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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inding of God 서평

 

 

김윤태 교수(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언약신학은 개혁주의신학과 사전적인 동의어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언약신학과 개혁주의신학은 상호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개혁주의신학은 언약신학의 틀 안에서 체계화 되어 있으며, 언약신학은 개혁주의신학을 특징짓게 하는 것이다. 개혁주의신학이 다른 신학전통들이나 사상들과 구별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언약신학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개혁주의신학을 말할 때 우리는 칼빈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비록 개혁주의 신학전통이 칼빈 외에도 쯔빙글리, 불링거, 부써, 무스쿨루스 등 많은 개혁파 교부들의 신학사상을 따르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런 개혁파 교부들 가운데서도 칼빈의 신학사상은 개혁주의 신학전통이 형성되고 발전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과 의미를 갖는다. 이런 점에서 개혁주의신학이 칼빈주의 신학으로 불리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다. 이처럼 칼빈의 위치가 독보적이고 그의 신학사상이 개혁주의의 중심에 놓여있는 만큼 개혁주의 신학역사 속에서 칼빈의 신학사상은 항상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개혁주의 전통 내에서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질문 중의 하나는 칼빈과 소위 후대 ‘칼빈주의자들’과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1960년대 중반 바질 홀(Basil Hall)의 논쟁적인 논문("Calvin against the Calvinists," 1966)에 의해 제기되었다가 R. T. 켄달(R. T. Kendall)의 책(Calvin and English Calvinism to 1649, 1979)에 의해 더욱 더 열띤 논의의 불길이 당겨졌고 이후 M. 찰스 벨(M. Charles Bell, "Was Calvin a Calvinist?," 1983)과 리차드 A. 뮬러(Richard A. Muller, "Calvin and the 'Calvinists', 1995)등에 의해 가열되어왔다.

 

   칼빈과 칼빈주의자들과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자연스럽게 ‘칼빈의 신학원리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으로 연결된다. 칼빈의 신학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에 서있는 사람들은 칼빈의 신학을 모순덩어리라고 비난하기 좋아한다. 대표적인 예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동시에 강조하는 칼빈의 신학은 그 자체로 모순덩어리의 신학이라는 것이다. 사실 안토니 A. 후크마(Anthony A. Hoekema)가 바르게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칼빈의 신학은 어떤 면에서는 ‘반대되는 것의 복합체’(complexio oppositorum)라 부를 만큼 일견 모순되고 또 복잡하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칼빈 자신은 이러한 자신의 신학을 성경이 말하고 가르치는 바라고 확신하고 있으며, 또한 칼빈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찬성과 반대의 입장을 떠나 그의 신학이 그의 성경연구의 결과로 나온 성경중심의 신학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많지 않아 보인다. 따라서 ‘이렇게 반대되는 것의 복합체처럼 보이는 칼빈의 신학을 구성하는 어떤 원리(principle)가 있는가?’ 하는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는데, 혹은 칼빈의 예정론을, 혹은 그의 기독론을, 또는 하나님에 대한 이중적 지식, 또는 삼위일체교리 등을 칼빈의 신학의 중심원리로 제시하여 보려 하였으나 학자들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칼빈의 신학원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 학자들 사이에 대체적인 합의에 도달한 견해는 없어 보인다. 칼빈과 언약신학 사이의 관계는 칼빈과 후대 칼빈주의자들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문제와 칼빈의 신학원리에 대한 논의와 병행해서, 또는 관련 속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주제이다.

