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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운동

 

주강식 목사(양산남부교회)

 

저자: 행크 해너그라프

역자: 이선숙

출판사: 부흥과개혁사

출판연도: 2010년

페이지: 460

 

현대는 영적으로 아주 혼탁한 시대이다. 각종 이단과 거짓의 영, 그리고 이교의 영향이 기독교 안으로 봇물처럼 밀려들어오고 있다. 에스겔처럼 파수꾼이 되어 교회에 나팔을 불어줄 지도자가 필요한데 점점 줄어들고 있다. 현대는 구약시대의 종교혼합주의와 버금가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곳에 거짓이 난무하다. 그렇기에 무엇보다도 이 책이 주는 교훈은 크다고 생각한다. 건전한 신앙을 위하여 반드시 일독 할 것을 추천한다.

국제기독교연구원(Christian Reserch Institute)의 대표이며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하고 있는 저자 행크 헤너그라프(Hank Hanergraaff)는 이 책을 통해서 성령의 진정한 역사와 FLESH로 대표되는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 운동의 역사를 구분하였다. FLESH는 1부 거짓말·환상·기만(Fabrication, Fantasies, and Frauds), 2부 거짓 기사(Lying Signs and Wonders), 3부 종말 회복주의(Endtime Restorationism), 4부 쓰러짐(Slain in the Sprirt), 5부 최면술(Hypnotism)이다.

1부에서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 운동 지도자들은 설교와 사역을 거짓말·환상·기만으로 장식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1979년 17살의 로드니 하워드 브라운이 강렬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체험하였다. 그의 기도를 받은 여성도가 교회 바닥에 6시간 동안 누워 있었는데 그는 이것을 ‘성령 접착제’로 부른다. 하워드의 사역에서 웃음이 터지는 일이 일어나자 이것을 거룩한 웃음으로 부르며 ‘마지막 부흥’이라고 칭하였다. 저자는 펜사콜라 성령 대부흥 운동에서 나타난 이해할 수 없는 요소들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펜사콜라 운동의 지지자들은 사울, 에스겔, 이사야의 경우를 들어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2부에서는 가짜 부흥 운동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거짓 기사의 근거를 조나단 에드워즈에게서 찾으려 하지만 에드워즈는 바로 그런 기적이 1차 대각성 운동을 몰락으로 이끈 원인이라고 믿었다. 제임스 라일은 가짜 부흥 운동을 대중화하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인데, 그는 꿈과 환상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믿었다. 또 자신들의 부흥 운동에서 일어난 통제할 수 없는 웃음, 비통한 흐느낌, 풍차를 돌리듯이 팔을 휙휙 돌리는 행위, 발작적인 경련, 성령 안에서 쓰러지는 것과 같은 ‘광란적인 행위’가 1차 대각성 운동에서도 만연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19세기 순회 설교가인 피터 카트라이트의 주장으로 반증한다. 진정한 부흥 운동은 언제나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3부 종말회복주의에서는 종말에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이적과 영웅적인 사도와 예언자를 회복시키신다는 믿음은 가짜 부흥 운동이 만들어낸 핵심적인 신화임을 강조한다. 그 회복의 증거로 찰스 파함이 아그네스 오즈만이라는 어린 학생에게 안수 기도할 때에 중국 방언과 중국어 방서를 했다는 것과 알렌, 윌리엄 브란함이 치유의 회복이 일어날 것을 들었다. 오순절의 역사가인 빈슨 사이넌은 가르라는 선교사가 “누구든 성령 세례를 받으면 세계 어느 곳이든 가서 그 나라 언어로 설교할 수 있다”고 한 파함의 이론을 실험했으나 대실패라고 고백했다. 진정한 부흥운동은 참된 회개가 핵심사항이다. 그들의 계보는 다음과 같다. 찰스 파함-윌리엄 시모어(성령의 첫번째 물결)-위글스워스-데이빗 뒤플레시스-스톤과 드래드슨-토드 헌터(두번째 물결)-아그네스 샌포드와 밥 멈포드-존 윔버(세번째 물결)

4부에서 저자는 빈야드 교회 창시자인 존 윔버가 쓰러짐이 성령의 능력을 가장 명확히 보여주는 사건으로 주장한 점에 대하여 비판한다. 폴 카인은 성령의 세 번째 물결의 지도자로 존 윔버를 지목한다. 쓰러짐은 힌두교의 구루, 또는 부두교가 사용하는 방법이며 존 윔버가 퀘이커교의 목회자로 일했던 경험에서 온 것이며 성경을 왜곡해서 적용하기도 하며 사회심리학적인 조작을 이용하는 것으로 저자는 주장한다. 윔버는 쓰러짐에 대한 근거로 일곱 가지 성경을 인용하고 있으나 해석에 있어서 전혀 성경과는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5부에서 최면술사들이 일반 모임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 활동한다고 주장한다. 교회 안에서는 성령 바텐더라고 불린다. 최면술사들이 이용하는 방법이 의식변성 상태, 주변의 압력,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기, 암시 등인데, 가짜 부흥 운동 지도자들은 이것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이런 활동은 사탄의 영적 속임수라고 부르며, 진정한 부흥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을 깨우친다고 주장한다.

