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과 성경해석(2)
작성자: 황대우
중세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로마가톨릭교회가 교황권을 주장하기 위해 내세우는 가장 강력한 근거는 마태복음 16장 18-19절 말씀이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것을 근거로 천주교는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권한, 즉 천국을 묶고 푸는 열쇠의 권한이 베드로의 로마 주교좌 즉 교황의 자리에 있다고 자신 있게 주장한다.
과연 천국을 묶고 푸는 열쇠는 무엇이며 누구의 손에 쥐어진 것인가? 종교개혁자들은 그것이 베드로 개인에게만, 혹은 그의 사도직에만 해당하는 보는 로마가톨릭의 해석을 거부했다. 따라서 로마교황좌가 사도직 계승이라는 주장 역시 성경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로마천주교도들과는 달리 천국열쇠가 교회 전체에 주어진 것이라고 해석했다.
루터의 동료이자 제자 멜랑흐톤(Melanchthon)이 “이 반석”을 베드로가 아닌 베드로의 신앙고백으로 해석한 반면에, 칼빈은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직분으로 해석했다. 칼빈은 그것이 베드로의 사도직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정하면서도 베드로의 사도직분에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모든 사도적 직분에 적용된다고 보았다. 즉 칼빈에 따르면 마태복음 16장의 천국열쇠의 권능은 교회에 주어진 복음 선포의 권한을 의미한다. 칼빈은 주님이 교회에 주신 말씀을 가르치는 직분은 사도직로부터 시작하여 목사직으로 계승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반면에 멜랑흐톤에 따르면 천국열쇠는 베드로와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신자에게 주어진 것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멜랑흐톤과 칼빈 둘 다 로마가톨릭교회이 주장하는 로마주교좌의 베드로 사도직 계승을 거부했지만, 거부의 근거와 해석은 서로 조금 달랐다.
종교개혁자들 사이에 성경해석의 차이는 곧 좁혀지지 않는 그들의 신학적 이견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예컨대,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이 빵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이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구절에 대한 루터의 해석과 츠빙글리의 해석이 달랐다. 루터는 이 구절을 문자주의 입장에서 해석했던 반면에, 츠빙글리는 상징주의 입장에서 해석했다.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성찬론에 관한 한 루터와 츠빙글리를 평생 서로 이해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루터는 비록 예수님의 손에 들려진 것이 빵이라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므로 그 빵은 실제로 예수님의 몸이라고 해석했고, 츠빙글리는 비록 그것이 예수님의 말씀일지라도 예수님께서 다른 곳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예수님께서 실제 포도나무가 아니라 자신을 포도나무에 비유하신 것처럼 빵 역시 실제 예수님의 몸이 아니라 몸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던 것이다. 최소한 이 구절만 놓고 본다면 루터보다는 츠빙글리의 해석이 더 정당하게 보인다.
성경문자주의의 폐해는 비단 이것만이 아니다. 수많은 기독교 이단들 대부분의 공통점도 성경문자주의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문자주의는 지금도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보편적인 성경해석 방법 중 하나다. 물론 성경문자주의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절대 신앙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성경문자주의자들은 성경의 문자 하나하나가 모두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므로 그것에 무엇인가를 더하거나 빼는 것을 두려워하고 ‘문자 그대로’에 집착한다. 예컨대 ‘경건의 시간’(Quiet Time)과 같은 성격의 개인적인 말씀 묵상을 모두 성경문자주의적인 것으로 매도할 수는 없으나, 성경문자주의에 빠지기 쉬운 것만은 사실이다.
성경에는 ‘문자 그대로’의 법칙을 적용할 경우 모순되는 것이 많다. 그 대표적인 것은 행위가 배제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로마서 및 갈라디아서와 달리, ‘행위 없는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고 반문하는 야고보서의 경우다. 문자적으로 성경의 하나님을 설명한다면 그분은 계획한 무엇이 뜻대로 되지 않아 결국 ‘후회’하시는 분, 실수가 가능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에 대한 이와 같은 표현들을 ‘신인동형론’으로 설명하는 것은 성경문자주의자들에게는 하나님과 성경을 모독하는 행위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경문자주의의 위험성은 매우 크다. 만일 성경을 해석할 때 성경문자주의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면 아마도 지금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눈이 빠지지 않은 사람, 손이 잘리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그런데 성경문자주의 해석 원칙을 주장하는 자들 가운데 누구도 예수님의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적용해야 한다고 해석하거나 가르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들의 성경문자주의 원칙이란 아전인수식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실 성경문자주의를 고수하면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아전인수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모든 이단들의 공통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이러한 성경해석의 혼란과 다양성이 종교개혁의 원리인 “오직 성경”의 구호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눈높이에 맞추어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성경을 구원 계시의 수단으로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는 이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모든 기독교 교리와 삶의 유일한 나침반이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의 가장 위대한 유산이다. 즉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최고의 권위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최고의 권위는 혼돈스러운 다양한 해석의 늪에 빠져 초췌한 모습으로 허우적거리고 있다.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성경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인가? 이 질문에 단순하게 ‘예’나 ‘아니오’로 대답하기 어렵다. 이유는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처럼 성경을 열심히 읽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을 이해하는 핵심적인 열쇠는 성령 하나님의 손에 있다.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지 않는다면 천재라 해도 성경을 이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성령의 깨닫게 하시는 은혜가 너무 지나치게 개인적인 것으로 치부되고 있는 것이 문제다. 물론 성령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성경을 깨닫고 이해하는 은혜를 베푸신다. 하지만 성경 본문에 대한 해석이 천차만별이라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개인적 해석의 다양성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나 원리는 없는가? 개혁주의는 이 질문에 아주 훌륭한 모범답안을 가지고 있다. 즉 “오직 성경”이라는 원리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성경”(tota Scriptura)이라는 원리를 함께 가르치는 것이다.
“오직 성경”의 절대적 권위는 “전체 성경”이라는 원리에 의해 보호될 수 있다. 왜냐하면 “전체 성경”이란 성경 전체의 통일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즉 성경해석은 성경 자체의 통일성 속에서 그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각권의 기록 연대도, 장르도, 기록자도 서로 너무 다르지만 성경을 관통하는 일관성과 성경 전체의 내적 통일성은 반드시 존재한다. 이것은 성경의 실제 기록자이신 성령의 통일성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깨달음의 은혜를 간구하는 겸손한 기도가 필요하다.
오늘날 성경본문에 대한 해석의 다양성은 이전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이유는 성경원문도 다양하고 성경번역도 다양하고 성경주석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런 다양성의 홍수에서 우리 자신을 지키려면 성경의 통일성, 성령의 통일성을 추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성령의 통일성은 결코 개인적 신비주의를 조장하지 않는다. 성령의 내적 통일성은 성경의 외적 통일성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 통일성은 성경의 애매한 본문이 좀 더 분명한 본문을 통해 해석되도록 안내하고 가르친다. 또한 우리 각자의 깨달음을 겸손하게 나눔으로써 자신의 부족함을 알뿐만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고 세워갈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아무리 신앙의 크기가 위대하고 지식의 샘이 깊다 해도 성경 본문을 모두 다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이 글은 <생명나무> 2015년 11월호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