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인 삶이란?
작성자: 황대우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 삶
칼빈에 따르면 종말을 기다린다는 것이 유기된 자들에게는 끔찍스러운 것이겠지만 선택받은 신자들에게는 분명 유쾌하고 복된 일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연합과 친교를 통해 새 사람으로 거듭난 모든 신자들에게 제시된 모범, 즉 따라야 할 본보기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시다. 하나님의 양자로 받아들여진 유일한 조건은 바로 양자됨의 끈이신 그리스도를 그들의 삶에서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영혼뿐만 아니라 육신까지도 천상적인 타락하지 않음과 시들지 않는 면류관의 자리에 선정되었기 때문에 주의 날까지 그것들이[=우리의 영혼과 육신이] 순수하고 썩지 않게 보존되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아야 하는데, 이것이 곧 복음이다. 칼빈은 그리스도를 바르게 아는 것, 즉 복음을 단순히 설명에 의한 이해의 문제보다는 오히려 삶을 통한 경험의 문제로 본다. “왜냐하면 그것은 말의 가르침이 아니라, 삶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가르침” 즉 “교리”는 언제나 논리적인 이론이기 보다는 신앙적인 경험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이러한 신앙 경험을 일으키는 주체는 바로 성령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칼빈이 말하는 이와 같은 신앙 경험이 결코 신앙의 주관주의와 영성주의로 귀결되지 않는 이유는 칼빈이 그러한 경험의 진정성이 언제나 가시적이고 객관적인 말씀인 성경에 의해 시험되고 평가되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칼빈은 어디에서도 그리스도인들에게 흠도 점도 없는 완전한 삶, 즉 “복음적인 완전함”을 요구하는 완벽주의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육신을 입고 사는 인간의 연약함, 즉 자신의 연약한 능력의 정도를 충분히 고려하기 때문에 매일 조금씩 앞으로 주님의 길을 따라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기를 권고한다. 이것은 완벽한 삶이 아니라, 어제보다 오늘이 조금 더 나은 삶을 추구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매일 조금씩 전진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은 언제까지 지속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선함 그 자체에 도달하게 될 때까지이다. 전 생애에 걸쳐 우리가 이것을[=선함을] 찾고 추구하지만 우리는 육신의 연약함을 벗어버린 후에 그것[=선함]과의 충만한 교제에로 받아들여 질 그 때에야 비로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교제하고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을 부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을 포기하는 것에서부터 그리스도인의 삶은 시작된다. 이러한 자기부인은 곧 자신을 죽이는 것, 즉 자기 죽임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원수 사랑을 의무감이 아닌, 사랑의 순수한 감정으로 실천하는 자가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그의 악함을 생각하지 않고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볼 때 실천 가능한 것이 된다. 칼빈에 따르면, 다른 한 편으로, 자기부인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내의 모범이 되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우리가 교제할 때 우리 자신의 십자가로 인한 고통은 그 자체로 오히려 우리에게 복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증진시키기도 한다.
칼빈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이 삶에서 겪는 고난과 고통은 이 세상의 삶을 무시하고 내세의 삶을 명상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반영된 것이다. 즉 고난과 고통은 신자들이 지금 이 세상 속에 만연한 죄를 멀리하고 미래에 대한 영생의 약속을 소망하며 살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장치이다. 그리고 장차 다가 올 삶과 비교하게 될 때 현재의 삶은 무시해 버려도 좋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전적으로 멸시하거나 싫어해야 한다. 이 땅에서의 삶은 우리를 죄에 속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먼저 마치 이 땅에서 영원토록 살아 갈 것처럼 세상의 한시적이고 덧없는 것에서 최대의 안전과 평화와 즐거움을 찾으려고 하는 욕망을 억제하고 멀리해야 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생에 대한 왜곡된 사랑에서 벗어나게 되는 모든 것은 더 선한 삶에 대한 열정으로 타올라야 한다.”
우리를 죄에 속박하려고 하는 이 세상의 삶을 무시해야 한다고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결코 이 세상의 삶 자체를 증오해서도 안 되고, 또한 세상의 삶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몰라서도 안 된다고 가르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생이, 비록 한없는 불행들로 가득 차 있을지라도, 거절되지 말아야 할 하나님의 강복 아래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의 삶을 “결코 배척되지 말아야 할 신적인 호의의 선물들 아래에 놓도록” 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지상적인 삶을 사는 것은 신적인 관용의 직무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세상은 하늘나라의 영광을 위해 준비하는 장소이며 최후의 승리를 얻을 때까지 전투해야 할 전쟁터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선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비의 감미로움을 맛보기 시작함으로써 우리의 소망과 열정은 그분의 충만한 계시를 열심히 추구하도록 단련되는 것이다.
