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는 칼빈을 얼마나 알고 있으며, 그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작성자: 황대우


    오늘날 한국의 장로교회교단과 개혁주의를 지향하는 신학교들이 과연 칼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으며 얼마나 그의 정신을 이어받으려고 하는지 의문이다. 웃자고 하는 말이겠지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무식하고 용감한 사람이라고 했던가! 어쩌면 한국의 장로교회와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신학교들이 그와 같은 범주에 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니 머리가 혼란스럽다. 한국장로교단, 특히 보수교단들은 칼빈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아보기도 전에 그를 폐기처분해 버렸다. 교회 현장에서는 칼빈은 교회 성장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고리타분하기까지 한 구식이라는 이유로 폐기처분 된지는 상당히 오래되었으며 이제는 보수교단의 신학교에서 마저도 그의 이름만 남아 있을 뿐 곰팡내 나는 역사적 유물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의 출생 500주년을 맞이했다고 여기저기서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하는 모양을 보니 참으로 가관이다. 그것은 아마도 무엇이든 이벤트를 해야만 산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한국교회의 행사병 때문이 아닌가 싶다. 2년 전에 대대적으로 벌인 ‘again 1907’이라는 행사에 비하면 그나마 규모가 작은 것이 다행스럽다. 그 때에도 행사에 쏟아 부은 천문학적인 비용과 그 행사와 연루된 부도덕한 잡음들 이외의 어떤 것도 남겨놓지 않은 것처럼 2009년도 칼빈 출생 500주년 행사들 역시 그러한 길을 가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참으로 안타깝고 아쉬울 뿐이다.


    수많은 칼빈 저술들 가운데 원문에서 한글로 번역된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 작업을 시작한 것은 총신대의 박건택 교수이며 총신대의 문병호 교수에 의해 올해 처음으로 칼빈의 <기독교 강요> 초판(1536년 판)이 라틴어 원전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학자는 자고로 정직한 양심을 빼면 남는 것이 없다. 그런데 한국에서 칼빈을 들먹이는 많은 학자들이 과연 칼빈과 같은 양심의 소유자들일까 의문스럽다. 어쩌면 이런 사람들 때문에 한국에서 칼빈이라는 이름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도 전에 꺾여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마치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하나님께 욕이 돌아가는 것처럼! 잘 알고 다 아는 것처럼 위장하지도 말아야 하고 또한 칼빈에게 호소하면 마치 자신이 칼빈이라도 된 양 착각하지도 말아야 한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고 그 모르는 것을 고개 숙여 배우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잘못한 것을 잘못했다고 시인하고 그 잘못을 시정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한국의 신학자와 목사는 그것을 한없이 부끄러운 일로 여긴다. 그래서 모르는 것 없이 다 아는 만능 지식인들이기를 자처한다. 나이가 들수록 자신에게 도취되는 정도는 더 심해지고 고집도 세어진다. 한 마디로 당할 장사가 없다. 이렇게 스스로 자신의 무덤을 파왔으니 이제는 그 무덤에 묻힐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현상은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아는 일에 뿌리가 깊지 못한 결과이다. 뿌리가 깊지 못한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하나를 알아도 제대로 알고, 또 알면 알수록 고개 숙일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칼빈의 신학과 생애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꽃도 아름답고 열매도 튼실한 뿌리 깊은 나무,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강을 이루어 마침내 대양에 도달하는 샘이 깊은 물, 이것이 바로 칼빈이다. 그래서 20세기 세계 최고의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칼빈을 “폭포, 원시림, 마력적인 힘”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우리가 학문적으로 바르트 보다 더 뛰어난 실력의 소유자인가? 왜 우리는 우리에게 성경적인 신앙과 신학을 물려준 칼빈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폐기처분하려고 하는가?

