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n Luther's Theology of Beauty번역서 출판예정
*2024.5.7(화,2시)제15회 칼빈학술세미나(송용원)
제목:한국교회를 위한 칼빈의 공동선
*총서 종교개혁과 결혼과 가정 출판예정
고신대학교 개혁주의학술원
051-990-2267, 2268 kirs@kosin.ac.kr
갱신과 부흥 논문투고 https://kirs.jams.or.kr
투고기간: 12월1일~1월31일, 6월1일~7월31일
칼빈의 생애와 사역 그리고 그의 신학과 사상 전반에 관한 연구논문들을 수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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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971
번호 글쓴이 조회 수 추천 수 날짜
931 논문 칼빈의 교회론 - 김기상
[레벨:7]웹관리자
22324   2011-09-06
칼빈의 교회론 - 김기상  
930 논문 칼빈의 경건신학/이종성
[레벨:0]웹관리자
22172   2007-02-15
칼빈의 경건신학/이종성  
929 논문 성숙한 시대의 감각으로 재조명되어야 할 칼빈의 여성관(심창섭)
[레벨:7]웹관리자
22133   2008-08-31
성숙한 시대의 감각으로 재조명되어야 할 칼빈의 여성관(심창섭)  
928 뉴스 칼빈에게 종말론이 있는가?(칼빈의 종말론, 우리의 종말론)
[레벨:9]하늘소망
22129   2009-07-08
칼빈에게 종말론이 있는가?(칼빈의 종말론, 우리의 종말론) [기독교보 2009-06-09 23:21:32]조회 : 54 칼빈출생 500주년 신학포럼 지상중계 (5) 한국의 종말론에서 과거에는 전천년설적인 해석이 우세하였지만 근래에 이르러서는 무천년설이 강력하게 대두됨으로써 신학도들이 매우 혼란스러워 한다. 이때에 칼빈의 종말사상을 통하여 우리의 종말론이 어떠해야할지를 가름해 보기로 하자. 칼빈은 계시록 주석을 쓰지 않았으며, 기독교 강요에서 종말론을 다루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다른 종말적 구절들에서 어떻게 해석하였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그의 종말론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한정건 교수 / 구약학 1. 천년왕국에 대한 개요(계 20장) 요한계시록 20장에 나타나는 천년왕국 구절은 용이 잡혀 천년동안 무저갱에 감금당하며, 그 기간동안 죽은 성도가 살아서(이것을 첫째 부활이라고 함)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한다. 천년 후에는 그 용이 놓여 세상을 미혹하여 곡과 마곡의 전쟁을 일으킨다. 백보좌에 앉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할 때에 죽은 자들이 모두 살아나 함께 영원한 불 못에 던지운다(이를 둘째 사망이라 부름). 무천년기설은 이 천년기간은 상징적인 숫자이며,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전기간동안에 있는 상황으로 본다. 후천년설(천년왕국 후에 재림)은 교회시대 어느 시점에 땅위에 평화가 건설된다고 본다. 전천년설(천년왕국 전에 재림)은 재림 후에 이 세상에 천년왕국이 있을 것으로 본다. 그 왕국에 참여하는 사람은 첫째, 부활한 성도(왕으로 통치함)이며, 둘째 세상 나라(통치받는 사람 그리고 나중에 사탄의 미혹으로 배반하는 사람이 있어야 함)이다. 오늘날 후천년설을 지지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따라서 전천년설과 무천년설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이며, 칼빈은 어느 것을 지지하는지 살펴보자. 2. 천년왕국에 연관된 구약의 구절들 ⑴ 사 2:1-5: 메시아의 통치권이 전 세계에 미치며, 열방이 시온에 순례오고, 나라 사이는 전쟁이 없는 평화가 이루어지며, 풍족한 소산을 누린다(미가 4:5을 근거로 하여). 무천년설은 예수님 초림적인 사건, 전천년설은 재림 이후의 천년왕국 모습으로 본다. 칼빈은 이것은 우리시대(교회)로 볼 수 없으며, 예수님의 재림 때에 완전한 통치와 평화가 있을 것으로 주장한다. ⑵ 사 11:6-9: 짐승과 짐승 사이, 그리고 짐승과 사람 사이의 평화가 깃들고, 거기는 해됨과 상함이 없고,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할 것이다. 