신자들, 즉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지상에 거하는 동안 자신들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처럼 되기 위해 도살할 양처럼 되어야 한다. 지상의 고난과 고통을 참고 인내한 신자들을 하나님은 결국 자신의 행복을 나누는 동참자로 삼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주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나타나실 때 비참하고 부당하게 괴롭힘을 당한 모든 자신의 백성에게 안식을 주실 것이고 반대로 그들을 괴롭힌 원수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우리의 유일한 위로이다. 왜냐하면, 만일 이것이 제거된다면, 반드시 마음을 낙담하도록 하거나 아니면 이 세상의 헛된 위로들로 우리를 재난에 빠트리도록 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칼빈은 덧붙여 말하기를 신자들이 부활의 능력을 바라봄으로써 모든 고난과 고통을 물리치고 최후의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라고 한다.
종말론과 기도
인내를 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인 삶은 기도하는 삶이다. 신자들은 끊임없이 참고 기도해야 하는데, 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에게 위로를 주신다. 종말론적인 기도는, 특별히,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가운데 “나라가 임하옵시며”에 대한 칼빈의 해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칼빈은 하나님의 나라와 기도의 상관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들을 부인하고 세상과 이 땅의 삶을 무시함으로써 하늘의 생명을 사모하기 위해 하나님의 의에 이르게 하신다. 이와 같이 이 나라에는 두 부분이 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집단으로 그를 대적하여 싸우는 육신의 모든 욕망들을 자신의 영의 능력으로 교정하신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다스림에 순종하도록 우리의 모든 생각들을 형성시키신다...
따라서 이 기도는 우리를 세상적인 부패로부터 물러서게 해야만 하는데, 이러한 부패는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번성하지 못하게 한다. 동시에 이 기도는 육신을 죽이려는 열심에 불을 붙여야만 한다. 끝으로, 기도는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도록 가르쳐야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식으로 그의 나라를 확장시키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속사람이 새로워진다면 겉사람이 쇠하는 것을 나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하나님 나라의 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즉 그 조건은 우리가 하나님의 의에 굴복하게 되면 그는 우리를 그의 영광의 참여자로 만드신다는 것이다. 이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빛과 진리를 언제나 점점 더 빛나게 하심으로써 사탄의 왕국의 어두움과 거짓된 것들이 사라지고 꺼지고 없어지게 될 때이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시며, 그의 영의 도우심을 받아 그들을 의에로 인도하시며 또한 그들을 인내할 수 있도록 강하게 만드신다. 그러나 그는 원수들의 사악한 음모를 뒤집어엎으시며 그들의 계략과 속임수를 폭로하시며 그들의 악의에 대항하시고 그들의 완고함을 억압하시며 또한 마지막에 가서는 드디어 그의 입의 성령으로 적그리스도를 죽이시며 그가 강림하실 때의 광채로 모든 불경건을 파괴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을 가르치는 칼빈의 종말론은 단순히 개인의 경건과 죽음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이 땅에서 십자가를 지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도래하게 하고 확장시키며 동시에 사탄의 나라를 물리치는 최선의 방법이다. 하지만 모든 악과 불경건이 파괴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실 때까지 항상 깨어서 “마라나타!”를 외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는 종말론적 신앙, 즉 마라나타(Maranata) 신앙이다. 그리스도인은 지금 살고 있는 환경이 아무리 좋아도 자신이 이 세상 속에 사는 한 나그네라는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지 않고 항상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세상을 도피하거나 등질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 세상 속에서 당당하게 이 세상의 악과 더불어 싸워야 한다. 이 전투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승리의 깃발을 꽂으신 이긴 전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 속에서는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긴박한 싸움이다. 이 세상에서 사탄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그날까지 최후의 발악을 멈추지 않을 것이며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려고 덤벼들 것이다. 사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세상을 두루 다니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을 공격하기 위해 밤낮으로 계략을 세우고 틈만 나면 공격을 서슴지 않는다.
이러한 사탄의 공격을 막는 최선의 방어책은 그리스도와 교제를 지속하는 것이요, 항상 깨어서 지혜를 얻기 위해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그리스도로 무장한 상태로 깨어 있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세상을 성실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사는 일이 호락호락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산다 해도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은 정말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악과 불의로 가득한 이 세상을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속히 오시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것이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이 세상의 모든 악과 불의는 깨끗이 사라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개혁주의학술원에서 매년 발행하는 총서 <칼빈과 영성>에 기고된 글에서 일부, 그리고 <칼빈과 개혁주의>에서 일부를 발취하고 약간 수정한 것으로 인터넷신문 "개혁정론"의 기획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