   오늘날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여기는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은 자신을 자랑하고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즐긴다. 이와는 달리 칼빈은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제네바의 개혁자는 자신에 대해 떠벌리는 일을 즐길 줄 몰랐고 자신을 자랑하는 일에는 더더욱 젬병이었다. 1539년에 제네바 개혁가는 로마 가톨릭의 추기경 사돌레토(Sadoleto)가 제네바 시에 보낸 편지에 답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제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을 결코 즐기지 않습니다.” 사돌레토 추기경은 종교개혁자들을 개인적인 유익 때문에 개혁에 가담한 파렴치한 자들로 비난하면서 제네바 시로 하여금 다시 로마교로 돌아올 것을 권유했다. 이런 비난에 대해 칼빈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만일 제가 제 자신의 유익들을 생각했더라면 결코 당신들의 집단으로부터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칼빈 자신의 말처럼 그가 당시 개혁에 대해 눈과 귀를 닫고 모르는 척하면서 로마교에 남아 있었더라면 만인이 존경하는 자리에 쉽게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성공가도를 달리고 싶었다면 에라스무스(Erasmus)처럼 로마교인으로 남아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는 그 쉬운 성공의 길을 포기하고 험난한 개혁자의 길을 선택했다. 한 마디로 개혁을 자신의 호구지책이나 권력을 얻기 위한 도구로 삼지 않았다는 뜻이다. 왜 굳이 이 길을 선택했는가? 그것은 여기에 진리가 있고 이 길이 주께서 원하시는 길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칼빈이 선택한 개혁의 길은 가기 편하고 쉽고 넓은 영광의 길이 아니라 도리어 불편하고 어렵고 좁은 고난의 길이었다. 어쩌면 이 길을 선택한 것은 칼빈이 아니라 주님이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칼빈이 처음부터 이 길을 가고 싶어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개혁의 길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기를 거절했던 길이다. 그런 칼빈이 개혁의 길을 가게 된 것은 제네바 개혁을 도와 달라고 자신에게 호소하는 파렐(Farel)의 음성이 마치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칼빈이 개혁자가 된 것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주님의 선택이었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자신에 대해 떠벌리기를 좋아하거나 자랑하지 않고 묵묵히 조용하게, 그러나 확신을 가지고 주님만 바라보며 그 길을 갔던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개혁자의 길이 주님께서 가게하신 길이었기 때문에 탄탄대로였고 만사형통했는가? 아니다. 오히려 제네바 개혁이라는 이 좁은 길을 가기 위해 칼빈은 목숨을 걸어야 했다. 칼빈은 목숨 걸고 목회했다. 처음 제네바 개혁자가 되어 제네바의 개혁을 시도했을 때 칼빈에게 쏟아진 것은 찬사가 아니라 비난이었고 나아가 죽이겠다는 협박이었다. 협박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그를 죽이려는 시도도 있었다. 이 모진 싸움에서 칼빈은 보기 좋게 패했다. 주님께서 선택하신 길이요 가게하신 길인데, 패배라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칼빈은 제네바 시와 교회로부터 쫓겨나고 말았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했을 뿐인데! 이렇게 쫓겨난 것 역시 매우 비참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제네바 시가 스스로 쫓아낸 칼빈을 다시 청빙하기로 결정하고 이 사실을 그에게 통보했을 때 칼빈은 제네바에서의 경험을 “하루에도 천 번씩 죽었던 그 십자가”라고 말할 정도로 끔찍스럽게 표현했다. 16세기 칼빈을 추방한 제네바는 오늘날 중소도시에 비교할 수 있다면 아무런 조건 없이 그를 따뜻하게 맞이해준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는 대도시였다. 이 대도시는 제네바에서는 꿈도 꾸지 못했던 시민권도 주었고 거처와 넉넉한 생활비도 주었다. 칼빈은 여기서 목회와 가르치는 일과 저술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결혼도 했다. 한마디로 모든 면에서 안정적이었고 아쉬울 것이 없었으므로 칼빈에게 큰 상처만 주었던 제네바로 다시 돌아갈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제네바의 청빙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런데 칼빈은 이번에도 파렐의 권면을 통해 제네바가 개혁을 위해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받아들여야 했고, 단지 이 이유 하나 때문에 죽기보다 싫었던 제네바를 향해 발길을 옮겼던 것이다. “제 자신의 주인이 제가 아님을 알기에 저는 제 심장을 도살된 것처럼 제물로 주님께 바칩니다.” 참으로 칼빈은 자신의 의지대로 살았던 사람이 아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의지에 자신의 뜻을 굴복시키며 살았던 사람이다.

 
   칼빈이 목회자요 개혁자로 제네바에 다시 돌아왔을 때 그것은 금의환향이었는가? 모든 제네바 시민들이 그를 환영하고 그가 하자는 대로 순순히 따라주었던가? 아니다. 첫 번째 전쟁보다 결코 가볍지 않는 두 번째 전쟁이 칼빈을 기다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칼빈은 자신을 제네바로 청빙한 자신의 지지자들과도 싸워야 했고 이들과의 싸움이 가장 치열했기 때문이다. 이 전쟁은 15년이라는 세월동안 치러진 장기전이었다. 1541년에 제네바로 돌아온 칼빈은 1555년까지 이들과 싸워야 했다. 이 기간동안 단 한 번도 칼빈은 자신의 주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권세의 칼자루를 쥐어본 적이 없다. 그 칼자루는 항상 칼빈의 적들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굽히거나 타협하지 않았다. 칼빈이 루터처럼 용감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고백처럼 겁이 많고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진리인 성경이 자신의 주장을 지지하는 한 하나님께서 자신의 편에 있음을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어떤 환경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갈등을 빚고 충돌할 때마다 그는 제네바에서 추방될 각오를 새롭게 다짐하곤 했다. 칼빈은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제네바 교회의 개혁을 위해 헌신했다.
 