무천년설은 대체로 교회시대에 영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며, 전천년설은 재림 후 만물의 회복(천년왕국적 모습)으로 본다. 칼빈은 재림이후의 자연의 완전한 회복으로 본다. ⑶ 사 60장: ‘너’라고 불리는 시온 성에 각 나라 왕들이 자기의 특산품들을 가지고 와서 섬긴다. 그 도성은 해와 달이 필요 없으니 하나님이 친히 빛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슬픔과 고통도 없다(60:19-20; 계 21:23과 같은 묘사임). 무천년설은 현재 교회의 모습으로, 전천년설 재림 이후의 새예루살렘, 특히 천년왕국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다. 칼빈은 현 교회로는 볼 수 없으며, 미래의 회복된 교회의 모습이라고 주장한다. 문제의 핵심은 과연 미래의 회복된 새예루살렘에 세속적인 왕들이 존재할 수 있느냐이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21장의 그 새예루살렘에도 왕들이 보물들을 가지고 성으로 몰려오는 모습이 꼭 같이 그려져 있다(계 21:24-26). ⑷ 사 65:16-25: 세상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하고, 모든 환란이 없으며, 온 세상엔 하나님 종교밖에 없다. 전쟁이 없는 평화와 풍족한 소산이 있으며, 짐승의 세계까지 평화가 깃든다. 그런데 그곳에 사람이 오래 산다(100살에 죽은 자가 어린아이로 간주됨). 무천년설은 교회의 모습으로 보며, 전천년설은 재림 이후의 천년왕국으로 본다(계 20장의 천년왕국 동안에 죽음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음, 계 21:5). 칼빈은 현 교회의 모습일 수 없으며, 미래의 재림 때에 이루어질 회복될 세상이라고 주장한다. 이상의 모든 구절에서 칼빈은 무천년설 쪽을 한 곳에서도 지지하지 않는다. 모두 재림 이후의 모습으로 보며, 따라서 전천년설의 주장과 거의 일치한다. 3. 다니엘서의 전쟁과 성도의 환란에 관한 구절들 무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니엘서와 그 외에 유사한 종말적 전쟁의 구절들을 세상 마지막 때에 있을 대전쟁과 적그리스도에 의한 성도들의 환란으로 보지 않고 교회시대 전반에 있을 전쟁, 혹은 교회가 영적으로 사탄과 싸우는 투쟁으로 본다. 그러나 칼빈은 다니엘서 구절들을 지나칠 정도로 문자적-역사적으로 해석한다. 다니엘 2장의 신상이 파괴되는 것을 로마 나라의 멸망과 세상 마지막 때에 있을 세상의 심판으로 본다(무천년설은 예수님의 초림적 사건으로 해석함). 다니엘 7장에서 넷째 짐승은 로마제국이며, 열 뿔은 로마 제국의 원로회, 그리고 작은 뿔은 시저와 그 뒤를 잇는 황제들로 본다(기독교강요에서는 다니엘 7장 25절의 적그리스도를 로마 교황으로 단정함). 다니엘 11장 41절-12장 13절의 구절도 ‘그 왕’을 로마 원로원(집단 지도체제)으로 해석하고, 로마에 의해 성도들에게 환란이 있을 것으로 해석한다(단지 같은 묘사가 있는 다니엘 9장 27절은 예수님 초림으로 봄. 이와 관련이 있는 마 24장 15절 이하의 구절도 로마 재림 직전에 있을 적그리스도에 의한 성도들의 대환란으로 본다. 이상의 그의 성경해석원리를 볼 때에 칼빈이 계시록을 주석했으면 분명히 당시 혹은 세상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의 역할과 성도들의 환란으로 해석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그의 해석은 무천년설과 거리가 멀다. 무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계시록 전체에 있는 전쟁과 성도들의 환란을 교회 전기간 동안 있는 일반적인 전쟁 혹은 교회와 사탄의 영적인 투쟁으로 본다(어떤 사람은 주전 70년 사건으로 한정짓기도 함). 이것은 천년왕국과 더불어 계시록과 그와 연관이 있는 다른 모든 성경 구절을 영적으로 해석하는 원리를 취한 것이다. 반면 전천년설은 철저하게 역사적으로 해석하여, 실제 그런 전쟁과 환란이 마지막 때에 있을 것으로 본다. 칼빈은 성경을 철저하게 문자적-역사적(literal- historical interpretation)으로 해석하였다. 그는 선지서들의 예언을 영해하는 것을 극히 경계했다. 그러한 그의 해석원리는 무천년설과 거기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종말론도 이런 해석원리위에 세워져야 한다.  
