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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 하나님의 세계(원제, Christ Plays in Ten Thousand Places) (서울; IVP, 2006) 를 읽고

 

                                                                                                                                      김재윤

 

 

유진 피터슨 일생의 영성 연구를 집대성한 책이라는 선전문구가 붙은 이 책을, 서평을 쓰기 위한 목적으로 읽기 시작하였다. 몇 페이지를 넘기지 않아서 나는 나의 모습에서 어떤 종류의 무안함을 느끼게 되었다. 마치 같이 놀고 같이 대화하자는 친구 앞에서 그 친구를 분석해 보겠다고 요모조모 뜯어보고 노트에 기록하고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출발점: 매혹적인 자기 반성

 

그는 어떻게 생명의 양식으로 그들의 영혼을 섬길까하는 생각보다는 어떻게 그들을 이용하여 개척교회 목사로서 성공할 수 있을까를 하는 생각에 알게 모르게 좌우되고 있음을 느껴 보았던 목회자이다. 또 강단에서 설교하는 방식과 교회의 기획 위원회를 지도하는 방식 사이에 어떤 균열이 있음을 목회 현장에서 경험했다. 지극히 미국적인 방식, 곧 사람들의 소비 심리에 호소하고 추상적인 원칙을 이용해 사람들의 열의를 모으고, 슬로건을 내세워 목표를 제시하며 자아를 만족시키는 홍보이미지를 만들어 낸 스스로의 목회를 반성하고 있다(572, 이하 숫자는 책의 페이지). 동시에 그는 하나님을 추상적 진리나 원리로 사용하고, 정보로 취급하며 실용적 프로젝트를 통해서 알려고 하는 신학의 경향성을 경계하는(92) 신학자이기도 하다.

저자가 말하는 현실과 우리는 무관한가? 채 자신의 에 비춰볼 여유를 주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무수한 양의 정보와 말씀과 설교, … 인내하면서 자신의 삶의 구석구석을 재 정돈해 보기도 전에 밀려오는 또 다른 훈련과 봉사의 물결, … 소속된 지역 교회의 설교도 삶의 양분으로 채 스며들기 전에 소위 기독교 방송매체를 통해서 전달되는 설교의 홍수

더구나 저자가 지적하는 현대인들의 비관여(disengagement)’, 곧 음식을 직접 만들지 않고 그저 텔레비전에 나오는 음식을 주문해 먹고, 사람들과 대화하는 대신 텔레비전을 켜듯(579) 자신과 인격적인 관계가 전혀 없는 설교자들의 말씀을 방송매체를 통해 듣는다. 또한 주일에 굳이 예배에 참석하지 않더라도, 전혀 인격적인 만남이 없이도, 인터넷을 통해서 수시로 설교를 들을 수 있다. 한마디로 크리스챤은 인격적 관계가 배제된 채 소위 말씀을 소비하는 소비자들로 대우받고 있다(25).

신학이 마치 비밀의 코드처럼 추상적이고 신비한 정보로 여겨지고, 낯선 공간-학교와 신학자들-을 떠돌 때 예배와 기도, 크리스챤의 삶의 영역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무관한 지식에 의해서 침범 당하고 있다. 아니면 신학은 매우 실용적인 프로그램의 형태로 다운 그레이드 되어서 세미나나 특강의 얼굴로 낯설게 공동체 안에 들어온다.

 

신학의 주제로서

 

유진 피터슨은 신학의 중심으로서 을 복원시키고자 한다. 정당한 신학은 삶을 살아내야하는 것이다. 그의 최고 관심사는 삶으로서의 기독교적 삶이다.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자신의 정체성이 서로 일치하는 삶이다(575). 최고의 영성 신학자라는 명성에 걸맞게 그는 이 모든 삶의 총체를 영성이라고 정의한다(47). 영성은 살아있음(livingness)’이라는 방대하고 복잡한 망을 지칭한다(63).

일상적인 삶에 대한 관심은 최근 신학에서 두드러진다. 리챠드 마우와 케빈 벤후저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리챠드 마우는 버거킹에서 기도하기라는 책에서 사적 영역공적 영역을 나눌 수 없는, 크리스챤의 삶의 통일성을 말한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길이 버거킹에도 미치며 치즈버거나 감자튀김, 칸막이 의자 사이를 뛰어다니는 아이들도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일부, 하나님의 자비가 미치는 피조세계의 일부임을 인식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리챠드 마우, 버거킹에서 기도하기, 서울; IVP, 2009, 14).

