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개방성: 누가 세상의 이웃인가?

 

교회의 이웃은 누구인가?’ 이 질문을 우리는 종종 던지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마치 이 질문은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찾아와 질문한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와 같다. 율법 교사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의 이야기를 말씀하신 후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반문하셨다. 교회는 자신의 이웃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면 자신이 누구의 이웃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세상에 속하지도, 속할 수 없는 교회가 세상 속에 있는 이유는 교회가 불신자들의 이웃이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가 불신자들의 이웃이 아니거나 그들의 이웃이 되고 싶지 않다면 세상 속에 있을 이유가 없다. 신자가 세상의 빛과 소금인 것처럼 교회 역시 세상의 빛과 소금인 것은 당연하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세상을 밝히는 등경 위의 등불이다. 세상을 밝게 비추고 싶지 않은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짠 맛을 잃은 소금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게 될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온 이후 사회적으로 세상과 아주 멀리 동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아주 멀어진 거리가 좁혀지기보다 더욱 멀어져 가고 있는 위기 상황이 아닐까?

이전에 효과적이었던 노방전도나 가가호호 방문전도를 교회가 지속하기 어려운 것은 그런 전통적인 방법이 지금은 역효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잦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기는커녕 마치 사회적 골칫덩어리로 취급되지는 않을까 심히 염려스럽다. 이단이긴 하지만 오래전 다미선교회 사건부터 최근 세월호사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회적 중범죄에 교회라는 이름이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었던 일들은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치부다. 또한 교회는 한국사회와 이웃으로부터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집단이라는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물론 지상교회는 세상 속에 있지만 스스로 세상에 물들지 않는 거룩함을 유지하는 거룩한 구원기관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와 같은 거룩함이 교회를 세상과 담을 쌓도록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마치 외톨이처럼 독야청청한 것은 결코 교회다운 모습이 아니다. 교회가 세상에 물들지 않으려는 모습은 고결하지만 스스로 세상과 담을 쌓아야만 자신의 거룩함을 확보하거나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세상을 등진 절이 아니다. 교회는 복음의 빛을 밝히기 위해서라도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교회는 세상의 이웃이다.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는 것이 이웃이다. 교회는 세상의 이웃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세상의 이웃이고, 교회의 이웃은 세상이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우주의 인류를 위해’(pro universo genere humano) 기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전도와 선교 사역을 위하여 불신자들이 회개하도록 기도를 하긴 해도 그들을 우리 마음에 따뜻하게 품고 사랑으로 기도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우리 그리스도인과 무관한 존재들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공간적으로 교회 안과 밖을 이원화하는 경향이 있다. 즉 교회 안을 하나님의 영역으로, 교회 밖을 마귀의 영역으로 구분하는데 익숙하다. 이런 이원론적 사고 때문에 교회 안의 일만 거룩하고 교회 밖의 일은 세속적이라고 오해하는 교인들이 많다.

이원론적 사고에 익숙한 교인은 교회 안의 일만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 믿고 산다. 거룩한 영역과 세속적인 영역으로 구분하는 이원론적 사고는 그리스도인이 사랑해야 할 대상이란 오직 하나님과 다른 교인뿐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 즉 세상 사람들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사단에게 사로잡힌 자들로서 미움의 대상일 뿐이다. 이런 사고에 젖은 교인들에게 칼빈의 권면은 충격적일 것이다. 우리의 사랑은 가치 없는 자들을 향해 지속적으로 스스로 확대해 가야 한다.” 이 권면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딤전 2:1)라는 성경구절에 대한 칼빈의 해석이다.

칼빈은 교회 밖에 있는 세상 사람들도 우리 그리스도인이 사랑해야 할 대상이라고 강변한다. 이런 주장에 대해 대부분의 교인들은 왜 우리가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는 불신자들의 구원에 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형제들인 우리가 형제들을 위해 서로 기도하고 또한 하나님의 온 교회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는가?’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이 반문에 대해 칼빈은 이렇게 반박한다. “바울은 이런 잘못된 견해에 반대하여 에베소 사람들에게 그들의 기도에 죽어 없어질 모든 사람들을 포함시키고 이들이 교회의 몸에 가까워지는 것을 제한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칼빈에 따르면 불신자들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손에 달린 문제이긴 하지만 신자라면 반드시 불신자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신자뿐만 아니라 불신자까지도 온 인류가 기독교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신자는 모든 신자가 관심을 가지고 사랑해야 할 사랑의 대상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랑 받을만한 가치가 전혀 없어 보이는 불신자에게조차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그 이유를 칼빈은 이렇게 설명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지상의 어떤 백성이나 신분도 구원으로부터 제외하지 않으시기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이 기도해야 하고 사랑해야 하는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지금 교회를 박해하고 복음을 훼방하는 자라할지라도 복음전도의 대상에서는 결코 제외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밖의 불신자들과 감옥의 흉악범죄자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단자나 페미니스트, 동성애자조차도 복음전도의 대상에서 제외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이런 이론을 말하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렇다 해도 누군가를 전도대상에서 제외한다면 이것은 어리석고 인간적인 편견의 결과일 뿐이다. 바울 사도의 가르침과 같이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구원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것으로 인정하신다.