 

베니 힌, 하워드 브라운, 신사도 운동의 타드 벤틀리, 빈야드 운동의 존 윔버, 웨스 캠벨과 스테이시 캠벨 등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다. 이들에 의해서 주도되는 빈야드와 신사도 운동은 같은 맥락의 운동이라는 점이다. 일단 부흥을 추구하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본다. 1, 2차 대각성 운동 이후에 부흥에 대한 기대감이 수그러드는 세대에 부흥의 감각을 불러일으킨 점에서는 약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에도 비판의 요소가 있다. 부흥이 추구하는 점이 무엇인가? 사도시대와 같은 이적이 일어나고 예언자들이 이 시대의 징조에 대하여 예언하는 것인가? 이러한 것들은 정통 기독교의 부흥관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예수님께서도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 12:39)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바로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빈야드, 브라운즈빌 부흥운동, 아주사운동, 펜사콜라 대부흥운동, 신사도 운동은 빈야드에서 전파되었으며 상관관계가 있다. 여기에는 많은 부정적인 요소가 있다. 여기에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거짓 이적과 기사라는 점이다. 즉 거짓이 난무하다는 점이다. 금가루나 금이빨의 기적으로 사람들을 미혹한다. 그리고 더 충격적인 것은 기적을 조작한다는 것이다. 최면이나 의식변성 상태와 미묘한 압력에 의해서 거짓을 고백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가짜 부흥 운동 지도자들은 이런 사실을 알고서 이용하고 있다. 성령 은 거짓의 영이 아니라 진리의 영이시다. 성경에 기적과 이적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님과 사도들의 이적의 특징은 100% 성공했으며, 즉각적이었으며, 나중에 재발이 없었다. 가짜 부흥 운동에서 일어나는 기적과는 분명하게 차이가 있다. 기독교를 체험중심, 신비주의, 신앙의 주관주의로 흐르게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둘째, 그들의 성경관이다. 자신들의 경험을 지지하는 듯한 성경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한다. 성경 해석의 주관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성령의 은사주의자들이 성경을 인용할 때 전혀 문맥과 상관없이 뽑아서 자신의 필요에 맞게 사용한다는 점이다. 지진이 일어난 시간 새벽 3시 38분을 징조로 여겨 예레미야 33장 8절에 메시지가 있다고 말한다. 성경해석의 주관주의의 실례이다. 만약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예레미야 3장 38절로 읽든지 이사야 3장 38절로 읽든지, 이사야 33장 8절로 읽든지 해야지, 아니면 에스겔서로 읽든지 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불행히도 예레미야서, 이사야서, 에스겔서 3장 38절은 없다.

또한 적어도 은사주의자들은 꿈, 환상, 계시를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따른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기보다 직통계시에 의존하게 한다. 성경의 계시를 하위에 둠으로 성경을 떠나게 만든다. 성경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 정도로 사용한다. 존 웜버는 쓰러짐의 현상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성경의 일곱 가지 예를 들어 인용했으나 모두 성경 원어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었다. 윔버는 성경해석이라는 객관적인 기준이 아닌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으로 진리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성경에다 끼워 맞춘다. 이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결과를 낳게 한다. 성경의 역사적 팩트(fact)에 대한 이해 없이 본문을 과장하거나 오인한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이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성경은 읽혀지지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 성도들이 성경을 읽지 않아 말씀과 멀어지고 있는데 오해까지 하게 만든다. 오늘날 교회가 살기 위해서는 종교개혁자들이 부르짖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과 '모든 성경'(Tota Scriptura)으로 돌아가야 한다. 개혁자들의 소중한 유산을 잘 보전하고 로마 가톨릭의 전철을 되밟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뜻을 깨달아야 한다.

 

셋째, 종교적 체험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환상, 이상을 보는 것, 쓰러짐, 방언, 동물 소리, 이상한 예언 등을 행한다. 쓰러짐 등과 같은 현상은 이교에서 나타난다는 점이다. 인도의 구루, 부두교, 퀘이크교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기독교의 절대적 경험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이교의 기차에 기독교가 편승한 것이다. 이곳은 기독교를 종교 혼합주의로 만들 것이다. 그래서 가짜 부흥운동가들은 사람들에게 ‘거룩함에 대한 무거운 설교’보다는 ‘먼저 잔치를 열어 주는 것’을 하나님이 더 좋아하신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은 이미 사람 중심인 인본주의에 서 있다. 하나님 중심과는 멀어지고 있는 견해이다.

