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의 성찬예식

성찬을 통해 신자의 믿음은 강화되고 자란다!

 

 

   
  

 

 

 

 

고신교회의 헌법은 예배지침 제5장 성례 부분의 제23조 성찬예식을 설명하면서 성찬예식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마땅히 가져야 태도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성찬에 참석한 신자들은 성령의 역사와 감화 아래서 자신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구속해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깊이 감사하는 동시에 그와의 교제와 성도간의 교제 또는 그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해야 하는 것을 인식하면서 엄숙한 마음으로 참여하여야 한다.


이 문구에서 확실히 교정되어야 할 단어는 ‘또는’인데, 이 단어는 둘이나 셋 이상 가운데 하나, 즉 택일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단어는 ‘또한’이나 ‘그리고’ 등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라는 단어는 어디에 걸리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그것이 ‘전해야 하는 것’과 연결되는 것인지, ‘인식하면서’, 아니면 ‘참여하여야 한다’와 연결되는 것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위의 문장이 정확히 언제 작성되었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최소한 이십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아무도 이 문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것 같다. 이것뿐만 아니라 신앙고백의 번역에도 자연스럽지 못하거나 애매모호한 문장들이 많이 보인다. 아마도 이런 부분들이 교회정치나 권징조례, 또는 헌법적 규칙에 들어 있었더라면 좀더 빨리 수정되었을지도 모른다. 조만간 교단 헌법이 수정된다고 들었는데 이런 부분들까지도 세심하게 살펴서 좀더 분명한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내용으로 교정될 수 있기를 바란다. 또한 마지막 부분의 “그 죽으심”이라는 표현보다는 “부활하심과 다시오심”이라는 표현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의미 파악이 불분명한 점이 있긴 하지만 인용된 문장에는 성찬에 대한 개혁주의 견해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문구들이 나열되어 있다. 예를 들면 “성령의 역사와 감화”, “그리스도의 은혜를 깊이 감사”, 그리스도와의 “교제와 성도간의 교제” 등이다. 여기에다가 “영혼의 양식”이라는 문구가 하나 더 추가된다면 성찬에 대한 개혁주의 특징을 좀더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성찬에서 빵과 포도주라는 가시적 상징물에 의해 주어지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들은 예외 없이 “영혼의 양식”으로 정의하기 때문이다.1)


성찬에서 분배되는 빵과 포도주가 영혼의 양식이라면 그것을 먹고 마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이 자라고 강화되어야 한다. 성찬의 요소들이 정말 믿음을 자라게 하고 강화하는 것이라면 성찬예식은 일년에 1-2번 정도로 그칠 것이 아니라 가능하면 자주 시행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성찬식 거행이 큰 교회일수록 자주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는 점과 너무 많은 사람이 참여한다는 점에서 그럴 것이다. 개혁주의 전통에 따른다면 성찬식이 1년에 4번 정도는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성찬 시행이 중세교회처럼 1년에 1-2회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보다 더욱 심각하고 안타까운 점은 교회에서 성찬의 중요성이 가르쳐지지도 강조되지도 않아 성도들이 성찬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과 성찬 시행이 새로 온 성도들에게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즉 교회성장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점점 경시되어 간다는 것이다. 개혁교회의 전통을 따르는 교회라면 반드시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신앙의 성장을 가져온다는 점을 가르쳐야 한다. 왜냐하면 설교가 들을 수 있는 말씀이라면 성찬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교육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그렇다면 이런 점은 반드시 고려되어야 하고 그것을 고려할 경우 현행의 성찬예식에 수정할 부분은 없는지 살펴보는 일도 필요하다.


한국교회 성찬식은 대개 집행 1주 전에 공고되지만 많은 광고와 더불어 공고된다. 성찬식은 몇 주 전부터, 최소 3-4주 전부터 공고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성찬 공고는 다른 광고와 달리 특별한 방식으로, 즉 기억할 수 있는 인상적인 방식으로 해보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성찬이 무엇을 의미하며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설명하는 일도 필요하고 그리고 성찬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가르치는 것 역시 필요하다. 즉 성찬예식과 성도의 삶이 어떻게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지 분명하게 가르칠 필요가 있다.