  

    ‘언약신학’(Covenant Theology 또는 Federal Theology)은 ‘언약사상’(covenant idea)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언약신학은 언약사상과 관련이 있지만, 언약사상을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언약신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언약신학은 성경적 언약사상을 활용하여 이의 바탕위에서 성경의 가르침을 체계화한 것으로서, 언약신학은 최소한 두 가지 혹은 세 가지로 구별되는 언약을 말한다. 즉 언약신학은 행위언약과 은혜언약(구속언약이 포함된)의 두 가지 언약을 말하거나, 또는 행위언약과 은혜언약 그리고 은혜언약과 구별되는 것으로서의 구속언약의 세 가지 언약을 말하는 것을 언약신학이라고 말한다. 언약신학은 역사적으로 볼 때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기초하였던 독일의 개혁파 신학자들인 올리비아누스(Olevianus)와 우르시누스(Ursinus)가 은혜언약과 구별되는 것으로서의 행위언약을 말하면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후 언약신학은 개혁신학 전통 내에서 더욱 발전되어 콕케이우스(Cocceius)와 청교도 개혁파 신학자들에게 이르러 언약신학은 행위언약, 은혜언약에 더하여 구속언약의 세 가지 언약을 구별하여 말하게 되었다. 여기서 제기되는 질문은 칼빈 이후에 개혁파 신학전통 내에서 발전된 언약신학은 칼빈의 가르침에 바탕 한 것으로서 그의 신학사상의 연속성 위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칼빈의 신학사상을 떠난 것으로서 후대 개혁신학자들의 창안인가 하는 것이다. 이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칼빈은 후대 언약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언약신학자로 볼 수 있는가? 아닌가?’ 하는 질문으로 바꾸어 볼 수도 있다.

 

   언약신학과 칼빈의 관계문제를 생각할 때 또 한편 연관되는 질문은 언약신학의 발전과 관련하여 ‘개혁신학 내에는 하나의 전통이 있는가 아니면 두개의 서로 다른 전통이 있는가?’ 곧 ‘칼빈의 언약사상과 불링거의 언약사상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개혁전통 내에는 칼빈을 중심한 제네바 전통과 쯔빙글리, 불링거를 중심한 취리히 전통의 두개의 다른 전통이 흘러오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의 전통만이 흘러오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또한 연관되어져 있다. 일단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개혁주의 전통 내에 두개의 다른 전통이 흘러 내려오고 있다고 본다. 이들은 칼빈의 언약에 대한 이해와 불링거의 언약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달랐다고 주장한다. 곧 이들은 칼빈의 이해에 있어서 언약은 일방적(monolateral)인 것이었던데 반해 불링거의 언약에 대한 이해는 쌍방적(bilateral)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들에 대해 칼빈의 언약에 대한 이해와 불링거의 이해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를 가진 개혁주의 신학자들도 있다. 따라서 그들은 개혁전통 내에 두개의 다른 전통이 있다는 견해를 반대한다. 이들은 칼빈이나 불링거 모두 언약을 한편 일방적이면서도 또 한편 쌍방적인 것으로 보았다고 본다.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의 역사신학 교수인 피터 A. 릴백(Peter A. Lillback)은 그의 책 The Binding of God에서 개혁주의 신학역사 속에 다른 두 전통의 흐름이 있다고 주장하는 일부의 견해(특별히 Leonard J. Trinterud와 Wayne Baker로 대표되는)에 반대하여 칼빈의 언약에 대한 이해와 불링거의 언약에 대한 이해 사이에는 본질상 차이가 없음을 두 개혁파 종교 개혁자들의 글들을 살핌으로 문헌적 증거를 가지고 밝혀내고 있으며, 칼빈의 언약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언약의 일방적(monolateral), 무조건적(unconditional) 성격뿐만 아니라 쌍방적(bilateral), 조건적(conditional) 성격이 또한 동시에 강조되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럼으로 어떤 이들이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에 치우친 칼빈의 언약에 대한 이해는 언약의 일방적, 무조건적 성격만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인간의 책임을 보다 중시함으로 언약의 쌍방적, 조건적 성격을 강조하는 불링거의 이해와 다르고 더 나아가 후대의 발전된 언약신학과는 긴장관계에 있다고 보는 견해는 역사적으로나 문헌적으로 근거가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칼빈의 언약사상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동시에 고려하는 것으로서 후대의 발전된 형태로 나타나는 언약신학은 이러한 칼빈의 언약에 대한 이해와 연속선상에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의 서론이라 할 수 있는 1장에서 릴백은 칼빈의 언약사상과 개혁전통 내에서 후대 발전된 언약신학 사이의 관계를 이해함에 학자들 간에 서로 충돌하는 다양한 해석의 스펙트럼을 펼쳐 보여준다. 칼빈의 신학과 언약사상은 아예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는 극단적인 입장으로부터 칼빈의 신학과 후대 언약신학은 일치한다고 보는 입장, 그리고 칼빈의 신학과 후대 언약신학은 서로 충돌한다고 보는 입장에 이르기까지 칼빈의 언약에 대한 이해와 후대 언약신학과의 관련성과 관련한 다양한 해석들을 제시함으로 저자는 칼빈의 언약사상을 이해하는 것이 칼빈의 신학을 이해함에 얼마나 중요하며 개혁신학의 정수인 언약신학을 이해함에 필수적인가 하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이후 2장부터 5장까지는 본론의 1부로서 칼빈의 언약사상의 근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 저자는 칼빈의 언약이해의 근원을 중세신학에서의 언약이해와 루터의 언약 이해 그리고 스위스 종교개혁자 쯔빙글리의 언약 이해의 맥락 속에서 살펴야 함을 말한다.

