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결혼과 이혼, 그리고 자녀
작성자: 황대우
4세기에 활동한 교부이며 라틴어 번역 성경인 불가타성경의 번역자 제롬(=히에로니무스)은 순결한 삶, 과부의 삶, 결혼한 삶에 각각 점수를 매겼는데, 순서대로 100점, 60점, 30점을 주었다. 제롬에 따르면 순결한 삶 즉 독신이 100점짜리의 삶인 반면에 결혼생활은 30점짜리 밖에 되지 않는다. 이러한 수도원 중심적 전통이 중세 1000년을 지배했다. 중세는 하나님을 위해 독신서약을 한 수도사의 금욕적 삶이 최상의 인생으로 치부되었다.
중세시대 결혼은 혼인성사라는 7성례 가운데 하나였지만 부부생활은 결코 아름답고 선하게 묘사되지 않았다. 중세 로마가톨릭교회는 성적인 모든 것을 죄악시했기 때문에 결혼을 통한 성생활에 종족번식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중세 교회가 온갖 핑계를 들어 부부의 성생활을 금욕적으로 제한하고 부정적으로 묘사했던 주된 이유는 다름 아닌 중세의 독신제도였는데, 이것은 기독교 1000년의 중세 역사를 지배한 거룩한 제도였던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에게 독신은 거룩한 제도이기는커녕 하나님의 명령과 역행하는 반성경적 제도였다. 그들은 결혼을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제도라고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본을 보였다. 결혼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과 선택은 “위대한 혁명”으로 평가될 만큼 종교개혁 최대의 이슈 가운데 하나였다.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은 단순히 이론과 교리에 그치지 않고 실천하고 행동하는 삶으로 나타났다. 수도사와 사제의 신분으로 종교개혁 진영에 가담한 사람들은 독신의 수도복과 사제복을 과감하게 벗어던지고 주저 없이 결혼이라는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로 인해 1520년대에 결혼한 사람들의 수는 급증했다.
중세 교회법은 만 12세 이상의 여자와 만 14세 이상의 남자에게는 부모의 동의나 증인 없이도 비밀리에 결혼할 수 있도록 허용했는데, 루터는 결혼을 적극적으로 장려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비밀스러운 조기 결혼의 부정적인 결과 때문에 부모의 동의 없는 조기 결혼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루터는 부모가 자녀에게 결혼을 강요하거나 방해하지 않아야 하는 반면에 자녀는 부모의 동의 없이 혼인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물론 결혼 정년기가 된 자녀의 결혼을 부모가 기꺼이 허락할 수도 없지만 막을 길도 없는 경우 부모는 반대 이유를 밝히고 자녀는 부모의 승낙 없이 결혼할 수 있다고 했다.
루터는 재물이나 가문이나 혈통이나 성적 욕구가 결혼의 원인이 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루터에 따르면 결혼한 부부는 서로 숨기는 것이 없이 모든 것을 공유해야 하고 구분이나 차별이 없어야 한다. 루터는 부부싸움 즉 가정불화를 신의 진노로 비유했는데, 정치적 의미에서는 전쟁과 죽음의 위협으로, 종교적 의미에서는 영혼과 천국의 위협으로 보았다. 루터는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를 존경할 정도로 사랑했다. 그는 자주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내에 관하여. 나는 하전(下典. 아래 주인)이고, 그녀가 상전(上典. 윗 주인)이다; 내가 아론이고, 그녀는 나의 모세다.”De uxore. Ego sum inferior dominus, ille superior; ego sum Aaron, ille est Moses meus.) 루터는 당대의 관행을 무시하고 자신의 유언을 통해 아내에게 전 재산을 상속할 정도로 신뢰했다.
중세교회는 이혼 대신에 별거를 허용했다. 반면에 루터와 마르틴 부써(Martin Bucer)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이혼과 재혼을 허용하고 합법화했다. 또한 그들은 귀족이 본처와 오래 동안 별거하며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는 경우 어쩔 수 없이 중혼 즉 이중 결혼을 허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이 허용한 이혼과 재혼이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개신교 혼인 법정은 부부 사이에 발생한 불화 문제에 대해 먼저 악화된 관계를 해결하도록 권고했고, 가능한 재결합하도록 최선을 다한 후에야 이혼과 재혼을 허락했다. 칼빈이 제네바에 돌아온 1541년부터 1564년 죽을 때까지 제네바 시가 승인한 이혼은 40건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이혼 비율이 매우 낮았다.