927 논문 칼빈의 교회 이해 - 김기련
[레벨:7]웹관리자
22078   2011-08-25
칼빈의 교회 이해 - 김기련  
926 논문 존 칼빈의 신학적 해석학(안명준)
[레벨:9]하늘소망
22069   2009-06-25
존 칼빈의 신학적 해석학 - 안명준  
925 논문 칼빈과 공관복음 문제(신현우)
[레벨:7]웹관리자
21992   2008-08-31
칼빈과 공관복음 문제(신현우)  
924 논문 칼빈의 경제윤리 - 전강수
[레벨:7]웹관리자
21962   2011-08-16
칼빈의 경제윤리 - 전강수  
923 뉴스 구원얻는 믿음의 본질에 대한 칼빈의 견해
[레벨:9]하늘소망
21870   2009-07-08
구원얻는 믿음의 본질에 대한 칼빈의 견해 [기독교보 2009-05-29 09:14:20]조회 : 100 칼빈은 신자들이 자신의 구원 여부를 신중하게 체크할 것을 권한다. “자신을 조심스럽고 겸손하게 검토”함으로써 육신적 자만에 빠지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칼빈은 구원의 확신을 너무 쉽게 말하는 현대의 복음주의권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태도를 가졌다. 칼빈은 택자와 “일시적 믿음”을 가진 자들 사이에 커다란 유사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유기된 자들도 하나님이 자신들을 향해 자비하심을 믿는다고 말한다. 경험적으로 볼 때 유기된 자들도 때로 선택된 자들과 거의 꼭 같은 느낌에 의해 감동을 받는다. 하늘 선물과 그리스도를 한동안 맛본다(히6:4-6; 눅8:13). 그러나 영적 은혜의 힘과 믿음의 확실한 빛을 굳게 잡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이 그들로 죄를 더 확실히 깨닫고 변명할 수 없게 하기 위해 양자의 영이 없이도 그의 선하심을 맛볼 수 있는 정도로 그들 마음에 잠입하시기 때문이다 (3, 2, 11). 양낙흥 교수 / 역사신학 칼빈은 믿음을 이렇게 정의한다.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진 약속의 진리에 근거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의에 대한 확고하고 확실한 지식cognitio으로, 성령에 의해 우리 정신에 계시되고 우리 마음에 인쳐진 것”이다(3, 2, 7). <기독교 강요>에서 구원얻는 신앙에 대한 칼빈의 논의는 주로 스콜라주의자들의 견해에 대한 반박으로 이루어진다. 거기서 칼빈은 서너 가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앙론을 비판한다. 첫째, “맹신”에 대한 가르침, 둘째, 신앙을 “동의”assent 정도로 취급하여 “지식에서 나오는 단순한 동의”a bare and simple assent arising out of knowledge를 믿음과 동일시하고 “마음의 확신 confidence and assurance of heart”를 믿음의 본질에 포함시키지 않는 입장(III, ii, 33), 셋째, 구원의 확신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단지 “도덕적 추측”moral conjecture에 의해 구원의 여부를 판단하는 입장이 그것이다. “맹신”은 구원의 진리에 대한 탐구 작업을 교회에 일임해 버리고 교회가 가르쳐 주는 것은 모두 진리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태도이다. 칼빈은 교회에 대한 그러한 맹종의 태도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칼빈이 보기에 스콜라주의 신학이 단지 “도덕적 추측”에 의해 구원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우리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단지 도덕적 추측에 의해 분별할 수 있다는 스콜라주의적 교리는 아주 위험하다. 모든 이가 자신은 그것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 부적합하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3, 2, 38). 사람마다 자신은 중생의 증거로 내세울만한 도덕성이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었다. 도덕적 추측에 의해 구원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잘못된 또 하나의 이유는, 칼빈에 의하면, “추측이나, 의심과 비슷한 어떤 것”보다 믿음과 상극에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었다. 만일 “도덕적 추측”이 우리의 확신의 근거가 된다면 지금은 자신의 모습을 볼 때 자기가 은혜 안에 있는 것처럼 생각되나 내일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게 된다(3, 2, 40). 