    치열한 영적 전투에서 승리한 해인 1555년 이후에도 칼빈은 결코 교만하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칼자루를 쥐고 무분별하게 휘두르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칼빈은 1559년에서야 비로소 제네바 시민권을 받았기 때문이다. 1559년 이전까지는 시민권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시민으로서의 어떤 권한도 행사할 수 없었다. 시민권을 받고 난 후 5년 정도 더 살다가 1564년에 죽었다. 칼빈은 결코 제네바 시 전체를 쥐락펴락하는 제네바의 독재자가 아니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연수는 고작 5년 남짓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그가 독재자가 되어 무적의 칼을 마음껏 휘둘렀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그를 독재자로 묘사하는 것은 그가 남긴 회고록이나 유서를 통해 볼 때 너무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다. 잘 알려진 대로 칼빈은 자신의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 유언에 따라 그의 비석은 세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무덤을 찾기가 어렵다. 다만 제네바 공동묘지의 한 비석에 J.C.가 적혀 있는데 칼빈 연구가들은 이 J.C.를 Jean Calvin의 약자로 생각하여 그것을 칼빈의 무덤으로 간주할 뿐이다. 가능하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감추려고 한 칼빈의 삶은 그의 신학과 일맥상통한다. 칼빈 신학의 핵심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서 우리 인생의 주인이 우리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칼빈이 강조하는 자기 부인의 첩경이다. 자기 부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발생하는 부산물이다. 그리스도와 깊이 연합하면 할수록 자기 부인의 삶은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일평생 칼빈은 자신 속에 살아계신 그리스도 때문에 자기 자신을 부인하며 살았던 사람이다.

    칼빈을 불신자들에 대해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철저한 이중예정론자로 알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아마도 칼빈의 교리에 속에 전도나 선교 개념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놀랄 것이다. 칼빈은 디모데전서 2장 3-4절에 대한 주석과 설교를 통해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본래 한 형제자매이며 다만 죄로 인해 서로 찢어지고 흩어졌을 뿐인데,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먼저 믿은 신자는 반드시 불신자들이 잘 되기를 위해 기도해야 할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변한다. “사실은 믿음 안에서 우리에게 동의하지 않는 자들은 마치 우리의 적이며 이들과 우리 사이의 거리는 아주 먼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 질서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그들을 완전히 버리지 않아야 하며 그들을 다시 한 몸에 연합되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가능한 한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치 잘려나간 지체들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가여운 불신자들이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을 볼 때 우리가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 하고 그들을 돕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하며 우리의 손을 그들에게 뻗어야 한다는 것을 주목하자.” 이런 전도와 선교 원리에 근거하여 칼빈은 실제로 자신의 고국 프랑스뿐만 아니라, 또한 당대에 새롭게 발견되기 시작한 신대륙 브라질에도 선교사를 파송했던 것이다.

 
    칼빈의 말처럼 우리에게 배우고자 하는 자세가 없다면 우리는 결코 훌륭한 교사가 될 수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 자신을 가르치기 위해서라도 배워야 한다. 실로 칼빈에게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의 신학뿐만 아니라 그의 삶을 통해서도 배울 것이 많다. 칼빈을 제대로 배우고 알자. 그런 다음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려도 늦지 않다. 알아보지도 않고 ‘카더라’ 통신에 의존하여 비난하는 일은 사라져야 할 백해무익한 습관이다. 2009년은 칼빈에게서 무엇인가 유익한 것을 건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는 해, 그리고 그에 대해 제대로 배우리라 다짐하는 원년이 되기를 바란다. 칼빈의 주요 저술들 대부분은 한글로 번역되어 있다.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구할 수 있고 읽을 수 있다. 칼빈의 글을 직접 읽지 않고 그에 대해 논하는 것은 신앙의 대선배이며 우리에게 훌륭한 신학과 교회의 전통을 물려준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이 글은 월간고신 <생명나무> 2009년 7월호 특집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