성찬식 당일에는 참석할 사람 수를 예상하여 넉넉하게 개인용으로 미리 만들어 둔 분병할 빵과 분잔할 포도주를 강대상 앞쪽에 흰 천을 덮어서 놓아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분병과 분잔을 미리 준비해 두는 것도 잘못은 아니지만 가시적인 효과를 위해 그 자리에서 빵을 떼어서 나누고 또한 잔도 큰 잔에 부어 함께 나누어 마시는 것도 좋은 일이다. 교인 수가 적다면 이런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을까? 그리고 빵과 포도주를 자신의 자리에서 받기 보다는 특별히 마련된 자리에 함께 나와서 받는다든지 아니면 숫자가 많을 경우에는 줄을 서서 받는 것도 시도해볼 만하다.


대부분의 한국교회에서는 성찬예식을 집행할 때 집례하는 목사와 돕는 장로가 준비된 가운과 흰 장갑을 착용한다. 가운과 흰 장갑 착용이 성찬예식에 필수적인 것은 분명 아니지만 개교회의 선택에 따라 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하는지 그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빵을 나누거나 잔을 나누는 시간에는 흔히 음악이 연주된다든지 음악과 함께 집례자가 성경 말씀을 봉독한다. 연주되는 음악이나 봉독되는 성경 말씀이 십자가의 죽으심과 연관된 것이 대부분이므로 성찬예식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대부분 상당히 엄숙한 편이다.


엄숙한 분위기 자체가 성찬예식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혹자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죄인의 죄 용서를 의미하기 때문에 성찬예식은 기쁨과 즐거움의 잔치, 즉 축제 분위기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성찬 예식의 명칭 가운데 “유카리스트”(Eucharist) 즉 “감사드림”이 있기 때문에 성찬을 기쁨과 즐거움의 잔치로 보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자칫 성찬이 흥청거리는 분위기로 오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없는 성찬은 상상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찬예식이 장례식과 같은 엄숙한 분위기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믿음으로 감사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찬식이 잔치하듯이 마냥 들뜬 분위기여야 하는가? 이것도 적절해보이지 않는다.


집례자는 성찬식을 전체적으로 엄숙하게 진행하되 너무 무겁거나 어둡고 슬픈 분위기를 조장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리고 참여자들은 각기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참여하되 독립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참여한다는 공동체 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성찬은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교제할 뿐만 아니라 몸의 지체인 모든 성도들과 연합하고 교제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 연합과 교제가 바로 성찬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들의 믿음을 자라게 하고 강건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찬의 빵과 포도주는 이러한 수직적으로는 그리스도와, 그리고 수평적으로는 다른 성도들과의 연합과 교제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분명하게 나타내고 증거하는 상징이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로마 가톨릭 교회는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실제 몸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을 가르치고, 루터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빵과 포도주 안과 옆과 위와 아래에 육체적으로 함께하신다는 공재설을 가르치는 반면에 개혁교회는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한다는 상징설 즉 기념설을 가르친다. 그런데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에 표현된 상징설과 기념설은 스위스 쮜리히(Zürich)의 개혁가 쯔빙글리(Zwingli)가 초기에 주장한 내용이 아니라 그의 후계자 불링거(Bullinger)와 제네바 개혁가 칼빈이 함께 동의한 쮜리히 일치신조(Consensus Tigurinus)와 일맥상통한 내용이다. 즉 거의 모든 개혁교회 신앙고백이 가르치는 성찬론은 빵과 포도주를 단순한 상징으로 보고 성찬식을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단순한 기념식으로 보는 쯔빙글리의 견해가 아니라 성찬식의 빵과 포도주를 신자의 믿음을 강화하고 자라게 하는 영적 음식과 음료로 보는 칼빈의 견해를 따른다.2)


여기서 칼빈의 성찬론이 무엇인지 자세하게 논하기에는 지면이 부족하다. 중요한 것은 한국교회가 시행하고 있는 성찬론이 이론적으로는 쯔빙글리의 초기 성찬론을 따르면서 실제적으로는 중세 로마교회의 성찬론을 따른다는 점이다. 성찬에 사용한 빵과 포도주가 남을 때 그것들을 땅에 묻는다든지 그냥 곱게 포장해서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으로 아는데 이것이 바로 중세 성찬론과 결부되어 있다. 왜 멀쩡한 빵과 포도주를 묻거나 버리는가? 성물(?)로 사용된 것이라서 그렇게 해야 하는가? 재료로서의 빵은 언제나 빵일 뿐이고 포도주는 언제나 포도주일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것이 성찬식에 사용된 것이라고 빵과 포도주 이상의 특별한 무엇이 되었는가? 아니다. 종교개혁가들은 그와 같은 중세 성찬론을 과감하게 포기했다.