칼빈은 믿음의 본질적 특성 중에 “확신”(assurance, securitas)을 강조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의에 대한 확고한 지식, 즉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의 “마음에 인쳐 주심”으로써이다. 그러므로 믿음에는 단지 머리만이 아니라 “마음”의 기능이 포함된다. 믿음이 지식이라 할 때 그 지식은 머리로 하는 이해comprehension보다는 마음의 확신 assurance에 더 가깝다(3, 2, 14). 칼빈에게 있어 진리에 대한 “동의”는 “머리보다는 마음, 이해보다는 성향(disposition)”에 관한 것이다(3, 2, 8). 믿음은 지식이지만 단순한 지성적 이성적 기능으로 얻을 수 있는 일반적 세상 지식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지식이다. 그것은 인간 오감으로 파악하는 이해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감각적 지각sense perception에 해당하는 그러한 종류의 이해”는 아니다(3, 2, 14). 그것은 성령의 조명과 인치심의 결과로 얻을 수 있는 영적 지식이다. 칼빈은 스콜라주의자들이 “하나님 말씀에 대해 나타내는 존경”이 바로 경건 자체라고 오해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그러한 “동의”는 “마음 속으로 파고 들어 거기에 머무르지”않았다. 이러한 믿음의 소유자들은 이 점에서 마귀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3, 2, 10). 스콜라학자들이 믿음을 단지 지성적 동의로 보고 “마음의 확신”을 간과했던 이유는 부분적으로 “마음의 확고하고 꾸준한 지속성”에 대한 존중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칼빈에 의하면, 그것이야말로 “믿음의 으뜸가는 부분”이다(III, ii, 33). 칼빈은 마음으로 믿는 것이 머리로 믿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고 본다. “정신이 생각을 부여받는 것보다 마음이 확신으로 채워지는 것이 더 어렵다”(III, ii, 36) 칼빈은 구원의 확신이 없는 자는 신자가 아니라고 분명히 못박는다. “구원의 확신에 의지해서 악마와 사망에 대해 자신있게 승리하는 그 사람 외에는 아무도 신자가 아니다”(3, 2, 16). 이 점에 대해 칼빈은 단호하다. “천국의 상속을 자신있게 자랑하는 이 외에는 아무도 주 안에서 바른 소망을 가지고 있다 할 수 없다.”(III, ii, 16). 칼빈에 의하면, 확신은 참 믿음의 본질적 요소였다. 신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확실히 안다”(요일3:2). 참된 믿음은 의심이나 추측의 여지를 용납하지 않는다. “. . . 추측 혹은 의심과 비슷한 어떤 다른 것보다 믿음에 더 반대되는 것은 없다”(3, 2, 38). 그러나 칼빈에게 있어 구원의 확신을 얻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3, 2, 15). 그는 인간의 마음은 본래 불신으로 향하는 고질적 경향이 있기 때문에 “힘든 투쟁hard struggle”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이 신실하시다”는 확신이 생긴다고 주장했다(3, 2, 15). 그는 믿음에는 감정적 요소가 있다고 주장한다. “믿음에서 비롯된다고 성경에 나와 있는 충만한 확신의 느낌feeling of full assurance이라는 것이 있다(3, 2, 15).” 그러나 친히 “하나님의 선하심”의 “달콤함을 느끼고 체험”truly feeling its sweetness and experiencing it in ourselves 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가질 수 없다(3, 2, 15). 확신은 감정적 체험을 요하는 것이었다. 칼빈은 느낌, 혹은 감정을 신앙의 본질적 요소로 본다(III, ii, 39, 16). 칼빈의 신앙론에 비추어 볼 때 현대 복음전도에는 몇 가지가 결여되어 있다. 즉 현대 복음전도론은 믿음의 본질적 요소로 지적 의지적 동의만을 강조한다. 이것은 칼빈이 비판한 당시 스콜라주의의 신앙론에 더 가깝다. 즉 현대 복음전도론에는 “마음”의 요소, 혹은 “신뢰”fiducia의 요소가 결여되어 있다. 칼빈은 믿음의 필수적 요소로서 감정적이고 체험적인 요소를 포함하는 “확신”을 제시했다. 그러나 현대 복음전도론에는 그것이 빠져 있다. 근원적으로 현대 복음전도론에는 인간의 마음에 “인치심”과 “조명”을 주시는 성령의 역할에 대한 강조가 결정적으로 누락되어 있다. “구원얻는 믿음”의 소유를 단지 자연인의 의지적 결단에 달려 있는 것으로 가르침으로써 칼빈이 비판한 바 “스콜라주의적” 믿음으로 회귀하고 있는 것이다.  
