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이중적 칭의론: 존재와 행위의 칭의


 

 

 

종교개혁자 칼빈은 루터가 주장했던 이신칭의 (justification by faith)의 핵심 개념을 수용하였다. 루터가 주장하는 이신칭의 교리의 핵심에는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에 맞서서 하나님의 의가 아무런 조건 없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서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법정적 의 (forensic righteousness)의 개념과 그리스도의 의가 믿음을 통해서 죄인에게 전가된다는 전가된 의 (imputed righteousness)의 개념에 근거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개념이 자리잡고 있다. 이로 인해 루터는 이신칭의 교리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유명한 어구로 표현했다: "의인인 동시에 죄인 (simul iustus et peccator)!"


 

그렇다면 칼빈의 칭의론 이해에 나타난 두드러진 특징은 무엇인가? 더 큰 맥락에서 그의 칭의론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unio cum Christo)에서 흘러나오는 이중적 은헤 (duplex gratia)의 개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간략하게 표현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중적인 것으로 구체적으로 이는 칭의와 성화로 나타나며 양자는 서로 구분 (distinction)될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서로 분리 (separation)될 수 없는 것임을 뜻한다 (<기독교강요> 3.11.6). 따라서 칼빈에게 칭의는 실질적으로 성화와 불가분의 관계 속에 놓여 있음을 뜻한다. 즉 칭의의 은혜를 받은 모든 사람은 예외없이 성화의 은혜를 받게 됨을 뜻한다.


 

칼빈은 자신이 주장한 이중적 은혜의 개념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칭의론을 전개했으며 일반적으로 “이중적 칭의 (double justification)” 개념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중적 칭의란 무엇인가? 이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첫째, 원래적 의미에서 죄인인 인간을 의롭다 칭하시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법적 행위를 가리키는 법정적 칭의를 들 수 있다. 이는 ‘존재’에 관한 칭의를 가리킨다. 만약 하나님 앞에서 율법의 요구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을 만큼 ‘행위’가 완전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행위’로 말미암아 칭의함을 받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행위로는 의가 없으므로 율법과는 상관없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붙잡고 이에 근거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인정받고 의롭다고 칭함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죄에 대한 사면을 선언하시는 법정적 차원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 칼빈이 말하는 전가된 의에 근거한 칭의 개념의 핵심이 드러난다. 따라서 칭의는 하나님께서 죄인의 죄를 용서하시는 소극적 요소와 죄인을 더 이상 죄인으로 인정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하여 의인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시는 적극적 요소를 포함한다. 따라서 칼빈에게 칭의란 죄인이 의인으로 인정받아서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가리킨다 (<기독교 강요> 3.11.2).


 

 

인간의 행위나 공로가 인정을 받아서 의로운 자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값없이 거저 주어지는 죄용서로 인해 죄인이라는 한 인간이 의로운 자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누가복음 18:14에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자기 집으로 내려갔다는 말씀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칼빈은 이 세리가 자신의 어떤 행위나 공로로 말미암아 의를 얻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밝힌다. 죄인이 오직 믿음으로 의인으로 인정함을 받게 된다는 이신칭의의 교리의 주된 요점은 칭의가 인간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존재’를 의인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법정적 행위에 놓여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둘째, 또 다른 의미에서 칭의, 즉 이중적 칭의는 ‘이미’ 존재의 관점에서 칭의함을 받은 사람의 ‘행위’가 이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 칼빈이 말하는 이중적 칭의는 칭의의 조건 (condition)으로서 사람의 행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앞서 설명된 일반적 의미에서 칭의의 결과 (result)로서 하나님에 의해 의인으로 인정된 사람의 행위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칭하시는 것을 뜻한다. 칼빈에게 이중적 칭의가 필요한 이유는 칭의함을 받은 인간의 행위에는 여전히 죄악의 잔재가 남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루터는 칭의함을 받은 인간을 동시에 의인이며 죄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여기에 루터의 실존적 고뇌가 담겨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칼빈도 이러한 고뇌에 동참했다. 그러나 칼빈에게 모든 인간의 행위는 그 행위 자체에 결점이 있을 뿐 아니라, 다양한 과실들로 인해 더럽혀져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먼저 그 사람을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인정하시기 않고서는, 그 행위가 어떤 가치를 지닐 수 없는 것이었다. 루터가 칭의 이후에 인간의 실존을 애매모호한 상태로 묘사하였다면 칼빈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칭의함을 받은 인간의 행위도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이중적 칭의개념을 주장하게 된 것이었다. 가브리엘 비엘 (Gabriel Biel)을 위시한 중세 후기의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죄인인 인간의 행위가 그 자체가 율법의 언약에 근거해서 구원을 얻기에는 불충분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를 은혜로 말미암아 받아주시므로 구원에 합당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기독교 강요> 3.17.15).

 

칼빈의 이중적 칭의 개념은 로마 가톨릭이 내세웠던 공로 사상을 전적으로 배격하는 성경적 가르침에 근거한 주장이었다. 왜냐하면 먼저 첫째 일반적 의미에서 칭의 개념은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인간의 행위나 공로와는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하여 오직 은혜로서 (sola gratia)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시고 선언하시는 법정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둘째 의미에서 칭의는 이미 칭의함을 받은 자의 존재가 아니라 그의 행위가 은혜로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을 가리킨다. 이와 유사하게 로마 가톨릭도 은혜를 언급한다. 그러나 이 주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인간의 ‘행위’나 ‘공로’ 그 자체가 구원을 얻기에 불충분한 것이므로 칭의를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사실상 은혜의 은혜됨을 부인하는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에 앞서 먼저 인간 행위를 긍정하고 그 부족한 부분을 하나님의 은혜로 보완 또는 보충하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칼빈이 말하는 이중적 칭의의 두 번째 개념은 인간의 ‘존재’가 아니라 그의 ‘행위’에 대한 칭의를 말한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은 비록 하나님의 은혜의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시종일관 인간의 ‘행위’에 근거한 칭의를 말할 따름이다. 로마 가톨릭의 칭의론에는 사실상 칼빈의 이중적 칭의 개념이 자리 잡을 가능성이 전혀 발견되지 아니한다. 여기에 칼빈이 말하는 이중적 칭의와의 결정적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