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왕


평화(平和)는 인류가 추구해 온 가장 고상한 가치이지만 가장 난해한 과제였다. 인류는 거듭된 전쟁과 폭력, 인명살상과 상실, 자연의 파괴와 같은 엄청난 재난을 경험했다. 1차 대전과 같은 대규모의 국제적인 전쟁을 경험 한 이후 서구에서는 반전(反戰)운동과 반전사상이 일어났고, 평화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시작되었다. 1920년대 이후 서구사회에서 평화는 사회과학의 한 분야로 발전하였고, 그 후 평화학(Peaceology)은 학제간 연구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 두 차례의 처참한 전쟁을 경험 한 이후에 얻은 평화에 대한 갈망은 국제연합, UN과 같은 국제기구 창립의 동기가 되었고, 1948년 조직된 ‘세계교회 협의회’(WCC)도 평화에 대한 염원에서 발의된 교회조직체였다. 그렇다면 평화란 무엇일까?

  ‘평화’를 의미하는 희브리어 ‘샬롬’은 흔히 전쟁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 보다 광범위한 의미를 담고 있다. 샬롬은 전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 속에서도 갈등과 대립이 없는 평안과 기쁨을 의미한다. 그것은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복지와 안녕, 건강한 상태를 포함하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화의(和議)를 뜻한다. 요즘의 말로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웰빙(well-being)의 상태를 뜻한다. 그리스어의 ‘에이레네’ 또한 동일한 의미를 지니지만 전쟁이 없고, 적대관계나 갈등이 해소됨으로서 이루어지는 질서와 조화의 상태를 의미한다.

  로마인들은 평화를 팍스(pax)라고 불렀다. 이 팍스라는 단어는 계약, 곧 서로 싸우지 않겠다는 약속과 동일한 어근에서 파생되었다. 그래서 팍스라는 단어는 ‘안전’(securitas), ‘평정’(tranquilitas), ‘쉼’(quies), ‘안식’(otium) 등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했다. 말하자면 로마인에게도 평화(pax)는 단순한 전쟁의 없는 상태 그 이상을 의미했다. 이런 평화가 가능할까?

  고대사회에서 평화는 일종의 종교적 개념이었는데, 희브리인들은 평화를 하나님의 선물로 이해했고, 그 진정한 평화는 예수님의 오심으로 이루어 질 것으로 이해했다. 이것이 바로 메시아적 평화(Messianic shalom)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갖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그가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는 점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을 “땅에서는 평화”라고 했고, 역사가 누가(Luke)는 예수는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시는 분”이라고 소개했다. 예수는 원수사랑과 용서를 가르쳤고, 화해, 앙갚지 않음 등 화평의 윤리를 가르치고 실천하셨다. 흔히 산상보훈(山上寶訓)이라고 불리는 성경본문에서 예수는 절대적 사랑과 무저항주의, 그리고 평화를 가르치셨다.

  성탄의 의미는 휘황찬란한 트리 속에 훼손되고 있다. 성탄은 먹고 마시고 즐기는 휘청거리는 야밤의 축제가 아니라, 사랑과 용서, 화해와 평화의 절기이다. 성탄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돌아보고, 이국인과 나그네와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펴고, 불화하고 원수 된 자와 화해하는 기쁨과 감사의 절기여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모두가 함께 누리는 총체적 웰빙일 것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향한 우리의 배려는 추운 거리를 밝히는 작은 사랑의 모닥불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