922 논문 칼빈의 교육론 입장에서 교회교육의 발전방향 연구 - 홍성술
[레벨:7]웹관리자
21866   2011-08-25
칼빈의 교육론 입장에서 교회교육의 발전방향 연구 - 홍성술  
921 논문 제네바 컨시스토리(치리회) / 이정숙
관리자
21857   2007-01-23
제네바 컨시스토리(치리회) / 이정숙  
920 논문 기독교 강요의 변증법적 성격 / 배경식
관리자
21832   2007-01-23
기독교 강요의 변증법적 성격 / 배경식  
919 논문 칼빈의 교회관 ( Doctrine of the Church in Calvin ) - 신복윤
[레벨:7]웹관리자
21742   2011-09-06
칼빈의 교회관 ( Doctrine of the Church in Calvin ) - 신복윤  
918 논문 존 칼빈의 생애와 교육연구(이기철)
[레벨:7]웹관리자
21692   2008-08-31
존 칼빈의 생애와 교육연구(이기철)  
917 뉴스 조셉 파이파 교수가 본 ‘칼빈의 신학과 목회’②
[레벨:9]하늘소망
21691   2009-07-08
조셉 파이파 교수가 본 ‘칼빈의 신학과 목회’② [기독교보 2009-03-04 10:33:05]조회 : 221 칼빈의 예배관, ‘하나님이 명하신 방식대로 예배’ 예배의 요소들 사도행전 2장 42절에서 기본 뼈대 찾아 공 예배에서 무릎 꿇는 자세 옹호 한국개혁주의설교연구원은 지난 2월 16일부터 18일까지 서울 삼양교회당에서 ‘칼빈의 신학과 목회’란 주제로 제32기 정기세미나를 개최했다. 이 세미나에서 주제 강의를 한 조셉 파이파 교수(미국 그린빌 신학교 학장)의 강의 내용을 요약, 정리했다. -편집자 주- 사사시대 교회의 상황을 영적 아나키(무질서) 상태로 묘사하고 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문화, 교회 속에서도 그러하다. 특히 이러한 상태는 예배 영역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장로교회나 개혁교회의 예배 형태는 기본적으로 일치했다. 그것은 국가를 초월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예배의 모습이 매우 달라지고 있다. 파이파 교수는 “예배에서 종래의 일치는 성경적 예배관에 대한 공통된 헌신으로 비롯됐다. 이런 성경적 기초를 잘 정리해낸 사람이 존 칼빈”이라고 주장하면서 “칼빈은 성경을 바탕으로 해서 ‘예배에 관한 규범적 원리’를 발전시켰다.”고 설명한다. 종교개혁 당시 예배 행위와 관련, 두 가지 원리들이 개진됐다. 루터는 성경이 금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가 예배에서 행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존 칼빈은 성경을, 특히 제2계명을 연구하고 내린 결론은 루터측이 보다 충분히 개혁의 방향으로 나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칼빈은 우리는 성경에서 방증(warrant)을 찾을 수 있는 것으로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입장을 보통 ‘예배의 규범적 원리’라 부른다.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안 세 군데에 그 표현이 나타나 있다. ‘성경에 제시되지 않은 다른 어떤 방식을 따라 예배되어서는 안 된다’(ⅩⅪ.1.) 등이 그것. 현대의 일부 사람들의 주장과 달리 칼빈과 개혁교회는 제2계명에 대한 이와 같은 해석에 전적으로 일치된 견해를 나타냈다. 그럼 칼빈의 ‘규범적 원리’가 어떻게 발전되고 있는지, 그의 예배의 원리들은 무엇이며, 그 실제적 형태들은 어떠했는지 살펴보자. ■ 예배의 규범적 원리…믿음의 확신 가운데 예배 “예배의 중요성을 감안할 때, 우리가 하나님께 나가기 위해서는 그가 명하신 방식대로 해야만 한다.” 칼빈이 강조하는 내용이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순전한 종교는 미리 규정된 예배를 필요로 한다고 논한다. 칼빈은 이와 같은 원리를 제2계명의 해설로부터 도출해내고 있다. 그는 제2계명의 목적과 관련, “하나님은 우리의 어리석은 마음들이 무지하게 고안해내기 쉬운 하찮고도 육욕적인 예식들로부터 우리를 온전히 불러내시고 퇴각시킨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로 하여금 그의 적법한 예배, 곧 그 자신이 세우신 영적 예배에 우리가 맞추어가도록 하신다.”고 밝히고 있다. 칼빈은 신명기 12장 32절과 관련해서도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가운데 인정하신 것 외에는 다른 어떤 적법한 예배가 없다는 사실과 순종이야말로 모든 경건의 어머니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칼빈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CF)이 예배의 ‘정황’이라고 부르고 있는 부분과 관련해서는 각 교회들이 일정한 지침을 따라 어떻게 예배를 드릴 것인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한 면에서 예배의 ‘요소들’과 또 다른 면에서 예배의 ‘정황 및 형식’ 사이의 구분은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의 서문 속에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다. 