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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삶 칼빈주의

조엘 비키 저/ 신호섭 역

지평서원, 637 p.

 

주강식 목사

 

  이 책을 93년만의 추위라는 엄동설한에 잠자리에 들기 전 매일 한 장 내지는 몇 장을 읽었다. 그러나 책의 분량면에서 630여 페이지에 달하여 단번에 읽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칼빈주의의 진수와 역사의 구수한 향기를 맡을 수 있어 너무나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오늘날 칼빈주의가 퇴색되어가고 신앙의 신사조에 요동치고 있는 때에 개혁자들의 열정과 신앙의 정통성을 잇게 하는 중요한 기회를 제공한다고 믿는다. 또한 이 시대에 칼빈주의의 부흥을 기대한다.

 

  이 책의 역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삶 칼빈주의』라고 번역했지만 원제는 Living for God's Glory: An Introduction to Calvinism 라고 되어 있다. 원래 목적은 칼빈주의의 대가인 조엘 비키(Joel R. Beeke)가 칼빈주의를 현대에 조금 더 소개하려는 의도에서 책을 편집했고, 그 외에도 칼빈주의에 정통한 8명의 기고자가 있다. 조엘 비키는 영국 세일스버리의 ‘말콤 왓츠 컨퍼런스(Malcolm Watt's Conference)’와 브라질의 ‘청교도 프로젝트(the Puritan Project)’, 그리고 호주 ‘아들레이드 컨퍼런스(Adelaide Conference)’에서의 칼빈주의 강연을 통하여 이 내용이 책으로 집필될 필요성을 느꼈고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책으로 출판된다고 언급하고 있다. 특히 칼빈 탄생 500주년 기념해인 2009년에 맞추어서 레포메이션 트러스트(Reformation Trust) 출판사를 통해 출간되었다.

그 내용으로 다음과 같이 전개하고 있다.

 

1부 칼빈주의 역사

2부 칼빈주의 지성

3부 칼빈주의 심장

4부 칼빈주의의 교회

5부 칼빈주의의 실천

6부 칼빈주의의 목적

 

   1부 칼빈주의 역사에서는 칼빈주의가 태동할 수 밖에 없었던 정치, 문화, 종교적 배경과 신앙고백서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칼빈주의의 신앙이 녹아 있는 것이 신앙고백서들이다. 교회의 역사는 신앙고백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개혁주의 신앙을 표현하고 있는 신앙고백서는 『제1,2스위스 신앙고백』(1536, 1566), 『스위스 일치신조』(1675),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1560), 『39개 신앙조항』(156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7), 『소요리문답』(1648), 『대요리문답』(1648), 『벨직 신앙고백서』(1561),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1563), 『도르트 신조』(1618-1619)이다. 이것들은 ‘살아 있는’ 교리적 표준이다. 그것은 21세기의 수많은 개혁주의 교회들이 공식적인 문서로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혁주의나 장로교가 아닌 칼빈주의 침례교에서 발행된 신앙고백서가 있다는 점도 아울러 소개하고 있다.

   2부 칼빈주의의 지성에서는 칼빈주의의 정수요 가장 핵심교리인 하나님 중심주의와 하나님의 주권, 그리고 5대교리를 다루고 있다(3-9장). TULIP의 두문자어로 약칭되는 칼빈주의 5대 교리가 칼빈주의의 중요한 교리이지만 전부가 아니다. 이것은 단지 알미니안주의자들의 항의에 대한 칼빈주의의 답변의 결과물이다. 칼빈주의 5대 교리는 하나하나가 톱니의 바퀴처럼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성도의 견인과 보증을 다루는 장에서 저자는 오늘날 부흥을 열망한 나머지 은사주의로 흐르는 신앙노선들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은사주의는 칼빈주의가 내세우는 지성보다는 감성에 더 호소를 한다. 신앙을 개인의 체험위주로 나아갈 때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또한 견인과 보증을 잘못 이해한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개념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와 믿음과 거룩 등과 같이 ‘구원에 동반되는 것들’을 제외한 채 죄인의 칭의가 하나님의 구원의 전부인 것처럼 말하는 불완전한 개념”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이어서 10장에서는 종교개혁자들의 슬로건이었던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의 뜻과 내포된 의미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칼빈주의를 다루면서 루터의 믿음사상으로 논증하려는 했던 것은 조엘 비키의 허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루터는 개혁자이면서도 칼빈주의와는 성찬론이나 국가론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11장에서 제임스 그리어(James Grier)는 칼빈에게 있어서 이색적 측면인 철학적 신학자라는 이미지를 주장한다. “칼빈은 자신의 신학적 요점을 명료하게 하기 위해 철학적 수단과 논증을 사용하되 철학을 신학의 하인으로 사용했다”고 지적한다.

