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한 것, 그 이상의 것


중국에 한 크리스천 농부가 있었다. 어느 한해 중국에 심한 가뭄이 들었다. 논과 밭이 말라갔고 농작물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 농부의 논에는 다행히도 물이 고여 있었다. 여전히 폭염이 계속되던 어느 날 자기 논에 가보니 어제까지만 해도 물이 가득 고여 있던 논이 말라 있었다. 그 옆 논의 주인이 물을 다 끌어갔던 것이다. 화가 치민 크리스천 농부는 그 물은 다시 자기 논으로 다 끌어왔다. 그 물은 본래 자기 논에 있었던 물이기 때문이다. 며칠 후 다시 가보니 이번에도 옆집 농부가 자기 논의 물을 다 끌어가 버렸다. 화가 난 농부는 그 물을 다시 자기 논으로 끌어왔다. 크리스천 농부가 부당한 일을 했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물은 처음부터 자기 논에 있던 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이 편치 못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부당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남의 논의 물을 훔쳐오지도 않았습니다. 그 물은 처음부터 저의 논의 물이었습니다. 저는 정당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왜 제 마음이 편치 못합니까?” 기도하는 중에 마음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렸다. “그대는 어찌하여 정당한 일만 생각하는가? 정당한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할 수는 없겠는가?” 이 음성을 들은 크리스천 농부는 다시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정당한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기도하는 중에 농부는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내가 너에게 베풀어준 것 같이 너희도 남에게 베풀어 주라.” 늘 일던 성경말씀이었지만 이 말이 그의 마음에 다가 왔다. 이 음성을 들은 농부는 아침 일찍 자기 논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삽과 곡괭이로 자기 논에 가득 고여 있던 물을 옆집 논으로 다 흘러 보냈다. 정당한 것 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한 것이다. 이렇게 하고 나니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다고 했다.


  우리는 흔히 정당하기만 하다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적법한 것인가 아닌가가 중요한 것이지, 합법적이고 정당하기만 하다면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가 지켜야 할 기본적인 법도 지키지 않는 현실에서 정당성의 추구만으로도 존경받을 일이지만, 종교인에게는 ‘정당성,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아마도 그 것은 남을 배려하는 사랑일 것이다. 나의 소유, 나의 유익, 나의 어떤 것만이 아니라 때로는 나의 것을 가지고 남과 함께 나누는 넉넉한 배려, 그것이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일 것이다. 양보와 베품, 이웃을 위한 배려, 그것은 도덕적 요구이기에 앞서 종교적 덕목이다. 우리에게는 그 어떤 것으로도 규제 받지 않는 자유의 영역이 있다. 이것을 헬라어로 ‘아디아포라’(adiaphora)라고 말하는데, ‘불간섭의 영역’이란 뜻이다. 그 어떤 것으로도 규제받지 않는, 내 임의로 할 수 있는 자유의 영역이라는 의미이다. 크리스천은 그 자유의 영역 속에서도 나의 유익만을 구하지 않고, 남을 배려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친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