데이빗 고던은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린다. “예배의 ‘요소들’이란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예배에 꼭 있어야 할 본질적인 것들을 가리킨다. 예배의 요소들이야말로 예배를 아름답게 만들어준다. 예배의 ‘정황들’이란 예배의 요소들을 어떻게, 언제, 어디에서, 또 어느 정도로 행할 것인가를 고려하는 것이다.” 형식이란 예배의 각 요소의 정확한 내용을 가리킨다. 노래나 시편 찬송 고르기, 예배 순서 정하기, 공동기도문 및 자유기도 사용 여부 등이다. 칼빈은 예배에 일어난 변화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한 일과 관련,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비롯되는 믿음의 확신 가운데서만 바르게 예배를 드릴 수 있으며, 또한 이에 따라 그 말씀을 버리는 자는 누구나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칼빈은 ‘교회 개혁의 필요성’이란 글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바르게 예배할 지 아는 지식 △어떻게 구원을 얻을 것인지 그 원천을 아는 지식을 기독교의 본질로 제시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예배를 훼손시킬 때 우리의 구원의 길도 잃게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와 함께 우리가 인간의 상상에 따라 하나님께 나아가면 결국 우리는 구원의 이르는 바른 길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이해했다. 칼빈은 출애굽기 20장 8절에 하나님의 질투와 관련하여 “특별히 하나님께서 이것을 느끼시는 때는 가장 순전하게 지켜져야 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든지, 아니면 어떤 미신적인 것으로 오염시킬 때이다.”고 설명한다. 하나님은 그의 질투 때문에 잘못된 예배를 미워하신다. ■ 예배의 원리들…하나님 말씀 중심 등 4가지 제시 갓프리 박사는 그의 저서 ‘칼빈과 하나님께 대한 예배’에서 칼빈의 예배관으로부터 네 가지 원리들을 도출해내고 있다. 첫 번째 원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중심성이다. 말씀이 우리의 예배를 규정해야할 뿐만 아니라, 말씀이 또한 우리의 예배의 중심이 돼야 한다는 것. 칼빈은 때로 그의 예배에 대한 이해가 지나치게 성경주의자이며, 그의 예배가 너무 교육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두 번째는 영성이다. 예배의 영성 원리는 제2계명 속에 확립돼 있다. 요한복음 4장 24절에서처럼 하나님은 영으로서 예배 받으셔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형상을 만든다든지, 아니면 형상을 통해 그를 예배한다든지 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칼빈은 요한복음 4장 23절 주석에서 구약 예배와 달리 신약 예배가 어떤 의미에서 영적인지 설명하면서 “하나님은 모든 시대에 우리의 믿음과 기도, 감사, 마음의 순결, 그리고 생활의 깨끗함으로 예배받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다른 어떤 제사들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말하고 있다. 갓프리에 따르면 칼빈의 영성 원리의 또 다른 한 측면은 영적 승강이다. 칼빈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 가운데서 하늘로 오르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하늘에서, 참 성소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것. 세 번째 예배의 원리는 영성과 가까운 관계에 있는 것으로 단순성의 원리다. 구약 예배는 대단히 복잡하고 장식적인 행위들과 상징들로 특징된다. 이는 모두가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또한 우리와 그와의 관계를 가리킨다. 반면 신약 예배는 단순성이 그 특징이다. 우리의 예배는 그리스도와 그가 성취한 사역이 가득하기 때문에 두 가지 물리적 상징들(세례와 성찬) 외에는 모든 것이 단순하다. 예배의 단순성은 예배의 이동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동성’이란 우리의 예배를 어디에나 들고 갈 수 있고, 또 어느 곳에서나 드릴 수 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예배에서 원하는 모든 것은 들고 다닐 수 있다. 그렇다고 교회 건물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네 번째 원리는 공경의 원리다.