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의 근원적 해결은 개혁신학의 회복에서 시작해야 한다 - 기독교보 시론 -
이환봉 교수(고신대)
교회를 위한 신학의 역할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전통 관련성을 추구하는 재생적 기능과 현실 관련성을 추구하는 생산적 기능, 그리고 미래 관련성을 추구하는 예견적 기능이다. 신학은 교회의 역사적 신앙과 교리를 재생산하여 오늘의 교회가 당면한 현실문제들에 대한 성경적 해답을 제시하고, 교회로 하여금 미래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야 한다. 따라서 신학이 그러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지 못할 때, 교회는 바른 신앙에서 떠날 뿐 아니라 현실에 능히 대응할 수도 없고 또한 건강한 미래를 약속할 수도 없게 된다.
과연 오늘 고신의 신학은 그 임무를 다하고 있는가? 오늘의 교회적 위기 앞에서 신학교수의 한 사람으로 뼈저린 반성과 회한의 탄식을 금할 길이 없다. 물론 오랜 세월을 학교에 몸담아 온 교수로서 학교의 현안문제에 대한 실로 답답한 마음과 한스런 주장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우리의 역사와 현실을 두루 살피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오늘의 위기는 우리의 신학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결과이다. 오늘 학교의 문제는 사실상 교회의 문제이고, 교회의 문제는 근원적으로 신학의 문제이며, 신학의 문제는 정행(正行)의 문제이다. 어떤 분은 왜 학교의 문제가 교회의 문제인가라고 반문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 교회가 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해왔으며 문제를 해결해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50여년의 역사적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교회가 대학을 운영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지금에 와서 논한다할지라도 교회의 책임은 피할 길이 없다. 이 문제에 대한 신학적 논의의 주장도 실상은 상호불신 속에서 기득권 유지를 위해 일방적으로 변죽만 올렸지 진지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는 분위기마저 만들 수 없었다. 그처럼 하나의 신학과 원리, 하나의 정신과 이념, 하나의 순종과 실천이 없는 교회와 학교에는 끝없는 갈등과 분열, 퇴보와 파산만이 있을 뿐이다. 그토록 호소해왔던 교단의 신학교수들이 하나가 되는 것은 그만 접어두고라도 교회와 학교의 위기를 바라보며 신학자들이 함께 모여 간절히 기도하며 고민할 수도 없다면 교회를 위한 신학교수들은 지금 모두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제라도 교회는 우리의 신학을 말해야 한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기득권 유지를 위해 신학을 앞세워 역사와 현실을 도외시하거나, 역사와 현실을 앞세워 신학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신학을 교권과 생존을 위한 정치적 도구로 삼거나, 바른 신학을 논한다면서도 실상은 흑백논리와 단선적 예단으로 무책임한 선동과 혼란을 야기해서도 안 된다. 더욱 비겁한 것은 선배들이 잘못했다는 역사적 비난과 정죄를 일삼으면서도 정작 오늘 우리의 역사적 책임을 위한 희생과 헌신은 외면하는 것이다. 문제의 근원을 찾아 진정한 해결의 문을 열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오늘 우리 자신에 대한 철저한 신학적 반성이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한국 개혁신학의 장자로서의 자랑스러운 전통을 이어 받았다. “고려신학교 설립취지서”(1946)에서 선언한 바대로 한국의 장로교회 중에서 가장 먼저 “개혁신학”의 기치를 선명히 내세우면서 칼빈의 신학과 사상에 기초한 개혁주의의 교회건설과 국가건설, 그리고 문화건설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오늘 우리는 얼마나 그 유산을 발전적으로 계승해 왔는가? 단적으로 말해 한국에서 개혁주의를 가장 먼저 표방한 교회와 학교 안에 “칼빈신학연구소” 하나 없다는 것이 우리 신학의 현주소이다. 따라서 우리 가운데 진정한 개혁신학의 모습은 점점 사라져 가고 폐쇄적 분리주의와 도피주의, 방법론적 축소주의와 편협주의, 배타적 독선주의와 교권주의가 만연해 가지 않는가? 그리고 항상 수세적인 부정적 신학사고와 패배적인 분리와 도피의 해결책만을 늘어놓지 않는가? 지난날도 교단과 학교 역사의 전환점에서 우리는 진지한 신학적 논의를 통해 방향을 정하기보다는 정치적 대립 속에서 일방적으로 또는 당파적인 발상을 따라 섣불리 결정해 온 결과가 지금 어찌되었는가? 왜 교단역사의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절대절명의 파선의 위기 속에서도 교회와 학교는 구성원들의 연합과 화합을 이루지도 이끌어 낼 수도 없는가? 우리의 신학과 신앙이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것은 아닌가?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심정으로 신학이 길을 열어야 한다. 총회를 앞두고 교단의 신학교수들이 먼저 모여 겸허히 시대적 사명 앞에서 회개와 화합의 새 길을 열어야 한다. 사실 지금 우리 모두가 바벨론 강변의 버드나무에 우리의 수금을 걸어놓고 시온을 생각하며 함께 탄식하며 마음 아파하고 있다. 오늘 우리의 위기 앞에 보수와 개혁, 대학과 신대원, 노조와 교협이 따로 있지 않다. 오직 하나의 고신인이 존재할 뿐이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진정 회개하고 하나가 된다면 우리의 미래는 새롭게 열려질 것이다. 우리 모두 진정한 개혁신학과 신앙의 회복을 통하여 다시 하나의 고신인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