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인 교회 (에베소서 1장 20-21절)

우리 교회는 “0000교회”입니다. 여기서 ‘교회’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교회에 대한 정의는 다양합니다. 오늘날 신학적으로 가장 보편적인 정의는 삼위일체인 정의입니다. 즉 교회는 성부 하나님의 백성이요, 성자 예수님의 몸이며, 성령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삼위일체적입니다. 하지만 이 교회는 성부의 교회와 성자의 교회와 성령의 교회로 구분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유일한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교회라는 뜻입니다.

     에베소서 본문은 이와 같은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셔서 자신의 오른 편에 앉히심으로 만물을 그의 발아래 복종하게 하셨습니다. 즉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만물의 최고 통치지로 삼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 주님이 만물의 최고 통치자가 되셨다는 사실에서 끝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만물의 최고 통치자를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다는 사실까지 밝히고 있습니다. 물론 성부 하나님께서 부활하신 성자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다”는 원문의 정확한 의미는, 예수님을 “만물 위의 머리로 교회에 주셨다”입니다. 하지만 의미가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한글성경의 번역은 비록 약간의 오해의 소지가 없지 않지만 상당히 정확하고 의미 있는 의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과 결론은 만물의 통치자이신 우리 주님이 교회의 머리가 되셨다는 내용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리고 교회는 머리이신 그분의 몸입니다. 이 몸의 지체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 즉 교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두 분야의 머리이심, 두 영약의 주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만물의 머리, 즉 만물의 주님이십니다. 다른 하나는 교회의 머리, 즉 교회의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유심히 살펴보면 우리 주님께서 만물과의 관계에서 만물을 다스리시는 통치자로서 만물의 머리이시지만, 그렇다고 만물을 그리스도의 ‘몸’이라 부르지는 않습니다. 오늘 본문뿐만 아니라, 성경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피조물인 만물을 ‘그리스도의 몸’에 비유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통치자로서 만물의 머리이신 주님께서 교회의 머리되심을 말할 때는 교회를 ‘그의 몸’이라 부릅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교회 사이의 관계가 예수님과 만물 사이의 관계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과 만물의 관계는 단순히 주인과 종의 관계, 즉 상명하복의 관계일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는 단순한 상명하복의 관계가 아닙니다. ‘머리와 몸’의 관계입니다. 즉 서로 교제하는 관계, 서로 사랑하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는 머리이신 예수님과 그분의 몸인 교회의 관계를 부부관계, 즉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비유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묘사합니까?

     첫째로,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은 20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은 자들의 첫 열매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아담의 타락으로 발생한 죽음을 정복한 승리의 표지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미래적 부활의 근거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죽어도 다시 사는 소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죽지만 다시 사는 부활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오른 편에 앉아계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천상천하의 최고 통치자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오는 본문에서는 최고 통치자를 두 방면으로 해설하는데, 하나는 만왕의 왕으로, 다른 하나는 만물의 왕으로 묘사합니다. 21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왕의 왕으로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라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고 오는 세상의 모든 통치자와 권력가와 능력자와 주권자 가운데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보다 높을 수 없고, 그들 모두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와 지배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22절 말씀은 최고 통치자이신 예수님을 만물이 복종해야만 하는 만물 위의 머리, 즉 만물의 왕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만인과 만물의 머리이심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죽은 자든, 산 자든, 어떤 피조물이든 어떤 것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를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강조점은 단순히 우리 주님이 천상천하의 최고 통치자, 즉 온 세상과 만물의 왕이 되셨다는 사실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만왕의 왕, 만물의 왕이신 주님께서 바로 교회의 머리가 되셨다는 사실이 오늘 본문의 최종적인 강조점입니다.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22-23절)