마우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신칼빈주의의 입장에서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한 관심을 강조한다면, 케빈 벤후저는 좀 더 분명한 삼위일체론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그는 교리(doctrine)를 이론적 진리들이라고만 보지 않고 삶의 방식들 안에서 진리를 구체화한 것이라고 본다. 그는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극장 비유를 도입한다. 첫 번째 단계에서 관중, 곧 크리스챤은 수동적인 입장에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드라마(Theo-drama)를 감상한다. 여기서 기독교 신앙은 관념들의 체계나 도덕적 가치들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말하고 행동하는 하나님의 드라마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Kevin J. Vanhoozer, The Drama of Doctrine, A Canonical Linguistic Approach to Christian Theology, Louisville; WJK, 2005, 57.).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두 번째 단계로의 이행이 일어난다. 관객은 단순히 관심 없는 이론가들의 사색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카타르시스, 곧 감정적이고 상상력을 동반하는 일종의 투자를 하게 된다. 크리스챤들은 이 무대의 중요 등장인물들인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연기를 이해하고 따라가는 과정을 통해서 거기에 동참하도록 준비되며, 마침내 첫 번째 단계에서 나타났던 하나님의 드라마(Thoe-drama)에 적합한 다른 무대들을 만들어내게 된다(Vanhoozer, The Drama of Doctrine, 16.). 따라서 교리(doctrine)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의 드라마에 적합하도록 준비시키고 마침내는 그 드라마에 기여하고 참여하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Vanhoozer, The Drama of Doctrine, 107).

  벤후저는 이런 생각을 더 구체적으로 진행시킨 일상의 신학 (Everyday Theology)’에서 교회와 크리스챤은 하나님의 드라마라는 컨텍스트 속에서 문화(Kevin J. Vanhoozer, “Introduction: Toward a theory of Cultural Interpretation” in Everyday Theology, How to Read Cultural Texts and Interpret Trends Kevin ed. by J. Vanhoozer, Chales A. Anderson, Michael J. Sleasman, Grand Rapids; Baker Academy, 2007, 24.)를 읽어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건설해 가시는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문화적 사명자가 되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Vanhoozer, “Introduction”, 55).

 

과 삼위일체 하나님

 

벤후저가 기독교 신앙의 최종적인 종착점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할 때 신학의 중심으로서 을 주장하는 유진 피터슨과 유사한 점을 보게 된다. 전자가 독트린(doctrine)을 하나님의 드라마에 바르게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방향과 권위를 가진 대본이라고 말할 때(Vanhoozer, The Drama of Doctrine, 80) ‘삼위일체는 기독교적 삶에 관한 대화가 일관성과 초점과 인격성을 지키도록 가장 적절한 구조를 제공하는 신학적 신조(28)라고 말하는 후자와 같은 문제의식을 보게 된다.

  이처럼 삼위일체을 중심으로 삼고자 하는 유진 피터슨의 영성 신학에서 근본적인 토대를 제공하는 신학적 신조이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그가 말하는 대로 의 전부가 삼위일체의 나라’, ,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고 일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으로 인해 일어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25)

그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임재와 그 분의 일이 우리의 삶을 형성해 간다고 말하면서 살아있음(liveness)’이라는 방대하고 복잡한 망, 모호하고 추상적인 용어인 영성의 초점을 모아주는 용어로서 예수를 선택할 때(66) 그 의미는 더 분명해 진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시고 치유하시고 도와 주신다(68). 이런 점에서 저자가 말하는 삼위일체는 기독론으로 정리되어 철저하게 예수안에서 임재하시고 일하시는 삼위하나님, 그러나 일상의 평범한 생활 속에서 한 인간으로서 그것을 채워가시는 삼위 하나님의 임재와 일하심으로 구체화된다.

그는 일찌감치 성부에게로 돌린(29) ‘창조의 영역도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임을 분명히 한다. 곧 예수는 다름아닌 우리와 같은 조건에서 창조를 살아내는사람의 형태로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이다(16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해서 창조를 살아내는 것, 그리고 파생적인 삶이 아니라 원래의 모습에 맞는(origin-ally) , 창조의 참여자로서 우리가 동참하는 창조의 일로 나가게 된다.

