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과 성경해석(1)

작성자: 황대우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은 종교개혁의 대표적인 구호다. 이 구호는 성경해석뿐만 아니라 모든 기독교 신앙과 관련하여 종교개혁자들을 로마가톨릭 학자들과 구분하는 표지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로마가톨릭교회가 교황을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로 간주했기 때문에 교황은 성경 위에 있는 최고의 권위였다. 혹 성경의 해석과 적용에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경우에는 교황의 결정이 최종적인 권위로 작용했다. 반면에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지상의 어떤 것도 성경보다 높은 권위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성경은 교황이나 기독교 전통, 혹은 다른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는 최고의 권위였을 뿐만 아니라,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을 평가하는 유일무이한 표준이었다. 그들은 중세의 모든 직제와 전통과 관습들을 바로미터(barometer)인 성경으로 재평가하기 시작했고, 결국 성경에 부합하는 것은 인정하고 성경의 가르침과 배치되거나 성경적 근거가 없는 것은 거부했던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교황은 단순히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말씀의 종이기 때문에 성경의 해석과 적용에 대한 상이한 견해로 충돌이 발생할 경우 그것을 종결짓는 최종 권위자가 될 수 없었다. 그리고 성경 해석의 최종 권위는 하나님과 성경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지, 성경 이외의 다른 무엇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성경의 [유일한] 해석자는 성경[뿐]이다!”(Scriptura sacra sui ipsius interpres) 이 구호는 루터에게서 비롯된 것이지만 곧 종교개혁 전체의 성경해석 원리가 되었다. 종교개혁을 통해 교황 대신에 성경이 기독교의 최고 권좌에 올랐다. 이후 성경은 모든 기독교 세계에서 최종적인 권위와 최고의 권력을 행사했다. 이것은 “오직 성경”의 원리 덕분이다. 그런데 이 원리가 교황을 최고의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일에는 성공적으로 작용했지만 부작용의 후폭풍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이 바로 성경해석의 끝없는 다양성이다.

하나의 동일한 성경 본문은 사람마다 시각차에 따라 각기 다르게 해석될 수 있고, 한 사람의 눈에도 시기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그 의미가 다르게 보일 수 있다. 한 마디로 동일한 성경 본문의 의미가 천차만별이었다. 종교개혁자들도 초기에는 성경해석의 권한을 성경을 읽는 개인에게 부여했으나 이런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타나자 당황하여 수습하려고 노력했다. 즉 교회 교사인 신학 교수와 목사에게만 성경해석의 공적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개별적 성경해석의 다양성이라는 홍수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해석에 대한 교황의 최종 권위도 거부했지만, 중세 전통의 성경해석 방법도 역시 거부했다. 중세교회는 일찍이 성경의 4중적 의미, 즉 문자적 의미, 풍유적 의미, 도덕적 의미, 신비적 의미를 받아들였다. 이것은 소위 중세의 4중적 성경해석방법으로 알려져 있는데, 알렉산드리아의 대표적인 기독교 신학자 오리겐(Origenes)의 성경해석 전통에 따른 것이다. 이러한 성경해석의 4중적 의미는 다양한 성경해석의 역사가 초대교회부터 시작된 오랜 전통이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 전통에 따르면 모든 성경 본문은 드러난 문자적 의미와 숨겨진 영적 의미로 구분될 수 있는데, 문자적 의미보다 영적 의미가 훨씬 더 가치 있고 중요하다. 그러므로 모든 중세 학자들은 무슨 보물찾기라도 하듯이 성경 본문에서 문자적 의미 너머에 있는 감추어진 영적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이러한 성경해석 방법은 초기의 루터뿐만 아니라, 몇몇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그대로 수용되기도 했으나, 점차 거부되었다.

먼저,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밝히는 문자적 해석은 해석의 출발점이긴 하지만 가치와 중요도에서 가장 낮은 수단이었다. 둘째로, 풍유적 해석은 성경 문자가 지시하는 믿음의 대상, 즉 성경 본문을 통해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찾는 방법이었다. 셋째, 도덕적 해석 방법은 성경 문자가 지시하는 행위의 대상, 즉 성경 본문을 통해 우리가 행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찾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신비적 해석이란 성경 문자가 지시하는 소망의 대상, 즉 성경 문자가 미래의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밝힘으로써 성경 본문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아내는 수단이었다. 따라서 이 마지막 의미가 가장 중요한 성경 해석의 열쇠라고 중세 사람들은 믿었다. 이 신비적 해석은 오늘날 풍유적 해석과 종종 혼돈되기도 한다. 가령 구약의 ‘시온산’을 4중적 의미로 해석할 경우, 시온산이란 문자적으로는 가나안 땅을 의미하며, 풍유적으로는 가나안 땅에서도 가장 거룩하고 뛰어난 무엇을 의미하며, 도덕적으로는 율법이 가장 신실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신비적으로는 신약의 그리스도와 교회뿐만 아니라, 장차 들어갈 천상적인 새 예루살렘의 영광을 의미한다.

이러한 중세 전통에 따른 성경의 4중적 의미를 추구한 종교개혁자들도 있었지만, 종교개혁의 성경해석 분위기는 대체로 4중적 성경해석 대신에 성경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진정한 의미, 즉 본문의 유일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성경 본문의 유일한 의미를 추구하는 종교개혁자로는 단연 칼빈이 손꼽을 수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칼빈은 성경 본문의 역사적 의미와 문법적 의미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한 대표적인 종교개혁자였다. 칼빈은 드러난 문자적 의미와 감추어진 영적 의미를 이중적인 잣대로 구분하지 않았다. 그는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는 루터의 성경해석 원리를 루터 자신보다 더 잘 이해하고 적용한 종교개혁자였다.

16세기 종교개혁은 성경해석의 역사에서도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윤리적, 신비적 의미를 성경 본문의 최고 의미로 여겼던 중세와는 달리 말씀의 역사적 의미와 문법 및 문맥적 의미를 최고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으로 성경을”이라는 성경해석의 원리와 성경의 역사적 의미와 문법적 의미는 종종 성경문자주의(Biblicism)로 오해되곤 했는데, 당시 성경문주자의 해석을 가장 선호했던 단체는 재세례파였다.

1534년 재세례파가 독일 뮌스터(Münster)를 점령하여 지상에 천년왕국과 새 예루살렘을 건설하려고 했다. 이것은 성경문자주의가 얼마나 어이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가장 잘 보여준 사건이다. 뮌스터 재세례파는 요한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과 구약성경의 모든 기록들까지도 자신들의 주장과 부합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문자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주장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뮌스터 시민들에게 재세례를 받도록 강요했다.

또한 구약성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부다처제를 하나님의 제도로 간주하여 도입했는데, 신약에서도 일부다처제의 근거를 제시했다. 즉 뮌스터 혁명의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베른하르트 로트만(Bernhard Rothmann)은 디모데전서 3장 2절 가운데 “감독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라는 구절 해설을, 감독이 아닌 사람은 누구든지 한 사람 이상의 아내를 가져도 된다는 뜻이라고 하면서 일부다처제를 도입한 네덜란드 출신 레이든의 얀(Jan van Leiden), 즉 스스로 “뮌스터의 왕”으로 선언한 얀 뵈껄스조온(Jan Beukelszoon)을 지지했다. 그들은 일부다처제를 수용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죄수처럼 잡아들여 수감했다. 재세례파의 뮌스터 천년왕국은 1535년 6월에 황제의 군대에 의해 처참하게 멸망했다.

*<생명나무> 2015년 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