     성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를 죽은 자들 가운데 살리셔서 온 우주의 왕이신 만왕의 왕으로, 만물의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만왕의 왕, 만물의 왕을 교회에 머리로 주셨습니다. 즉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삼으셨습니다. 즉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는 머리와 몸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만왕의 왕, 만물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는 그분의 몸입니다. 그렇다면 몸인 교회의 지체는 당연히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겠지요. 우리는 예수님의 몸인 교회의 지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 교인이 지체이므로 우리가 곧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교회입니다. 이것은 결코 틀린 표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우리가 교회일까요? 흔히 말하는 ‘국민이 곧 국가다!’라는 표현을 잘 압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인이 곧 교회’일까요? 정말 교인인 우리가 교회일까요?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교인이 곧 교회다’를 가르치는 것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교인이 곧 교회다’를 가르치기 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이 곧 교회다!’ 혹은 ‘주님만이 교회다!’라는 사실을 가르치는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교인이 곧 교회다!’라는 표현은 교인들에게 ‘우리가 곧 교회다!’라는 의식을 심어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우리가 곧 교회다!’라는 교인들의 생각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국민이 곧 국가다'라는 민주주의적 발상의 차원과 다르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몸인 교회와 지체인 교인의 관계는 민주사회에서 국가와 백성의 관계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머리요 주인은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주체는 백성이겠지만 교회의 주체는 결코 교인이 아닙니다. 교회의 주체는 자신의 백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신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따라서 민주주의 사회의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교회와 교인의 관계에 적용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아니 그렇게 적용할 수도 없고, 적용해서도 안 됩니다. 교회는 민주주의 사회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지만, 교회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일까요? 물론 오늘 말씀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렇다면 ‘교인이 곧 교회다!’라는 표현 보다는 오히려 ‘주님이 곧 교회다!’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요? 사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모든 것입니다. 머리이신 예수님을 빼면 교회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짐이 곧 국가다!” 이것은 프랑스 왕 루이 14세가 남긴 유명한 말입니다. 이 표현이 지금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민이 곧 국가다!”라는 말로 대체되었습니다. 교회에 적용하기 위해 두 선언 가운데 굳이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후자보다는 오히려 전자가 더 나은 선택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인이 곧 교회다!’라는 구호보다는 ‘주님이 곧 교회다!’라는 구호가 더 교회다운 구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는 교회는 상상할 수조차 없습니다. 마치 사람이 얼굴로 그 사람을 식별하듯이, 몸이 머리에 속한 것이지 머리가 몸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교회의 머리이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터이십니다. 교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위에 세워진 새로운 성전, 즉 성령의 전입니다. 새로운 성전은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선포하신 말씀에 이미 예고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심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헐어버리시고, 부활하심으로 온 세상 사람들을 모으시는 새로운 성전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새 성전은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리고 자신 속에 또 다른 새로운 성전을 세우셨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부릅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의 거룩성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의 거룩성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와 교인들의 삶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지, 교인들의 삶이 교회 거룩성의 표지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구약과 신약의 강력한 신학적 통일성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하나님 백성의 거룩함’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이러한 ‘거룩’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만이 거룩할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거나 떨어져 나왔다면 거룩으로부터 멀어지고 떨어져 나온 것입니다. 이런 자가 거룩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걸은 다시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죄인이므로 스스로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가야만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곳, 그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예루살렘 성전을 허시고 삼일 만에 새로운 성전을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지체들을 자신의 몸인 교회를 통해 불러 모으십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성전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지체도 성전입니다.

     개혁교회는 교회의 거룩성이 교회 구성원인 지체들의 거룩한 삶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거룩하심에 달려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이 교리 때문에 교회가 거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이 축소되거나 부인되지는 않습니다. 교회의 거룩성은 전적으로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의존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면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즉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거룩하심은 그분의 몸인 교회에, 그리고 그 몸의 지체인 교인에게 거룩하기를 요청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교회와 교인은 거룩한 것입니다.