 

   3부 칼빈주의 심장에서 칼빈을 냉소적인 신학자나 5대 교리의 신학자, 예정론의 대변자로 이해하는 사상을 12장에서는 여지없이 날려버린다. 그는 미국 장로교 신학자 워필드의 지적과 같이 ‘탁월한 성령의 신학자’로 불리기에 전혀 손색이 없다. 그의 시편주석에는 성령과 그분의 사역에 대한 언급이 넘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오늘날 우리가 칼빈주의에서 놓치고 있는 부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칼빈의 사상을 이어받은 청교도들 중 존 프레스톤(John Preston)은 “영적인 용기와 담대함을 얻기 위한 방편은 성령의 사역에서부터 오며 그 다양한 방편은 말씀을 들음, 성례참여, 기도, 묵상, 대담, 성도의 교통, 선을 행하려는 특별한 결심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칼빈주의의 심장 가운데 경건을 주제로 하여 “참된 경건 없이는 참된 지식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경건에 관한 참된 뿌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칼빈은 경건을 “하나님을 향한 합당한 태도와 그분을 향한 순종”이라고 정의한다. 이 정의에 따라서 경건의 국면을 신비적 연합, 성령과 믿음의 관계, 칭의와 성화 속에서 찾았다. 칼빈의 경건은 교회론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특히 시편 찬미는 “경건의 정경적 교과서”로 간주한다.

 

   칼빈주의는 삶의 모든 국면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이러한 모습을 가장 잘 담아내는 것이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성화이다(14장). 칼빈주의는 고상한 지식과 이론만을 제공하는 교리가 아니다. 이러한 교리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제35문에 잘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성화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전인적으로 새롭게 되며, 죄에 대해서는 점점 더 죽고 의에 대해서는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의 행위”라고 대답한다. 청교도들은 칼빈주의를 실천적인 면에서 아주 잘 적용하고 있다. 이것이 성화로 나타난다. 청교도 존 오웬(John Owen)은 그러한 칼빈의 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 칼빈의 신학이 사변적이며 이론에 그치지 않고 목회적이며 실천적임을 청교도들이 신학의 틀을 세워 삶에 잘 적용했다. 은혜의 방편으로 성경읽기, 묵상, 기도, 일기쓰기 등을 소개한다. 그러나 토마스 왓슨은 “모든 말씀을 마치 자기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으라”고 조언하고 있다. 말씀의 적용에 대한 이 말을 심정적으로는 이해하지만 이것은 성경을 6하(WH) 원칙과 더불어 누구에게(to whom)를 포함한다면 무리한 적용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청교도들의 매일 사용하는 성화 방법에 대하여 자아 의존을 배제한 열심 있는 기도와 격렬한 노동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방법은 중세 수도사들의 ‘기도하라. 일하라’는 모토에서 온 듯하다. 성화의 방법론에서 격렬한 노동을 현재의 우리가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한다.

 

   4부 칼빈주의의 교회에서 교회 개혁을 다루는 장(16장)에서 칼빈의 교회론은 루터교회와는 다른 견해를 제시하여 개혁파와 장로교파를 형성하게 했다. 이것은 개혁주의 교회 정치의 본질이며 정수이다. 개혁주의 예배의 토대(17장)에 대하여는 레이 래닝(Lay Lanning)이 주제를 맡아 다루고 있다. 루터파 교회와 성공회 교회에서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관례들을 재도입하여 “‘로마교회가 하는 것처럼 하라’는 슬로건을 내걸어 가톨릭주의와 개신교회의 신학적 차이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렸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지적에 절대적으로 동감한다. 칼빈은 루터보다 개혁을 조금 더 완전하게 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장로교의 설교에 있어서 설교를 길게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예배의 다른 부분들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하는 지적은 『예배모범』의 측면에서 합당하다고 본다. 또 개혁주의 전통에서 시편찬송을 많이 계승하지 못한 점은 아쉽다고 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에서 12곡이 전수되었으나 이것마저 부를 수 있는 성도가 없었다. 이것으로 개혁주의는 예전에 대한 무관심이 정통으로 격찬될 여지를 남겼다. 예배형태의 흐름을 종교개혁기부터 근대까지 아주 잘 꿰뚫었다고 본다. 예전학에 대하여 개혁주의 입장에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레이 래닝은 장로교가 예배에 있어서 종교개혁의 유산을 벗어났다고 진단한다. 칼빈에 대하여 명석한 신학자들이 있지만 바르트주의자인 존 맥닐을 자주 거론하는 것은 칼빈주의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정통주의를 칼빈주의로 호도할 수 있으므로 주의깊은 사려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혁주의 설교의 뿌리(18장)는 로버트 올리버(Robert Oliver)가 담당을 하였다. 칼빈은 매일 설교를 했으며, 영국은 엘리자베스 통치시대의 중반과 1640년대 사이에 ‘영국은 책의 나라와 백성이 되었는데, 그 책이 바로 성경이었다’고 했다. 설교는 사람과 나라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한다. 칼빈은 성경을 해석할 때에 “성경 기자의 마음을 펼쳐보이는 것을 그의 유일한 사명”으로 삼았다. 그래서 그는 설교를 단순, 명료하게 하려고 했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사상은 성경우선주의에서 나온 것이며 ‘오직 성경’에서 나온 것이다. 특이한 점은 칼빈이 회중들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 메모없이 설교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원고에 집착하지 않고 철저한 준비를 했음을 잘 나타내 준다.