 

넷째, 신사도 운동의 오류는 사도와 예언자를 내세우는 데부터 있다. 이미 사도시대는 끝났다. 사도의 자격은 예수님과 공생애를 같이 했어야 하고 부활의 목격자가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스스로 사도라고 칭하며 예언자라고 칭한다. 오히려 사도 바울보다 엘리야나 엘리사보다 더 뛰어난 하나님의 사자들이라고 추켜세운다. 현재 은사론에 있어서 사도와 선지자는 임시직으로 소멸되었다고 본다. 사도와 예언자는 없어졌지만 사도직과 예언직은 교회를 통하여 이어진다고 본다. 프로테스탄트는 로마 가톨릭처럼 교황이 사도의 계승자로 보지 않는다.

 

다섯째, 그들은 도덕적으로 덕이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스스로 하나님의 환관이 되어 성적 욕망이 없다고 하면서 스칸디나비아 여성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 캐드린 쿨만과 결혼하기 위하여 이혼을 한 부흥사가 있었다. 또한 기독교 신앙을 ‘부와 건강’을 추구하는 번영신앙의 성향으로 몰고 가고 있다. 그리고 위대한 영적 전쟁을 위하여 청군과 회색군이 남북전쟁처럼 싸워야 됨을 역설한다. 자신들과 같이 하늘의 계시를 따르는 성도는 청군, 자신의 의지와 인간의 지혜를 따르는 사람을 회색군으로 표현하며 교회의 분열을 가속화한다. 신약 성경에서 대부분의 서신서들이 교리와 실천을 제시하고 있다. 기독교에서 교리와 실천은 병행한다. 진리가 옳게 인정받으려면 그 삶이 윤리적이어야 한다.

 

여섯째, 성령론에 있어서 문제성이 많다. 가짜 부흥 운동 지도자들은 쓰러짐, 흐느낌, 경련 등 이러한 사역이 성령의 사역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비인격적이다. 성령은 인격적이시기 때문에 사람을 땅에 눕혀서 몇 시간 동안 있게 하고 짐승처럼 행동하게 하고 부르짖게 하고 술 취한 것처럼 정신을 흐리게 만들고 몇 시간이나 웃게 하는 일을 하시지 않으신다. 그들은 믿음을 감정에 맡긴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것을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성령께서는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사람들의 병을 고치시며 귀신을 쫓아내신다. 그러므로 성령의 이적과 귀신의 거짓 이적을 구분해야 한다.

성령의 열매에는 절제가 있는데 절제도 없이 미친 듯한 행동, 난폭한 행동, 쓰러짐을 6개월 동안 할 수 있을까? 성령의 내적인 임재를 통하여 인격을 변화시키는 기독교의 능력을 외적인 표적에만 집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과연 그러한 일들이 성령의 임재와 능력의 증거로 제시하는 것일 옳을까? 여기에는 많은 의문을 제시하고 있다. 성령께서는 인격의 영이시므로 인간을 동물적으로 행동하게 하시지 않으신다. 이러한 변절되고 신비스러운 일이 기독교의 현상인 듯이 중앙무대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 우려스럽다.

 

일곱째, 찬양을 할 때 한 가지를 계속적으로 부른다는 점이다. 반복은 최면, 즉 의식변성 상태에 걸리게 되고 정신적 무장해제가 된다. 그런 후에 쓰러짐과 같은 여러 현상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존 윔버나 아놋은 의식보다 감정에 더 호소한다. 이것은 감성주의에 호소하는 것이며 이성을 해제하는 것이다. 비판적인 사고 체계를 둔화시킨다. 이것은 인도의 구루들도 마찬가지로 주장한다. 결국 이성보다는 감정에 치중한 종교는 진정한 회심에 이를 수 없다.

 

이 책의 장점은 빈야드나 신사도운동, 오순절 운동의 계보를 잘 파악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오늘 현대 기독교에 혼탁한 영적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개혁주의 신앙인 하나님 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의 신앙을 파수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칼빈은 성령께서는 말씀없이 역사하지 않으신다고 했다. 성경 말씀을 떠나면 모든 지식과 사조가 흔들리고 마귀가 좋아하는대로 끌려갈 뿐이다. 결국 기독교의 본질을 흐리게 만들 뿐이다.

사람들은 거대한 부흥에 매달리지만, 그리스도의 몸은 거대한 개혁을 절박하게 필요로 한다. 교회가 개혁할 때만 문화가 부흥할 수 있다. 오늘날 기독교가 겪는 비극은 사람들이 잘못된 곳에서 특별한 체험을 추구한다는 데에 있다. 진정한 체험은 육체의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기본으로 돌아갈 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 기본은 복음으로써 기독교의 근본적인 교리를 의미한다. 말씀이 회복되고 발견되지 않는 곳에 진정한 부흥은 없었다. 저자가 가짜 부흥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믿음에서 감정으로의 변화, 사실에서 환상으로서의 변화, 이성에서 환상적인 계시로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서평을 마무리하면서 1차 대각성운동의 중추적인 인물인 조나단 에드워즈의 말을 인용한다. “성령님이 행하시는 진정한 부흥 운동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적인 기쁨과 이익, 영광을 추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이 제시하는 미래와 영원한 행복을 소망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게끔 만드는 것이다.”