈과 제네바 교회의 모습에 비해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고 한국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4. 마치는 말


세계칼빈학회는 단순히 칼빈의 신학 사상만 연구하는 학회가 아니다. 그리고 16세기에 그것은 무엇을 의미했는가만 묻는 것이 아니다. 칼빈 사고를 속속들이 연구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고가 오늘날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함께 묻는다. 그동안 칼빈 해석에 수많은 오해들이 있어왔다. 그것은 아마도 선입견 때문이리라.

가능한 선입견을 내려놓고 칼빈이 한 말을 직접 보면서 칼빈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이 요청된다. 세계칼빈학회가 추구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의 칼빈학자들도 자신이 처한 현실에만 안주할 것이 아니라 그 대열에 설 수 있기를 바라며 또한 많은 성도들이 이 일에 관심을 가지고 지원을 아끼지 않기를 바란다.

세계칼빈학회가 4년마다 학회를 개최하는 것 외에 가장 비중 있게 진행하고 있는 것이 칼빈의 저술들을 비평편집판으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루터의 저술들은 거의 대부분 비평편집판으로 출간되었다. 하지만 칼빈 저술의 비평편집판 출판은 아직 초기 단계이며 언제 완성될지 미지수다. 이렇게 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관심의 부재이며 또한 빈약한 재정에 있다.

부디 한국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여, 특별히 칼빈과 개혁 신학과 신앙 그리고 개혁교회에 관심을 가진 분들과 교회들이여, 이런 의미 있는 일과 역사적인 일에 투자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것은 선교에 투자하는 것 못지 않게 더 가치있는 일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