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 차원의 희미한 공경을 갖고 있지만, 진실로 그를 공경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존 머리는 “우리의 예배는 많은 부분에 있어서 불공경의 혐의 아래에 놓여 있고, 따라서 정죄 아래에 놓여 있다.”고 지적한다. 예배에서 공경이 많이 상실됐다는 것. 칼빈과 그의 예배 원리를 따라는 사람들은 오늘날 이 공경을 강조한 나머지 예배에서 즐거움의 요소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비판을 종종 받고 있다. 그러나 칼빈은 예배에서 감정의 표현에 대해 결코 반대하지 않으며, 성경이 조화를 강조하고 있음을 믿었다. ■ 예배의 실제…예배의 제식 단순해야 칼빈은 예배의 요소들을 사도행전 2장 42절에서 기본 뼈대를 찾고 있다. 이에 교회의 모임이 말씀과 기도, 떡을 뗌과 구제 헌금 없이 이뤄질 수 없음을 보여주는 불변의 규칙이 됐다. 칼빈은 예배의 제식들이 되도록 적고 단순해야 한다고 믿었다. 당시 예배 순서는 예배에의 부름, 기도, 죄의 고백, 감사, 간구, 성경봉독과 설교, 신조와 주기도의 사용, 계명의 낭독, 성례의 사용(매주 성찬 시행), 시편 찬송, 헌금, 축도로 돼 있다. 찬송과 관련해서 칼빈은 공예배에서 찬양대와 악기의 사용을 없앴다. 칼빈은 노래 자체는 예배의 본질적 요소로 보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도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예배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성경은 기도와 예배 시의 자세와 관련하여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성경을 읽을 때, 일어서는 자세나 기도할 때, 서거나 무릎을 꿇는 자세, 함께 아멘을 하는 것 등이다. 칼빈은 공예배에서 무릎 꿇는 자세가 적합한 것으로 옹호하고 있다. 칼빈은 설교자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며, 또한 하나님께 그 백성을 대신하여 말한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칼빈은 목사가 예배를 자신의 직무 수행의 일환으로 그 예배를 인도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런 원리에 대해 예배 참여에서 회중의 역할을 제한한다는 반대가 나오기도 했다. 이에 대해 갓프리는 칼빈의 반응이 두 가지로 나올 것으로 내다봤다. 이 같은 비판은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목사의 중요성을 감하는 것이 되며, 칼빈은 회중이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답할 것으로 보았다. 이국희 기자 cookie0228@hanmail.net  
916 논문 칼빈의 교육 사상에 대한 연구 - 권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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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81   2011-08-16
칼빈의 교육 사상에 대한 연구 - 권태경  
915 논문 칼빈의 교회론/문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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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74   2007-02-15
칼빈의 교회론/문병호  
914 논문 종교다원주의 시대에 직면한 개혁주의 신앙의 과제(문석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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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24   2008-08-31
종교다원주의 시대에 직면한 개혁주의 신앙의 과제(문석호)  
913 논문 칼빈-산업시대의 예언자(김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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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87   2008-08-31
칼빈-산업시대의 예언자(김형민)  
912 논문 개혁자들의 성경 해석 원리 / 최병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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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84   2007-01-23
개혁자들의 성경 해석 원리 / 최병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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