 

   6장부터 15장까지는 본론의 2부로서 저자는 칼빈의 언약사상에 대한 저자의 이해를 문헌적인 증거들을 통하여 불링거의 언약사상과 비교하며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칼빈의 언약사상은 신약과 구약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문제를 이해하는 중심원리였으며, 칼빈의 언약사상 속에도 언약의 쌍방적 조건적 성격이 있음과, 칼빈의 구원론에 있어서 그리고 복음과 율법사이의 관계를 이해함에 있어서도 그의 언약사상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밝히고, 칼빈에게서 후대 발전된 언약신학에서 말해지고 있는 ‘행위언약’(Covenant of Works)과 ‘은혜언약’(Covenant of Grace) 그리고 ‘구속언약’(Covenant of Redemption)의 요소들이 이미 발견되고 있음을 말한다. 또한 칼빈의 언약사상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선택과 인간의 책임사이를 조화롭게 이해하는 원리로서 교회안의 위선자의 문제와 언약백성 곧 신자라 할지라도 언약에서 끊어질 수도 있음을 말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이해하게하는 원리임을 말한다. 이후 칼빈의 성례관이 언약적 관점에서 이해되고 있음과 언약을 지킴으로 계속해서 언약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은 신자의 의무이며, 이런 맥락에서 신자의 삶에서 성화와 선행을 어떻게 언약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 책에서 저자는 칼빈의 언약이해가 하나님의 절대주권만을 강조하는 일방적, 무조건적 이해였다는 생각에 반대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동시에 강조하고 조화롭게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쯔빙글리, 불링거의 언약이해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음을 말한다. 또한 이러한 칼빈의 언약사상은 칼빈의 신학 전반을 구성하고 서로 이어주는 원리임과, 비록 칼빈이 후대 발전된 언약신학에서와 같은 용어를 쓰고 있지는 않다고 할지라도 칼빈의 언약사상은 후대 발전된 언약신학과 일치하는 연속선상에 있음을, 그리고 후대 언약신학의 발전은 이러한 칼빈의 언약사상의 바탕 위에 놓여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 책은 개혁주의 신학의 중심인 언약신학에 대해 알고자 하는 신학생들과 개혁교회의 목사 또는 사역자들에게 언약신학의 핵심적 내용과 그것이 가지는 신학적, 목회적 중요성을 파악하게 하는데 매우 유익하며, 동시에 칼빈의 신학과 관련하여 제기되고 있는 문제들을 이  해함에 매우 유익함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