물론 빵과 포도주를 믿음으로 받을 때 그것이 영적 음식과 음료의 효력을 발휘한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 그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즉 성령을 통해 가능하게 된다. 이것은 이성적으로는 이해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칼빈과 개혁교회 신앙고백들은 그 성령의 능력을 “신비한 방법으로”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성찬의 빵과 포도주가 믿음으로 이것들을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즉 신비한 방법으로 영적인 음식과 음료가 되기 때문에 그들이 성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실 때 그들의 믿음이 강화되지 않을 수 없고 자라가지 않을 수 없다.


성찬은 하나님께서 지상의 신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수단, 즉 은혜의 방편이다. 따라서 바르게 시행되는 성찬에 바르게 참여한다면 우리는 성령을 통해 베푸시는 풍성한 은혜를 통해 우리의 믿음이 강화되고 자라갈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는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이런 것을 경험하고 있는가?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위에서 인용된 성찬에 관한 문구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교정될 수 있기를 바란다.

성찬예식에 믿음으로 참여하는 모든 사람은 각기 자신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시고 살 찢기신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깊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참여하여야 한다. 또한 나누어지는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사실과 그분 안에서 몸의 지체인 성도 상호간에 친밀한 교제가 나누어진다는 사실, 그리고 이로써 그분의 살과 피는 영혼의 양식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되 이 모든 일은 오직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그분의 부활하심과 다시오심을 세상 끝 날까지 전하리라고 새롭게 다짐하는 자세로 경건하고 감격스럽게 참여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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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스트라스부르 교리문답교육서(1534), 제1 스위스 신앙고백(1536), 제네바 신앙고백(1537), 제네바 교리문답교육서(1542년), 프랑스 신앙고백(1559), 제1 스코틀랜드 신앙고백(1560), 네덜란드[혹은 벨기에] 신앙고백(1561),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교육서(1563), 제2 스위스 신앙고백(156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 및 대교리문답(1647). 개신교 최초의 교리문답교육서인 1529년의 루터 교리문답교육서에는 이런 내용이 나타나지 않지만 부써가 1543년에 작성하여 출판한 최초의 스트라스부르 교리문답교육서에서는 명확하게 나타난다. 칼빈은 자신의 [기독교강요] 초판(1536)에서부터 이미 성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통해 주어지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강화하는 영적 음식과 음료로 분명하게 정의한다. 하지만 1563년 엘리자베스 여왕 재위시 만들어진 영국 성공회의 39개 신조에는 주의 만찬을 논하지만이런 내용은 전혀 없다.

 

2) 쯔빙글리의 초기 성찬론은 그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기념으로 간주하고 성찬의 빵과 포도주 역시 그 기념을 위한 단순한 상징일 뿐이라고 본 것에 있다. 쮜리히의 종교개혁가는 로마 가톨릭과 루터의 성찬론에 대항하기 위해 외적 요소인 빵과 포도주를 내적 요소인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부터 확실하게 분리시키는 일에 주력했다. 그래서 그는 “믿는 것이 곧 먹는 것이다”(credere est edere)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 말은 성찬의 빵과 포도주를 믿음으로 받을 때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명상하는 것, 이것이 곧 성찬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쯔빙글리의 성찬을 흔히 “믿음의 명상”contemplatio fidei)이라 부른다. 반면에 칼빈은 외적 요소인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할 뿐 그 자체가 특별한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점, 그리고 그 두 요소를 반드시 믿음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에서는 쯔빙글리의 견해와 동일하지만 제네바 개혁가에게 있어서 성찬의 빵과 포도주는 비록 외적인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역사를 통해 내적인 효력을 실제로 발휘하게 된다는 독특한 주장을 한다. 칼빈의 이 견해는 흔히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임재하신다는 의미의 영적 임재설로 알려져 있다. 칼빈은 외적인 요소와 내적인 효력을 서로 분리하려고 한 쯔빙글리와는 달리 성령의 신비한 능력과 역사를 근거로 그 두 요소들을 결합하려는 의도가 강하다. 따라서 칼빈에게 있어서 성찬식은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 땅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특별한 교제의 장이며 이 교제는 성령을 통해 실제로 일어날 뿐만 아니라 이 교제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자라는 것이다. 요약하면 쯔빙글리에서 있어서 성찬의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와의 관계와 연합을 단순히 기억하고 명상하게 하는 상징물에 불과한 반면에 칼빈에게 있어서 그 두 요소는 단순한 상징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실제 효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2011년 01월 0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