교회 밖에 있는 모든 불신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따뜻한 마음으로 품고 사랑해야 할 대상이다. 우리는 그들이 복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때까지, 또한 그러지 않을지라도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까지 인내하면서 그들을 품고 사랑해야 한다. 왜 그래야만 하는가? 칼빈은 그 이유를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에서 찾았다. 창조주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모든 인간은 그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형제들이지만 불행하게도 인간의 타락으로 그 형제 관계가 깨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타락의 영향으로 세상이 교회의 이웃은 아니어도 교회가 세상의 이웃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칼빈의 주장에 따르면, 첫 인간의 타락 이후 온 인류, 세상은 하나님으로부터 매우 멀리 떨어졌으며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추방당할 만했고 그분과 어떤 교류도 없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율법 시대에 그분이 한 백성을 선택하셨고 그들을 인도하시기 위해 자신의 날개아래 그들을 모으셨으며 나머지 세상은 혼란 가운데 내버려 두셨다. 하지만 비록 사람이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는 자연히 그분께 속해 있다. 그리고 그분이 그들 모두를 만드신 것과 같이 그렇게 그분은 또한 그들을 다스리시고 그분의 덕과 위대한 선하심으로 그들을 지켜주신다.”

칼빈의 주장은 이어진다. “사람들이 타락을 향해 가는 것을 우리가 볼 때, 비록 그들이 불신자들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복음을 믿는 믿음 안에서 그들을 우리와 결합하실 만큼의 은혜를 그들에게 베푸셨던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고, 할 수 있는 대로 열심히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만드셨기 때문이고, 우리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형제애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믿음 안에서 우리에게 동의하지 않는 자들은 마치 우리의 적이며 이들과 우리 사이의 거리는 아주 먼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 질서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그들을 완전히 버리지 말아야 하며 그들이 다시 한 몸에 연합할 수 있도록 우리가 가능한 한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치 잘려나간 지체들과 같기 때문이다.”

칼빈은 교회 밖의 불신자들을 잘려나간 지체들즉 하나님의 한 가족으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형제애를 가지고 그들을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불신자들이 우리 신자의 적이라는 사실을 칼빈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는 불신 이웃이 교회를 적대해도 결코 이웃인 그들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고, 또한 그들이 우리와 함께 한 몸즉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그날까지 최대한 참고 인내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의 눈에는 불신자들이 머리카락을 서게 만드는 괴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신자든 불신자든 우리 모두가 하나의 동일한 본질즉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교회는 불신 이웃에게 가장 필요한 복음의 등불이다.

 

불신자들을 향해 형제애 정신을 발휘하는 신자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이유가 없다. 칼빈에 따르면,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가여운 불신자들이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을 볼 때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 하고 그들을 돕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하며 우리의 손을 그들에게 뻗어야 한다.” 전도와 선교는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전도와 선교에 열심을 내어야 한다. 전도와 선교의 대상은 당연히 교회 밖에 있는 세상 사람들, 즉 그리스도를 모르는 불신자들이다. 이들은 교회의 도움이 가장 절실한 교회의 이웃이다.

칼빈은 지적하길, “자신들의 이웃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는 모든 자들, 또한 가여운 불신자들을 인도할 마음은 없고 오히려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는 자들은 하나님께 영예를 돌리기는커녕 그분의 제국의 권능을 최대한 약화시키며 그분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지 못하도록 제한하기를 원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고난의 도를 부분적으로 어둡게 만들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분께 주신 위엄을 감소시킨다.” 한 마디로, 불신자 전도에 전혀 관심이 없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 건설의 방해물과 걸림돌이다.