종교개혁자들이 정당한 이혼 사유로 간주한 것들은 간통, 만성적 발기부전, 배우자를 버리고 가출한 경우, 적개심이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적대적인 경우, 처녀가 아닌데 처녀라고 속여 결혼한 것과 같이 악한 의도로 배우자를 속인 경우 등이었다. 이와 같은 사유로 지속적인 부부 생활이 불가능한 경우 루터는 공개적인 이혼이나 재혼보다는 당시 종종 비밀리에 이루어졌던 중혼을 개인적으로 선호하고 권장했다. 제네바 시의회 역시 부부 사이의 심각한 불화로 인해 결혼 생활이 파경에 이를 경우 이혼 보다는 중세 전통이었던 별거를 선호했다. 가령 아내나 자녀에 대한 혹독한 학대, 지속적인 부부 싸움, 습관적인 가출, 전염병 등이 별거 판정을 받는 사유들이었다.
칼빈과 제네바 시는 나이 차이가 너무 지나치게 많은 결혼에 대해서는 “자연 질서를 위반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반대했다. 그래서 제네바 시당국은 부모 정도의 나이를 먹은 배우자와 결혼하는 것을 법으로 금했으나 이 원칙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되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20여 명의 자녀를 낳은 것으로 알려진 40세의 과부와 22세의 청년 사이의 약혼을 무효로 판결하고, 70세가 넘은 과부와 27-8세 정도의 하인이 결혼하는 것 역시 무효라고 선언했던 제네바 시는 칼빈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만 68세의 제네바 종교개혁자 기욤 파렐(Guillaume Farel)이 그보다 40년 정도 젊은 여자와 혼인하는 것에 대해서는 용인했다.
종교개혁 초기부터 비텐베르크의 종교개혁자 루터는 자신이 독신의 수도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임신”을 “여성의 존재 이유”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녀를 많이 낳도록 장려한 가정 예찬론자요, 자녀를 결혼 생활의 가장 큰 보증과 띠로 비유한 자녀 예찬론자였다. 심지어 “자식 없는 결혼 생활은 태양 없는 세상과 같다”는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만42세의 늦은 나이에 결혼한 루터는 모두 6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는 어린 시절을 인생에서 가장 복되고 아름다운 시기로 보았다.
종교개혁자들은 이율배반적이고 부자연스러운 독신제도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결혼에 관한 법을 만들어 성직자에게도 결혼을 장려했다. 결과적으로 개신교에서는 성직자들의 독신제도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이것은 가정을 잘 다스리는 자를 교회 지도자의 자격으로 제시한 바울의 가르침에 충실한 것이었지, 플라톤의 국가론과도 무관하고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동양사상과도 무관한 것이었다. 16세기에는 개인의 결혼이 개신교로의 개종을 의미했던 것처럼 결혼에 관한 시민법 제정은 정치적으로 개신교를 수용한 것임을 의미하는 행동이었다.
오늘날 서구의 결혼제도는 종교개혁을 통해 재탄생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이유는 종교개혁자들을 통해 1000년 동안 거룩한 제도로 군림했던 독신생활이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유명무실한 성례로서의 중세 결혼이 누구에게나 축복받아야 할 신적인 제도로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독신을 찬양했던 중세 교회법은 이제 결혼을 찬양하는 개신교 사상으로 새로운 교회법과 시민법으로 거듭났다. 또한 결혼이 정욕과 같은 성적인 죄에 대한 구제책이라는 대중적인 개념으로 자리를 잡았고, 죄악 된 인간 본성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결혼이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 되었다.
존 위티 주니어(John Witte, Jr.)는 자신의 책 <성례에서 계약으로>에서 말하기를, “만약 비텐베르크가 개신교 혼인법의 베들레헴이라면, 제네바는 나사렛이라 할 수 있다.” 비텐베르크는 루터에 의해 결혼을 누구에게나 장려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세교회가 허용했던 수많은 이혼 사유들을 상당 부분 수용했다. 하지만 제네바는 루터의 주장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이혼 사유를 간음과 유기 두 가지로만 제한하였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신적인 권위를 인간적인 사유로 허물지 못하도록 경계했다.
루터에게 결혼은 자연법에 속하는 문제, 즉 국가와 사회를 이루는 최소 단위인 가정으로 간주하는 시민법의 문제였다. 부부 사이에 발생한 문제에 대해서는 목회자가 개입하지 말아야 하며 모든 것을 법률가와 위정자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 루터의 입장이었다. 루터는 결혼 생활의 문제에 대한 목회적 인식이 부족했다. 반면에 칼빈은 가정의 문제를 교회의 일 즉 목회의 대상으로 생각했다. 결혼을 부부가 하나님과 언약한 것으로 간주했던 칼빈에게 부부 생활이나 가정 문제는 단순히 시민법만이 아니라 교회법에 의해서도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네바 시는 칼빈의 요구에 따라 제네바 교회치리회 즉 제네바 당회를 조직했으며, 이 치리회는 모든 제네바 교인의 가정 문제를 성경의 잣대로 판단하고 간섭하는 권리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 교회치리회가 오늘날 개혁교회와 장로교회 제도의 특징인 당회의 모체다.
*위 글은 <생명나무> 2015년 7월호에 게재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