그런데 그가 말한 창조를 살아내는 것, 예수의 탄생이 가지는 경이를 다시 경험하게 해주는 아기의 창조(111)과 우리가 보고, 만지고, 느끼고, 맛보는 모든 것이 우리의 창조의 리듬을 알게 해주는 것(135), 들꽃을 꺾은 소녀를 모독하지 않고 그 소녀 조차도 자연을 구성하는 신성한 하나님의 창조물을 끌어안는 것(156)으로 구체화될 때 우리는 묻게 된다: 우리는 때로 창조를 경험하고 창조를 사는 것이 아니라 죄악의 지뢰처럼 흩어진 파편들을 경험하고 죄악을 사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임재와 일을, 직접적으로 피조 세계 전체에서가 아니라 일차적으로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경험하고 살아내야 하지 않는가?

창조 안에서 놀이하시는 그리스도라는 1장을 읽고 가질 수 있는 질문을 예측한 듯 그는 2역사 속에서 놀이하시는 그리스도에서 창조에 대한 모독(255), 하나님의 부재 혹은 침묵(274), 악의 통치(290)라고 규정될 수 있는 지저분한역사를 말하고, 깨어진 창조인 바로 그 역사 속으로 들어오셔서 망가진 창조를 취하시고 인내하시며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는 하나님의 일을 구원이라고 본다. ‘우리의 구원은 역사 속에서 바로 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고 그것은 한마디로 역사 속에서 존재하는 방식이 될 수 있다. 성찬, 식사, 노래, 손 대접, 희생적인 삶과 사건이 일어나는 모든 역사(297)가 우리의 구원이 될 수 있다.

창조를 경험하고 구원을 살아내는 일은 결코 공동체를 떠나서 생각될 수 없다. 하나님이 행하셨고 또 하고 계신 일에 동참하는 것은, 곧 부활 공동체를 형성해 가는 것이다. 유진 피터슨은 예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곧 공동체를 형성해 가는 방식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우리의 존재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 방식은 공동체적이지 않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성부-성자-성령의 친교(527)이다. 그렇기에 그 분 그대로의 존재에 참여하는 것은 공동체적 친교 속으로 들어가는 것에 다름 아니다.

 

철저한 영성신학자, 그러나 철저한 삼위일체론자?

 

 유진 피터슨이 소망하는 영성 신학에 반하는(?) 이런 분석적인 작업을 펼쳐놓고 보니 그의 영성 신학에서 삼위일체론의 치는 무엇인가 하는 마지막 질문을 하게 된다. 그의 책 전반에 삼위일체적인 함의들이 암시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는 철저하게 기독론 중심이기 때문이다. 성부, 성자, 성령님 함께 일하시고 함께 사시는, 그리고 바로 그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셨고 우리는 그의 존재 속으로 안아주시고 참여하게 하신다는 관점이 그의 책 전반에 걸쳐 분명히 함축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언급하듯, 삼위일체가 인격적 관계를 본질을 알게 해주는, 오직 관계 맺음을 통해서 서로를 알게 해주는 이 모든 일의 이미지로써 위치 지워지고, 우리 삶의 상호 내재성에 대한 증언으로 언급되며,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탐험하기 위한 지도’-구조와 맥락-로 사용될 때,(28-31) 그의 신학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단지 상호침투상호교제라는 컨셉(concept)을 제공하는, 객관화된 대상으로 전락해 버린다. 이것은 그의 영성신학 안에서 삼위일체론이 가지는 위치가 혼란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아울러 그가 3공동체에서 보여준 좀 더 적극적인 삼위일체적인 접근을 창조와 구속을 다루는 부분에서도 보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좀 더 일관되게 성부, 성자, 성령의, 각각 구별되지만 나누어 질 수 없는 동일한 사역과 삶의 관점에서 접근할 수는 없었는가 하는 아쉬움을 가지게 된다.

저자는 탁월한 영성 신학자이다. 그의 신학의 높이와 깊이는 나의 이 서평을 무력화시키고도 남을 만큼 높고 깊다. ‘’, 참된 삶, 그리스도적인 삶, 창조-구원-공동체를 살아내는 삶에 대한 그의 통찰력, 그의 강조는 이 서평의 분석적인 시각을 부끄럽게 한다. 그러나 그가 철저하고 일관된 삼위일체 신학자인가? 여전히 남는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