그리스도의 지상명령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인과 지상교회의 가장 장요한 사명이다. 복음전도 없이는 지상교회도 없다. 복음전도는 복음 선포나 설교와 다르지 않다. 자신이 믿는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는 간증도 전도이자 설교다. 참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은 모든 그리스도인, 모든 교회의 존재 이유와 목적이기도 하다. 복음을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문제의 책임은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듣는 자에게 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는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세상의 변화는 복음으로 일어난다. 복음이 심겨지고 물이 공급되는 곳에서 나무는 자라고 열매가 맺힌다. 이 복음의 열매가 곧 성령의 열매다. 성령의 열매는 우리 그리스도인을 통해 맺히기 시작하여 평생 시들지 않고 마치 단단한 알곡처럼 여물어져 가고 익어간다. 교회는 이웃 세상에 가장 요긴하고 필요한 복음, 즉 영생의 진리를 제공할 수 있고 제공해야 한다. 교회가 세상의 이웃이라면 세상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한다. 정작 그 이웃인 세상은 복음이 얼마나 값진 보물인지 모른다. 따라서 복음을 전할 때 주님보다 값진 보물이 없다는 것을 이웃이 깨닫도록 먼저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전도는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교회는 불신 이웃을 돕는 진정한 이웃이 되어야 한다.

 

불신 세상이 없다면 사실상 신자를 불러 모으는 지상교회도 필요 없다. 불신 세상이 존재하는 한 지상교회의 사명은 지속된다. 교회의 이웃인 세상은 정작 교회를 이웃으로 받아들이지도 인정하지도 않을지 모른다. 교회 주변을 돌아보라. 교회 주변의 불신 이웃이 교회를 환영하는가?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면 교회는 왜 그런지 고민해야 한다. 교회가 세상에 속한 존재는 아니지만 세상에 적응할 필요는 있다. 적응은 세속화라는 변질과 다르다. 이러한 사실은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라고 고백하는 바울의 가르침을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다.

교회는 철저하게 그 지역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 지역의 이웃이 되지 않는 교회는 지상교회로서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기 어렵다. 교회가 그 지역 불신자들의 진정한 이웃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셔야 한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시지만 섬기시는 왕이시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이자 신부인 교회, 즉 우리 죄인들로 구성된 지상교회를 아끼고 사랑하신다. 이처럼 섬기시는 왕을 머리로 모신 교회 역시 불신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풀어야 하지 않을까?

교회는 교회의 방식으로만 불신 이웃에게 이웃이 되고자 하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교회는 강도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피투성이가 된 사람을 도와준 사마라아인과 같은 이웃이 되어야 한다. 이웃이 원하는 방법, 이웃에게 필요한 방법으로 이웃을 도와야 한다. 교회가 불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실 때 말씀하신 것처럼, 때론 뱀처럼 지혜로울 필요가 있다. 비둘기처럼 순결한 복음을 뱀처럼 지혜롭게 전하는 것은 반드시 세상의 효과적인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불신 이웃에게 교회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교회의 문턱을 낮추어야 한다. 교회는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어야 한다. 도둑이나 강도가 무서워서 교회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은 생각해볼 문제다. 물론 오늘날 수많은 범죄의 가능성에 노출된 도시교회가 24시간 문을 열어 놓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사전에 범죄가 발생하지 않도록 반드시 최선의 방책을 먼저 마련할 필요가 있다. 만일 안전만 확보된다면 특정 공간을 24시간 공개 장소로 개방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만인이 기도하는 장소로서의 교회당을 회복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교회가 불신 이웃이나, 신자들의 불신 형제들에게 진정한 이웃이 되는 좋은 방법으로는 불신 이웃의 결혼식과 장례식 등에 참여하는 것을 들 수 있다. 교회가 축하 화환, 축의금이나 부의금을 보내는 것도 좋고, 직접 참석하여 축하하는 것도 좋다. 불신 이웃의 기쁨과 슬픔에 동참한다면 최소한 교회는 불신 이웃으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일은 확실히 줄어들 것이다. 장소로서 교회당을 개방하는 것뿐만 아니라, 대사회적인 선행과 봉사에 교회는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한다. 주차장 개방은 물론이고, 쉼터나 독서카페로 장소를 제공하는 것도 교회의 개방을 위해 생각해볼만하다. 이런 배려와 봉사, 베풂은 매우 성가시고 힘들지만 반드시 필요하다.

불신 이웃에게 교회 행사 때 교회 나오라고 강요하는 일보다 먼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환한 미소로 그들을 따뜻하게 환대하는 것이 지혜로운 복음전도가 아닐까? 비록 가장 가까운 불신 이웃이 적개심으로 대할지라도 교회는 지속적으로 그들을 따뜻하게 환대할 뿐만 아니라, 가식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는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한다.


* 위 글은 2023년 <기독교보> KOL란에 실린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