     새 성전이신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이 계신 곳에 하나님의 거룩함이 나타납니다. 몸인 교회도, 몸의 지체인 교인도 하나님의 거룩함, 즉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 거룩함을 유지해야만 합니다. 몸인 교회든 지체인 교인이든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함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그 거룩함을 세상에 나타낼 수 있습니다.

     구원이 전적으로 피동적인 것처럼 거룩 역시 전적으로 피동적입니다. 즉 구원과 거룩은 오직 삼위 하나님의 역사에만 의존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구원을 이루어가기 위해, 그리고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의 거룩이 구성원인 교인들의 거룩에 달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 교인들의 삶이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이라고 해서 그 교회가 거룩하지 않은 교회로 전락하지는 않습니다. 심지어 어떤 교회가 심각하고 윤리적인 문제가 수도 없이 많을지라도 여전히 교회일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고린도교회입니다.

     머리에 붙어 있지 않는 몸을 몸이라 할 수 있을까요?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붙어 있지 않는 몸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주여, 주여” 한다고 모두 자동적으로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신자라고 말할 수 없듯이 교회라는 간판을 걸었다고 모두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붙어 있는 교회라 볼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지 않는 교회는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 뜨겁게 기도하고 예배하는 대형교회라 해도 결코 교회일 수 없습니다. 규모가 작고 화기애애한 교회라고 자동적으로 교회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분하는 진정한 기준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교회가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인 교회를 세우시기도 하고 폐하시기도 하십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 없이는 교회도 없다!”고 과감하게 외칠 수 있습니다. 나아가 “그리스도가 곧 교회다!”라는 선언까지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몸인 교회의 유일한 주체시라는 뜻에서 그렇습니다. 지체로서의 그리스도인 각자가 닮아가야 할 최종 목표도 그리스도뿐이요, 몸으로서의 교회가 닮아가야 할 최종 목표도 오직 그리스도뿐입니다. 또한 그 몸을 자라게 하시는 분도 역시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러한 사실은 에베소서 4장 15-16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요약하자면 교회는 단순히 사람들이 만들고 세울 수 있는 인간적인 종교 집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는 “신적인 기관”입니다. 교회를 세우고 폐기하는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오늘날 한국의 교회 개념은 이런 점에서 심각한 결함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목사가 있고 돈만 있으면 교회를 쉽게 개척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이것은 착각일 뿐만 아니라 지극히 비성경적인 사고의 결과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해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친히 세우시는 하나님 자신의 기관입니다.