 

   말씀과 적용(19장)에 있어서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은 ‘실험적’ 또는 ‘경험적’ 설교자라고 불렸다. 이러한 설교에 대한 언급은 칼빈주의의 핵심이었다. 경험적 설교는 “칼빈주의적 진리가 어떻게 전개되어야 하며, 그것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궁극적 목적과 관련하여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설명해 주는 성경적 설교”로 정의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의 적용 문제를 다루고 있다. 오늘날 성도들이 많은 설교를 듣지만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경험적 설교를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이 설교는 그리스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경험적이라고 하여 개인의 주관주의적 체험에 기초하지 않는다. “적용이 빠진 설교는 좋은 가르침이 될 수는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설교는 될 수 없다.” 설교자는 심판날 하나님 앞에 서야하므로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해서는 안 된다. 백스터가 지적한 것처럼 청교도들은 “회중을 웃게 만들고 경박하게 하는 설교를 혐오하고 진지한 설교를 해야 한다.” 이러한 견해는 현대 설교에서 강조되고 실행되어야할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칼빈의 복음 전도(20장)에서 칼빈에게 선교에 대한 생각과 계획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양분된 대답이 있었다. 그러나 조엘 비키는 칼빈에게 전도와 지상 대명령에 대한 사고가 있었음을 분명하게 밝힌다. 여기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칼빈주석 인용에 대하여 본문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다는 것이다. 칼빈이 자신의 교회, 제네바, 유럽(프랑스), 해외(브라질)에서 복음 전도를 실천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이 적극적인 선교적 마인드를 가졌다고 보기에는 미흡하다고 생각한다. 칼빈이 모든 분야에 대해 좋은 가르침을 주었다면 좋겠으나 그도 시대의 아들임을 기억해야 하고 칼빈이 제시하지 못한 것은 각 신학도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며 연구해야할 부분임을 명심해야할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웨스턴 신학교 존 헤셀린크(John Hesselink) 박사는 “칼빈에게 현대적 개념의 선교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 없다 할지라도 그의 선교사상, 즉 선교에 대한 개념은 확고하다”고 언급하였다.

 

   청교도의 복음전도(21장)에서 조엘 비키는 칼빈과 마찬가지로 그의 정신을 계승한 청교도들에게 복음전도가 열정적이었다고 주장한다. 청교도와 현대 복음전도(설교)의 문제점을 잘 부각시켰으며 매우 통찰력 있게 제시한다. 청교도들이 평이한 설교 형식을 사용한 것은 그 중심에 전도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교도들의 복음전도는 진정한 의미에서 청교도 선교사였던 존 엘리엇(John Eliot)이전 까지는 설교에 제한된 것으로 보인다.

 

   이제 5부에서 칼빈의 실천을 다루며 전인적인 삶을 위한 신학(22장)으로 레이 페닝스(Ray Pennings)가 취급한다. 고린도전서 10:31의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가 바로 이 신학에 대입된 말씀이다. 중세의 이원론적 견해는 종교개혁을 통해서 두 왕국의 개념으로 발전하며 칼빈은 루터의 견해도, 재세례파의 견해도, 로마 가톨릭의 견해도 수용하지 않는다. 그는 정부 관리들을 “하나님의 명령을 위임받고 신적 권위를 힘입으며, 실상 하나님을 대표하는 자들”이라고 했다. 모든 신자의 만인제사장설을 주장하므로 칼빈주의는 문화, 예술, 교육, 학문, 정치, 경제, 과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청교도들은 칼빈주의의 실천을 가정에서 청교도적인 삶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23-24장). 성경을 통해 개혁해야할 가장 중요한 대상이 가정이었던 것이다. 청교도들이 부부간의 애정, 즉 성(性)을 장려한 것은 타당하지만 남편이 아내와 오랫동안 동침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출교를 했다는 것은 교회가 지나치게 성도의 사생활에 간섭했다고 사려된다. 또한 청교도는 그리스도인과 가족과의 관계가 개인적인 성화와 불가분리의 관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청교도 가정의 아버지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부부는 동등하지만 그 역할에 있어서 차별이 있다. 가정예배는 자녀 양육의 가장 강력한 방편이 되었다. 청교도들은 가족을 예배하게 하는 일에 실패한다면 그것은 결국 아버지가 되는 일에 실패하는 것과도 같다고 여겼다.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노동(25장)에 대하여도 저주가 아닌 “개인의 선택 또는 영원한 구원의 표지”로 간주되었다. 칼빈은 “아무리 천하고 추한 일을 한다 할지라도, 그 일이야말로 하나님 보시기에는 찬란하고도 고귀한 일”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칼빈주의에서 노동은 소명과 연관지어 생각한다. 또한 이것은 선택과 성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러나 막스 웨버가 이해한 것과는 반대로 청교도들은 구원을 경험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자 했으므로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만든다. 네덜란드와 스코틀랜드의 검약의 태도가 청교도에 의해 미국에 들어왔으나 이러한 유산의 상당 부분은 오늘날 북미의 물질주의로 인해 어두워졌다. 물질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칼빈주의 관점은 분명한 대안을 제시한다. 노동도 우리의 예배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도 칼빈주의는 오늘날의 물질주의 시대에 매우 필요한 것이다.

