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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신학자 존 칼빈』

                                                                 김재성. 생명의 말씀사: 서울, 2004.

 

                                                                                                                                                                             이성호 

 

      김재성 교수(합동신학대학원 대학교의 조직신학 교수였고 지금은 목회자로 섬기고 있다)의『성령의 신학자 존 칼빈』은 칼빈의 신학을 고귀하게 생각하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의 큰 기쁨이 될 것이다. 비록 이전 보다는 칼빈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긴 하였지만, 여전히 한국어로 쓰여지거나 번역된 책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런 점에서 한국인이 쓴 제대로 된 칼빈 연구서가 단행본으로 출판이 되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큰 의의가 있다 하겠다.

   『성령의 신학자』의 가장 큰 장점은 뚜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쓰여졌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모든 책의 존재 목적이기도 하다. 저자는 개혁신학이야말로 참된 신학이며 바른 신학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이런 확신은 이 책의 곳곳에서 쉽게 감지될 수 있다. 개혁신학의 이런 정통성은 신학의 한 부분인 성령론에 대하여도 예외가 될 수 없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그 결과 이 책의 주 목적 중의 하나는 한국교회에서 막연하고 근거없이 주장되는 “개혁주의는 성령론이 약하다”는 ‘카더라 통신’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것이다.

저자는 미국의 정통적 장로교 신학교인 웨스트민스터에서 수학하면서 칼빈 신학의 진면목을 체험하였고, 특히 칼빈의 성령론의 풍성한 진리에 대하여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이후 칼빈의 신학을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였고, 그 결과 한국교회가 칼빈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통념적 이해가 얼마나 피상적인가를 알게 되었다. 『성령의 신학자』는 이런 잘못된 견해를 교정하기 위한 하나의 중요한 시도이다. 저자는 서문 격인 제1장에서 독자들에게 칼빈을 “예정론에 사활을 건 신학자”라는 편견을 “제발 거두어 주시라고” 호소하고 있다.

사실, 20세기 초 개혁주의 신학자 중 가장 뛰어난 인물 중의 한 사람인 워필드(B. B. Warfield)가 칼빈을 성령의 신학자라고 부른 이후, 칼빈 연구가들에게 있어서 이 문구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하나의 진부한 명제가 되었다. 이것은 학계와 일반 상식 사이의, 더 구체적으로 신학연구와 교회 현실과의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즉, 아무리 신학자들이 연구를 많이 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연구가 상아탑에 머무를 때, 일반 신자들은 그 연구의 결과와 아무런 상관없이 살아가게 된다. 그런 점에서 『성령의 신학자』는 칼빈 신학의 대중화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할 것이라 확신한다. 무엇보다는 이 책은 쉽게 읽혀 진다는 큰 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제목이 성령의 신학자이기는 하지만, 저자가 밝혔듯이, 이 책은 칼빈의 성령론만을 다룬 책이 아니다(p. 16). 이 책의 목차를 대략 보도록 하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나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성령’(제2장)은 성령의 본질적인 사역이니 당연히 이 책에서 다루어질 것이라 기대되지만, 예상하기 쉽지 않은 다양할 주제들도 발견할 수 있다: 성경과 성령(제4장); 율법과 복음(제6장); 성례와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제8장); 기도와 언약, 성령의 도우심(제9장); 설교와 성령의 기름부음(제10장). 이 책에서 다루어 진 내용들은 칼빈 신학의 중요한 특성들을 거의 다 망라하고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이 책은 칼빈신학을 위한 입문서로서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앞에서도 지적하였듯이, 칼빈은 성령의 다양한 사역을 통하여 성령의 온전하고도 진정한 모습을 확립시켰다는 것이 이 책의 중요한 논지이다. 이것은 성령이라고 하면, 성령의 특별한 은사만을 강조하는 오늘날의 피상적인 성령의 이해와 얼마나 되조되는가를 보여 준다. 그리스도와 신자를 연합시키고,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내적 조명으로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신자들로 하여금 성취하게 하시고, 승귀하신 그리스도의 몸을 이 땅에 임재하게 하시는 이 모든 풍성한 성령의 사역들에 대해서 한국교회는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가? 비록 이 모든 것들이 칼빈 혼자 정립한 신학적 이해들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의 저술을 통해 개혁신학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모든 책들이 그렇듯이, 이 책 역시 한 두 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이 다른 칼빈 연구서들보다 그 당시 상황 혹은 맥락 속에서 칼빈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한 것은 분명하지만, 보다 더 이런 부분에 철저하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특히, 칼빈의 대적뿐만이 아니라 칼빈의 동료 신학자들, 그리고 그의 후예들과의 관계가 보다 더 자세하게 다루어졌어야 한다. 이것은 오늘날 칼빈의 신학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매우 중요한 방법론이다. 이전의 칼빈 입문서들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만 연구한다든지, 칼빈의 저술만을 참조하는 경향들을 보였다. 그 결과 칼빈의 신학은 정확하게 기술되었는지 모르지만, 칼빈이 왜 그런 진술들을 해야만 하였고, 그것이 역사적 상황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성령의 신학자』는 부분적으로 이런 단점을 극복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비록, 칼빈에 대한 편견이나 오해도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칼빈의 위대성을 너무 초점을 맞추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다. 그가 개혁신학의 위대한 스승인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지만, 칼빈이 가장 위대하다든지 혹은 유일한 스승인 것같은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는 그 당시 기라성같은 여러 개혁 신학자 중에 한 명이었을 뿐이다 (이것은 저자도 잘 알고 있는 부분이다). 칼빈은 자신만의 독특한 신학을 추구하지 않았다――적어도 그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는 공교회가 이해한 신학을 체계적으로 서술하였을 뿐이다. 그렇다면, 칼빈은 그 이전의 신학(특히 교부들)과 동시대의 신학자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본 비평자의 몇 가지 불만들이 이 책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손상시키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칼빈의 기독교 강요도 제대로 읽혀지지 않는 시대에 이와 같은 불만들은 사치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칼빈 연구가들이 이와 비슷한 종류의 책을 쓴다면, 김재성 교수의 『성령의 신학자』를 하나의 주춧돌로 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주춧돌 위에 무엇을 쌓는가는 전적으로 후학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