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성화론: “이미 그러나 아직도”

[기독교보 2009-05-13 16:21:36]조회 : 97

 

고려신학대학원이 칼빈 출생 500주년을 기념하여 전국 각 지역을 순회하며, 신학포럼을 개최하고 있다. 이번 신학포럼은 신대원 교수들이 전공분야를 살려 다양한 주제로 칼빈 신학과 사상을 조명하고 있어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본보는 고신교회 개혁신학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하면서 개최하는 이번 포럼의 내용을 요약하여 지상중계 한다.[편집자 주]

 

 

대구경북 지역 신학포럼 내용

(2009년 5월 4일 동일교회당)

 

 

칼빈의 성화론: “이미 그러나 아직도”

 

 

 박영돈 교수(교의학)

 

간혹 종교개혁은 칭의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성화를 상대적으로 간과했다는 말을 듣는다.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는 종교개혁은 칭의론은 재발견했으나 성화론은 제대로 발전시키지 못한 반쪽짜리 개혁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칼빈의 신학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다. 칼빈은 “성화의 신학자”라고 불릴 정도로 성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 주제를 심도 있게 다루었다. 칼빈에게 있어서, 비록 칭의가 종교개혁의 주요점이며 핵심교리이지만 그 자체가 신앙생활의 목표가 아니라 바탕이며 출발점이다. 칼빈의 실제적 관심은 하나님 앞에 성결한 삶이었다. 성결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와 열망이 그의 가르침과 삶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칼빈 성화론의 주요 특성은 로마 가톨릭과의 논쟁의 상황에서 형성되었다. 칼빈은 칭의와 성화를 분명히 구분함으로써 칭의를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성화에 의존케 함으로 구원의 확신을 심각하게 훼손한 로마 가톨릭의 오류에 적절하게 대응하였다. 동시에 이 둘은 긴밀하게 연합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개혁교회의 칭의론이 성화의 중요성을 약화시켜 윤리적 방종과 나태를 조장한다는 로마 가톨릭의 비난을 효과적으로 불식시켰다. 그와 함께 칭의론이 무율법주의적 혼란을 초래하는 교리로 남용되는 위험을 원천에서 봉쇄하였다. 이 같이 율법주의에 대응해서는 칭의와 성화의 구별성을, 무율법주의에 대해서는 그 연결성을 강조함으로써 양극단 오류를 효과적으로 극복하는 전략적인 논증이 칼빈의 구원론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칼빈은 성화를 철저히 기독론적 관점에서 고찰하였다. 칼빈에 의하면, 성화의 전 과정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기초하였다. 성화의 패턴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본받아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부활하는 것이다. 그 성화의 원동력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흘러나온다. 성화의 궁극적인 목표도 역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것이다. 결국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성화의 근원이며 패턴이고, 우리 안에서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성화의 원동력이며, 영광중에 계신 그리스도가 성화의 목표이다. 곧 성화의 처음과 나중, 알파와 오메가는 예수 그리스도시다.

 

칼빈에 의하면, 성화는 두 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성화는 날마다 옛사람이 죽고(mortificatio) 새사람으로 소생(vivificatio)하는 과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진행된다. 성화의 두 측면은 단계적으로 이어지기 보다는 동시적으로 발생하며 동전의 양면과 같이 진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죽음(motificatio)의 두 측면이다. 칼빈은 자기부인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으로 강조하였다. 자기부인 없이 새사람의 소생, 즉 성화의 진전을 전혀 기대할 수 없다. 자기부인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그러나 자기부인이 없는 곳에는 온갖 죄가 지배한다. 자기 부인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칼빈 신학의 대명제와 하나로 맞물려 있다. 헛된 영광에 목말라하는 자아의 철저한 죽음 없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슬로건을 외치는 것은 단순히 공허한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부인 없이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거룩한 구호까지도 자아의 부패한 욕망을 교묘히 위장하는 명분으로 이용된다. 그러므로 자아의 전적 죽음, 파괴만이 해결책이다.

 

이 땅위에서의 신자의 삶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에 더 가깝다. 성화의 전 과정은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과 똑같은 패턴을 따르는 일종의 끊임없는 죽음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땅 위에서의 삶은 계속되는 죄와의 싸움과 시험과 고난이 있는 십자가의 삶이다. 아무리 성화가 진전될지라도 신자는 이 십자가를 넘어 성숙하지는 못한다. 이 사실을 망각할 때 온갖 교만과 완전주의적 망상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신자의 삶에는 ‘아직도’ 죄와 고난에서 완전히 자유하지 못한데서 오는 신음과 탄식과 절규가 존재한다. 이러한 탄식은 신자 안에 종말론적 구원에 대한 부르짖음과 소망을 심화시킨다.

 

이같이 성화의 ‘아직도’를 더 부각시킨 칼빈의 성화론은 현대교회가 ‘이미’쪽으로 편중되어 과도한 승리주의로 치우친데 대한 적절한 견제와 교정역할을 해준다. 지금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는 칼빈의 음성에 다시 귀를 기울일 때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자기애의 시대에 가장 인기 없고 사람들이 질색하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라는 가르침이다. 우리 개혁교회에서도 가장 결여된 것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칼빈의 신학을 이론적으로 따른다고 할지라도 우리 삶 속에 자기 부인이 없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칼빈을 따른다고 할 수 없다. 자기 부인이 없을 때 칼빈의 신학까지 은밀히 자기 영광을 위한 도구로 이용될 뿐이다. 자기 부인이 없는 곳에 자기 숭배라는 무서운 우상숭배의 죄가 창궐하게 된다. 자기 명예와 영광에 목말라하는 옛 자아의 죽음 없이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거룩한 구호까지도 자아의 부패한 욕망을 위해 이용된다. 그러므로 성화의 유일한 길과 비결은 죽음이다. 칼빈의 성화론은 이 점을 강조하는데 한 치의 양보도 타협도 없다. 오직 죽은 자 만이 산다. 자기를 온전히 비운 자만이 성령으로 충만해진다. 그런 자만이 교회를 살리고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