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은혜로”(Sola Gratia)
이환봉 교수
종교개혁 전야의 많은 로마교 지도자들도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진리를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더불어 동시에 자유의지에 의한 인간의 협력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Pelagianists)은 아담의 죄와 그리스도의 의가 대표의 원리를 따라 우리에게 전가(轉嫁)된다는 진리를 믿지 않았다. 그리고 인간의 원죄를 인정하지 않았고 인간의 의로움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선물로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였다. 그들은 인간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하나님께 협력해야 하는 자신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중세 로마교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은혜 베푸시기를 거절하지 않으신다”는 격언으로 구원의 완성을 위한 인간의 선행을 힘써 격려하였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오직 은혜로”라는 성경적 구원의 핵심적 진리를 선언하였다. 칼빈은 “구원을 전적으로 값없는 은혜에 의한 하나님의 선택의 결과로 생각해야만 한다”(주석, 이사야 49:7)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로마교가 하나님의 은혜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혼합하려는 것은 사실상 은혜를 폐기하고 참된 구원을 훼손하는 것일 뿐이며, “마치 사람이 포도주에 진흙투성이 쓴 물을 타는 것과 똑 같다”(기독교강요 2.5.15)고 비판하였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인간 자신의 능력에 속한 것으로 볼 수 없으며, 그의 선행도 인간 자신 안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기독교강요 3.15.3).
루터도 인간의 타락과 무능을 그리스도의 대속을 이해하는 열쇠로 보았으며 당시에 로마교의 입장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옹호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에 대한 비방」(Diatribe on Free Will)에 대응하여 「의지의 속박」(The Bondage of the Will)을 저술하였다. 그는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고 무능할 뿐만 아니라 죄에 사로잡힌 노예의지 상태에서 자신의 구원을 위한 그 어떤 선행과 공로도 행할 수 없으며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절대 필요할 뿐 아니라 유일의 유효한 동인(動因)과 방법이라는 것이다.
17세기 화란의 개혁교회가 도르트 신경을 통해 확정한 소위 구원에 대한 칼빈주의 5대 교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의한 성경적 구원의 진리를 천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오직 은혜로”의 원리는 개혁자들의 신학을 모든 자력주의의 도식으로부터 구별시키는 철저한 신본주의 즉 하나님 중심의 신학과 하나님 은총의 신학 위에 서게 해주었다.
오늘날 우리도 개혁자들의 신앙을 따라 인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의한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종교개혁 당시의 개혁자들이 그토록 반대하던 펠라기우스주의와 아르미니안주의가 오늘날 자유주의 교회 안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복음주의 교회들 안에서도 배태되어지고 점차 용납되며 심지어 권장하기까지 한다.
펠라기우스는 아담의 죄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말하는 대표의 원리를 부정하였다. 그리고 아담은 언약의 대표가 아니라 우리의 악한 본보기가 되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선한 본보기가 되실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펠라기우스의 망령을 따라 오늘 한국교회의 많은 설교도 그리스도의 중보자적 인격과 사역보다는 주로 그리스도의 모범자적 삶을 따르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는 아니한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보다는 우리를 통한 그리스도의 사역이 더 많이 강조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보다는 인간의 행위와 노력이 더 많이 강조되고 있는 것을 본다. 그래서 교회의 강단에서 우리가 주님을 섬겨야 한다는 말은 많이 들었으나 주님께서 우리를 섬기신다는 말은 들어보기가 힘들다.
복음주의 대부흥사 찰스 피니(Charles Finney)는 원죄, 대속, 칭의, 성령에 의한 중생의 필요성을 부정하였다. 한 마디로 그는 펠라기우스주의자이었다. 오늘 일부 한국의 부흥사들도 동일한 길을 앞서 걸어가고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에 대한 강조보다 인간의 행위와 노력에 대한 강조로 교회 가운데 은혜의 교리를 좌초시켜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국교회 안에도 계몽주의의 중요한 원리이며 타락한 인간본성의 산물인 인간성에 대한 거짓된 신뢰가 되살아나고 있으며 점차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켜가고 있지는 아니한가?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 안에도 자기긍정의 복음에서 번영의 복음에 이르기까지 인간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를 단순한 인간의 사역으로 만들려는 거짓된 기획들이 난무하고 있지는 아니한가?
개혁자들이 전하여 준 복음대로 우리의 구원적 신앙과 생활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의 자력구원을 강조하던 로마교의 현대판 격언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신다”는 말을 미국 복음주의 교회의 교인들의 53% 이상이 성경에서 인용한 말이라고 했고 무려 85%가 성경적 생각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도 인간 스스로 자신의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그리고 자신의 구원을 위해 최소한 스스로 무언가 행할 수 있다는 바리세적 영적 교만을 교회 중에서 완전히 뿌리 뽑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키워가고 있지는 아니한가?
한국교회의 많은 강단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를 축복과 번영의 길로 이끄실 것이라는 얄팍한 약속만을 난발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와 연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오직 은혜로 구속의 사역을 완성하신다는 진리를 더욱 힘 있게 외쳐야할 것이다. 그러한 “오직 은혜”의 원리를 부인하는 자들은 인간 구원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아 무능한 인간의 손에 넘김으로써 우리의 구원을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게 하는 복음의 가장 큰 대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다시 한 번 더 “오직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출함을 받았음을 재확인한다.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 해방시키시고 영적 죽음에서 영적 생명으로 우리를 일으키심으로, 마침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끄신 것은 오직 성령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임을 믿는다. 우리의 구원은 그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사역이 아니며 인간의 방법과 기술과 전략 그 자체가 우리의 구원에 나타난 그 놀라운 변화를 가져올 수 없음을 단언한다. 우리의 구원적 신앙과 생활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