 

   정부와 교회의 관계(26장)에서는 “서로 다른 책임들, 견제와 균형, 그리고 한 조직으로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을 피하려는 것이 교회 정치뿐만 아니라 민간 정부에 대한 칼빈사상의 특징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루터교, 성공회와는 다른 국가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신자들이 그저 그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개인적인 신앙의 영역에서만 살아간다면 그들은 개혁주의와 풍성한 청교도 유산의 위대한 부분을 놓치게 될 것이다. 공공의 선과 유익을 이루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으로 노력해야하는 칼빈주의의 지향점을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칼빈주의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의 집에 있지만 결코 그곳을 고향으로 생각하지 않는 순례자로 살아갈 것을 상기시킨다. 칼빈주의 윤리(27장)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데서 시작되는 하나님 말씀의 윤리이다.

 

   마지막으로 칼빈주의를 정리하면서 싱클레어 퍼거슨(Sinclair Ferguson)의 글로 칼빈주의 목적을 배열하고 있다. 칼빈주의와 전혀 부조화를 나타낼 송영(28장)을 칼빈주의와 결부시켜 정리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구도를 로마서 11:36에서 찾는다. 조금 더 언급하면 로마서 9-11장에 걸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과 선택, 은혜를 구별하는 것(9장), 복음의 선포(10장), 유대인과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11장)나타내면서 11장 마지막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로 마무리하고 있다.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한 후에 하반절에서 종교개혁의 교훈을 요약해 주는 유명한 라틴어인 ‘soli Deo gloria’, 즉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저자는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이 송영을 불러일으키는 ‘성경적 가르침’이다”라고 주장한다. 조엘 비키는 637페이지에 걸쳐서 칼빈주의를 소개하면서 결론을 종교개혁의 총합적 슬로건으로 마무리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정리를 하고자 한다.

  먼저 이 책은 칼빈주의의 편협성을 단 번에 날리는 작품이었다. 칼빈주의를 언급하면 ‘도덕적 율법주의’를 연상케 된다. 그러나 결코 칼빈주의는 편협하지 않고 광범위하며 화합과 조화, 그리고 포용력이 있다.

두 번째, 개혁주의는 이론에 머물지 않고 삶에 기반을 두고 있는 학문이다는 점이다. 신학을 위한 신학이 아니라 경건에 뿌리를 둔 실천적 학문이다. 칼빈주의는 딱딱한 교리나 이론으로 치부될 것이 아니다. 이러한 삶의 실천적 모습을 잘 보여주는 자들이 청교도들이다. 칼빈주의를 정치, 경제, 문화, 교육에 뿌리를 내리게한 이들이다.

  세 번째, 칼빈주의의 결론을 송영과 맺는 놀라운 결론을 내린다. 그 가르침 안에는 은혜의 대하(大河)가 흐르고 있다. 장엄한 오케스트라가 있고 하나님의 위엄이 따뜻한 햇살처럼 비춰진다. 그러므로 송영은 개혁주의의 필연이다.

  네 번째, 칼빈주의는 한 권의 책으로 역사와 사상과 실천과 결론을 제대로 볼 수 있게 하는 책이다. 칼빈주의를 소개하는 것으로 언급하지만 각 주제마다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다. 정수를 제대로 짚어가며 소개하는 아주 좋은 책이요 안내자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주의를 소개하면서 바르트주의자들의 글을 인용하여 논증하려는 점, 루터의 주장을 개혁주의로 논증하려는 점, 청교도들의 열정이 지나쳐서 사생활까지 간섭하는 점, 성경을 읽는 태도에서 주의점, 청교도들의 성화방법론에서 격렬한 노동을 들고 있는 점, 칼빈에게 선교사상이 있었다는 점 등 다소 무리한 부분이 없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