     물론 좀 더 효과적인 교회개척, 즉 교회설립을 위해 사람도 돈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내가’ 교회를 세운다, 혹은 ‘우리가’ 교회를 세운다는 생각으로 세워진 교회라면 이것은 설립부터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꼴이 됩니다. 이런 생각으로 세워진 교회에 분쟁이 발생하면 문제 해결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 교회의 주체, 즉 교회 주인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교회의 분쟁은 누가 교회의 주인인지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로 비화되고, 결국 이 싸움에서 승자만 남고 패자는 쫓겨나는 것으로 결말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분열사입니다. 특히 한국장로교단의 분열 역사를 보면 대부분 교리적인 이유 보다는 정치적이거나 감정적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오늘날 지역교회의 볼썽사나운 다툼과 분열 역시 거의 대부분 이런 이유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문제없는 지상교회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상교회는 죄인들이 모인 죄인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세상의 다른 집단과는 달라야 합니다. 모든 세상 집단은 심각한 내적 갈등과 분쟁이 발생할 경우 집단 소속원들 각자가 그 집단의 주체이기 때문에 결국 목소리 크고 힘 있는 자가 살아남게 되고 그를 중심으로 그 집단의 새판 짜기가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 현상이 내분을 겪는 교회에서도 발견되는데, 이것은 교회에 진짜 주인이 없기 때문이요, 진짜 주인 행세를 하는 가짜 주인들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이 세상의 다른 사회적 집단과 구분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주인은 사람이지만, 교회의 주인은 목사나 어떤 힘 있는 신자가 아닌,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의 몸인 교회를 위해, 그 몸의 지체인 우리 각자를 위해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분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분쟁이 일어날 경우 참 교회는 먼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갈등과 분쟁이 일어날 때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볼 뿐만 아니라 모두 함께 주인이신 주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묻고 기도하면서 말씀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내가 세운 교회’, 혹은 ‘우리가 세운 교회’는 대부분 갈등과 분쟁이 발생할 때 성경이든 신앙이든 어떤 것이든 모두 자기 자신 내지는 자기 집단 중심으로 해석하고 주장하는 아전인수격의 모습으로 돌변합니다. 그래서 결국 힘 있는 자만이 살아남고 교회를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차지하고 큰 소리 치는, 이상하고 일그러진 모습의 교회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어쩌면 누군가 교회의 주인의식, 주체의식이 너무 지나치게 강해서 나타나는 결과가 아닐까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심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이 있을까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막상 교회에 갈등과 분쟁이 발생할 때, 비록 인간적인 감정이 동하는 것 자체를 막을 수는 없겠지만 자신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말씀 앞에 무릎을 꿇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눈물로 간구하는 진정한 신앙인을 발견하기가 어려울까요? 아니, 더 열심히 기도하고 더 열심히 예배드리는 “경건의 모양”은 있는데, 왜 주님을 진정한 교회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분 앞에 겸손히 무릎 꿇는 “경건의 능력”은 잘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요? 주님이 교회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이 단순히 구호나 지식에만 머물기 때문이 아닐까요?

     교회가 세상 모임과 구별되기 위해서는 먼저 평소 ‘주님이 교회다’ ‘주님만이 교회다’라는 구호를 끊임없이 마음으로 다짐할 뿐만 아니라, 또한 주님만이 교회의 주인이심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살아가야 합니다.

     교회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 그리스도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최고의 통치자이십니다. 만물의 최고 통치자이신 그리스도의 충만이 교회입니다. 그리스도로 꽉 찬 곳, 그리스도로 가득한 곳, 그리스도로 충만한 곳, 이곳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빈틈없이 가득 채우시는 곳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차고 넘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로 충만할 때, 그리스도의 향기로 가득할 때 비로소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결심과 노력으로는 실현 불가능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의 감동과 감화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지상교회는 비록 죄인들로 구성된 죄인공동체이지만 또한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을 내어주신 십자가를 통해 그 죄인들을 의인으로 삼으시고 부르시는 의인공동체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지상교회는 죄인공동체인 동시에 의인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의 충만이 죄인공동체를 의인공동체로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머리이신 그리스도로 가득 채우실 때 교회는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비,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죄인으로 가득한 교회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실 수 있는 그분의 몸이라는 사실 자체가 신비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죄인인 우리 모두는 이 신비한 몸의 지체들입니다. 그리스도는 죄인인 우리를 자신의 몸, 즉 교회로 불러 모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불러 모으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영광 받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해 세상에 흩어져 있는 자기 백성을 부르십니다. 지상교회는 여전히 죄인인 지체 때문에 불완전한 공동체이지만 동시에 완전하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덕분에 완전한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공동체는 불완전하지만 완전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이런 상태의 교회는 ‘신비’라는 말 외에 달리 표현하기가 불가능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입니다. 사람의 몸이 하나이듯이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인 교회 역시 하나뿐입니다. 결코 둘이거나 셋 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지상교회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데, 어떻게 그 많은 교회를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인 참 교회는 분명 하나뿐입니다. 마치 수많은 지체들이 모여 한 몸을 구성하듯이 수많은 지역교회들은 하나뿐인 참 교회의 구성원들입니다. 이웃 교회가 형제교회라는 것은 참으로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따라서 각각의 지역교회는 상호 연합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이 글은 "개혁정론"에 실린 설교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